말은 우리를 ‘마치 ~인 듯‘ 살게 만든다. 언어란 질서이자 권위이기 때문이다. 권위를 잘 믿는 이들은 쉽게 속는 자들이기도 하다. 웬만해선 속지 않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속지 않는 자들은 필연적으로 방황하게 된다. 세계를 송두리째로 이상하게 여기고 만다. - P9
자신에 관한 긴 글을 듣자 오랜 서러움이 조금은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슬아의 해설과 함께 어떤 시간이 보기 좋게 떠나갔다. 이야기가 된다는 건 멀어지는 것이구나. 존자는 앉은 채로 어렴풋이 깨달았다. 실바람 같은 자유가 존자의 가슴에 깃들었다. 멀어져야만 얻게 되는 자유였다. 고정된 기억들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 P109
낮잠 출판사를 처음 차릴 때만 해도 슬아는 책 만드는 일이 딱히 두렵지 않았다. 잘 몰랐으니까. 몰라서 무턱대고 씩씩하게 할 수 있었다. 지금의 슬아는 그렇지 않다. 글쓰기와 출판이라는 작업이 갈수록 어렵게 다가온다. 책을 만들어 몇천 부씩 인쇄하는 것이 중대한 결정임을 알게 된 것이다. 이 점에서 할아버지와 슬아의 운명은 궤를 달리한다. 할아버지는 양면테이프를 두려워하는 사장이 아니었다. 이제 슬아는 책이 양면테이프보다 열 배는 두려운 무엇임을 안다. 그 두려움을 알게 된 것에 안도한다. 책을 사랑하는 동시에 두려워하는 자들이 출판사를 운영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 P173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 신문에 실리고 텔레비전에 나오고 책이 여러 권 팔린대도 말이다. 무신경한 인터뷰어도 배배 꼬인 악플러도 찬사를 보내는 독자들도 사실 진짜로는 관심이 없을 것이다. 숙희와 남희가 그렇듯 자신 앞의 생을 사느라 분주할 테니까. 그것을 기억해낸 슬아의 마음엔 산들바람이 분다. 관심받고 있다는 착각, 주인공이라는 오해를 툴툴 털어내자 기분좋은 자유가 드나든다. - P180
"엄마, 오해는 필연이야. 괜찮아." - P286
가족의 유산 중 좋은 것만을 물려받을 수 있을까. 가족을 사랑하면서도 그들로부터 멀리 갈수 있을까. 혹은 가까이 머물면서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서로에게 정중한 타인인 채로 말이다. - P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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