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과 인권 - 돌봄으로 새로 쓴 인권의 문법
김영옥.류은숙 지음 / 코난북스 / 202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돌봄은 근본적으로 관계 안에서 관계를 갱신하고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일이기에 돌봄 위기라는 건 사회가 재생되지 않는다는 걸 의미한다. 가장 작은 범위로는 아동, 장애인, 노년 등 당사자 개인의 위기, 돌보느라 자기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대개는 여성이다)의 위기이고, 넓게 보면 사람들이 서로 협력해서 만든 관계라는 의미의 사회가 재생산되지 못하는 위기다. - P11

그간 법적·정치적 윤리에 치우쳤던 인권은 돌봄 윤리와 만나면서 인간의 보편적인 취약성과 그에 따른 상호의존성에 주목하게 됐다. 그 배경 조건은 사람 ‘사이‘, 다른 말로 ‘관계‘다. 개인은 자기의 고유한 삶을 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첩되고 교차되는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가능하다. 인권에 대한 관계에 기반한 접근은 다른 무엇 때문이 아닌 인간의 관계 때문에 사람을 사람으로서 대한다는 것이다. 모욕하고 멸시하고 착취하는 관계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다른 방식의 관계, 더 나은 의존관계를 만드는 것이 적극적인 인권 실현이다. 인간 누구나 관계속에 깃들여 살며, 서로의 취약성을 돌아보고 응답할 보편적 책임이 발생한다. - P29

존엄을 말하지 말자는 게 아니다. 존엄을 어떻게 말하느냐와 존엄이 어떻게 가능하냐가 중요하다. 누가 어떤 자리에서 누구를 향해 무엇을 말하느냐가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당신이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당신을 기억하고 있어요. 당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라는 응답이 필요할 것이다. 기억하고 알고 있다는 것은 그의 살아온 내력과 함께 그의 현재 모습을 인정한다는 의미다. - P34

이 책에서는 역량을 돌봄의 관점에서 적용하고 이해하려 한다. 여기서 능력이라 하지 않고 역량이라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능력이 단순히 훈련과 반복된 실천으로 얻어지는 것이라면, 역량은 돌봄이 왜 필요한가, 돌봄은 무엇인가, 어떻게 돌봐야 돌봄 받는 사람도 돌보는 사람도 존엄성이란 걸 잘 지키면서 사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재생산할 수 있는가를 포괄하기 때문이다. 매뉴얼대로 잘하는 게 능력이라면, 역량은 생각하고 질문하면서 돌봄의 내용과 형식을 고민해 바꾸어가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 P40

이제까지의 취약성 논의를 돌봄의 맥락에서 정리해보자. 취약성을 보편적 속성으로 갖는 인간의 자율적인 독립의 삶에는 크게 보아 두 가지 움직임이 관여한다. 우선 타인의 취약성에 눈뜸으로써 윤리적 존재가 된 개인이 서로 의존할 만한, 믿을 만한 돌봄의 관계를 형성한다. 서로에게 잘 매달려 경쾌하게 진지운동을 한다. 개인은 이러한 상호 달림, 상호의존을 통해 사회라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시민이 된다. 시민은 자기 삶의 안전과 의미가 사회를 함께 만드는 다른 존재의 연대와 협력 덕분임을 알고, 그 신뢰 속에서 자신도 그를 위해 안전망의 한 코가 되겠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실뜨기를 닮은 이 창의적 연결 속에서 생성되는 자율성은 관계적 자율성이다. 취약해서 늘 안전이 위협받는 상태에 있는 개별 인간이 기본적인 도덕적 권리인 인권의 감각으로 서로 의존하고 기대며 돕지 않는다면, 사회 공동체는 흔들리고 무너질 것이다.
다른 움직임은 권력의 구조적 차이와 사회제도의 취약성 때문에 발생하는 특수한 상황에서의 취약성에 적극적으로 책임 있게 응답하는 국가와 관련된다. 아동, 장애인, 환자, 노인, 비혼모, 노숙인, 기초생활이 위협받는 빈곤한 사람 등은 더 취약하고 더 의존적이다. 그만큼 더 집중적이고 포괄적인 돌봄이 필요하다. 기회와 접근의 의미 있는 제도적 지원뿐 아니라 사회적 정의의 세 범주인 인정, 경제적 분배, 왜곡 없는 재현(repre-sentation)에서 평등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국가의 더 적극적인 반응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게 아니라 평등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일어난다. 그리고 이러한 적극적인 반응이 취약자들의 회복 가능성을 높인다. - P65

돌보는 사회는 돌봄 자원이 풍부하고, 이 자원이 평등하고 정의롭게 분배되고 순환하는 사회다. 돌봄은 개인 단위에서, 동시에 사회와 국가 단위에서 생산되고 축적되고 유산으로 상속된다. 돌봄 자원은 누구나 돌보고 아무나 돌보는 돌봄 민주주의와 연동되어 있다. 즉 돌봄 역량이 자신의 이름을 지키는 일과 시민적 덕성을 증명하는 지표가 될 수 있는 사회가 돌봄 민주주의 사회다. 여기서는 평등과 자유가 적대적 대당이 아니라 서로에게 정당성과 구체적 의미를 부여하는 원리요 힘이다. - P73

돌봄에 필요한 시간과 정성을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같이 도모한다면 호혜적이 된다. 따라서 상호의존성에 대한 인정과 호혜성 구축은 사회적일 뿐 아니라 정치적인 행위가 된다. 돌봄 현장은 병상 같은 물리적 장소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집 안이든 어디든 모든 돌봄 현장의 의미는 정치성을 갖고 있다. 돌봄이 자본주의적 효율성이나 그에 따른 시민의 자격 심의와 연동될 때 돌봄 관계를 둘러싼 사회적인 인식과 실행의 체계는 ‘어떤 삶은 돌볼 가치가 있고 또 어떤 삶은 돌볼가치가 없다‘, ‘누구에게 돌봄 자원을 쓸 가치가 많다 혹은 적다‘는 식으로 흐른다. 이런 식의 논의와 판단은 매우 정치적이다. 존재 가치를 저울질하는 대신 시간과 정성을 같이 기울이되, 획일적이 아니라 각 사람의 고유성을 서로 잘 돌보는 사회가 호혜적인 민주사회다. 이런 사회에서라야 ‘좋은 돌봄‘이 가능하다. - P81

각각의 특수한 상황에서 타자의 구체적인 필요 욕구에 반응하고 돌보는 것이 윤리적 태도라면 보편성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이에 대해 여성주의 윤리 철학은 두 가지 보편성의 차원을 제시한다. 첫째, (앞 장에서 논의한) 취약성의 인류학적 보편성과 그에 따른 상호의존성, 둘째, 자신을 타자의 필요 욕구에 반응하는 ‘선한 자아‘로 고양하길 원하는 갈망의 보편성이다. 넬 나딩즈는 이러한 갈망의 토대가 되는 것은 돌봄 받은 기억이며, 모든 사람은 이 기억에 접근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보편적이라고 보았다.

"자연스러운 돌봄의 관계는 우리가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선‘이라고 인식하는 인간 조건으로 확인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희구하고 추구하는 바로 그 조건이다. 또한 그것은 우리에게 도덕적이 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그 특별한 관계를 맺고자 하는) 돌봄에 대한 갈망이다. 우리는 계속 돌범의 관계 속에 있고 돌보는 사람으로서 우리 자신의 이상을 고양하기 위해서 도덕적이기를 원한다." - P86

돌봄 상황을 가능한 피하면 좋을 폐 끼치는 상황으로만 보는 것은 의존과 그에 따른 돌봄을 바라보는 사회의 왜곡된 시선 때문이다. 사회적 가치체계는 타인의 돌봄에 의존해 삶을 유지하는 것은 민폐라는 메시지를 지속해서 발산한다. 웬만하면 남의 도움 없이 스스로 해결하고자 하는 게 타당해 보이겠지만, 문제는 ‘웬만하면‘이 어느 정도를 가리키는지 사회적으로 합의된 바가 없다는 데 있다. 돌봄 욕구를 중심에 두고 소통한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가능한 한 남의 도움은 안 받는 게 최선이라는 명제가 성립한다. - P104

장애여성공감은 창립 20주년을 맞아 출간한 책 『어쩌면 이상한 몸』에서 돌봄을 잘 받을 훈련, 몸을 내맡기는 연습에 관해 이야기한다. "존엄하기 위한 노동은 모두에게 필요하며, 끊임없이 의사소통하며 서로를 직면하고 몸을 접촉하면서 익혀지는 것"이라고 말이다. "타인에게 의존해야 하는 자신을 대하는 건 어떤 투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 P107

돌봄은 언제나 얼마간의 자기희생을 요구하고, 삶을 재편하도록 강요하며, 한계를 시험한다. - P109

‘나‘를 돌봄 받는 사람으로 상상할 때 돌보는 일의 형태와 의미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돌봄에 관해 할 이야기가 더 많아지고 담론 차원에서 상상력의 교환도 더 촉구될 것이다. ‘좋은돌봄’에는 적절한 거리 두기 그리고 돌봄 받는 상대방에 대한 감정이입, 공감이 요청된다. 누구를 대상으로 하든 돌봄은 거리두기와 다가가기를 반복하는 두 진자운동의 조율에 따라 양상이 달라진다. 다른 관계성을 형성한다. 정서적 접속이나 교류가 어려운 돌봄 환경에서도 외부의 보상이나 인정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나 여타 에너지가 투여된다. - P1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