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일기
김지승 지음 / 난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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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스 버틀러가 그랬다. ‘나는 누구인가’말고 ‘함께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누구인가’를 질문해야 한다고. - P199

자매애는 약자들 속의 약자를 알아보는 깊숙한 시선입니다. 알아볼 수 있기 때문에 혐오하고 증오하고 사랑할 수 있었어요. 여성들 사이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관계를 자매애로 한정하는 일은 또 한번 여성의 감정과 욕구를 억압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자매애 안에서도 모진 말들과 악의가 무럭무럭 자랍니다. 그것에 대해서도 자매애만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 P228

굳이 어렵게 쓸 필요가 있나요?

어렵고 쉽고의 기준은 차치하고, 어렵다는 게 대충 무슨 말인지도 안다 치고 말하자면 그렇게 쓸 수밖에 없는 삶이 있다. 말끔하게 정제된 이야기는 어떤 주요한 규칙으로 세상에 있는 무언가를 삭제하고 편집한 결과다. 그 규칙은 누가 만드는가, 라고 시작하기에는 이 얼굴도 모르는 이를 향한 애정이 아예 없었으므로 나는 되도록 짧게 혼잣말한다. 정제된 이야기라고 썼지만 이것 역시 간명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그냥 번번이 정육점의 포장육이 떠오르더라는 것. 살아서 고통받는 소의 이미지를 불편하게 그리지 않고 깔끔하게 포장된 부위를 원하는 만큼 사갈 수 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는 이들의 이야기. 죄책감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우리가 외면하고 망각하는 게 놀랍도록 많다는 사실만 헤아려도 이야기가 그렇게 딱 떨어지게 설계될 수 없다는 걸 이해할 수 있을 텐데. - P271

내가 하는 말은 제일 먼저 내게 들렸다. 말이 되기도 전에 들렸다. 대답도 내게 먼저였다. 시끄러. 웃기지 마. 거짓말. 너나 잘해. 많은 사람 앞에서 발언할 때 나는 나 자신도 거기 사람들 사이 어딘가에 앉혀놓고 말한다. 다양한 자기모순 안에 똬리 튼 사람들 틈에 앉아, 가장 잘 아는 한 사람의 모순을 직시하는 내가 언제나 부끄럽다. 그럴 때 시도하는 농담은 결과가 늘 좋지 않다. 더 부끄러워진다. 말의 뼈들이 다 부러진다. 말이 눕지도 서지도 앉지도 못하면서 그 모든 것을 하려고 애쓴다. 나를 마주보고 앉은 이들은 모를 그런 순간, 나만 감각하는 순가. - P295

‘아, 못하겠다……‘ 다음을 채우는 것들. 멈춤이고 하차이고 쉼이고 영영 그러지 못해서 치닫는 슬픔이다. 궤도 밖에도 삶이 있으므로 우리는 계속 고통받겠지만 "아, 못하겠다……" 하고 일단은 밖으로 탈주하는 상상. 트랙에서 병실에서 이 행성과 몸에서. - P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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