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일기
김지승 지음 / 난다 / 202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내 방향으로 움직였을 뿐인데 그 결과 누군가와는 멀어지고 누군가와는 가까워진다. 너도 그랬을 것이다. 우연과 의지와 기호와 욕망이 추동하는 움직임이므로 그 멀어지고 가까워짐에 내 책임이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관계 변화의 책임을 추궁당하면 좀 억울해진다. 그 정도로 명백한 의도는 없었다 느끼고 그게 사실일 테니까. 내가 움직이고 네가 움직여서 일어난 관계의 변화는 필연적일 뿐 책임을 물을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근 몇 년, 관계와 연결된 고민을 할 일이 거의 없었다. 멀고 가까워짐이 용케 순조로웠다. 보통은 그렇지 못하다. 지금도 그렇다. 나는 모든 걸 무효화하고 혼자 있고 싶다. 피곤하다. 이 달라진 위치에 대한 감각으로부터 오는 모든 어긋남이 좋아하는 마음이 관계를 지탱하는 골격이라 했을 때 그 마음이 서서히 빠져나가면서 무너져내리는 관계의 빈껍데기를 보는 건 어쨌거나 고통스러운 일이다. 여전히 너를 좋아하지만 그 마음에는 이제 힘이 없을 때. 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싶을 때, 아니 너무 잘 알고 있을 때. 우리는 그냥 매일 조금씩 움직이며 잃고, 매일 무언가를 잃고 마는 자신을 외면한다. 너는 이런 사람, 나는 이런 사람. 처음 만난 그 자리의 허상을 압정으로 꾹 눌러둔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도 나를 계속 좋아해줄 거야? 이런 질문은 영영 하지 못한다. 원래 있던 자리로부터 쉽게 물러난다. 뭐든 내가 할 수 없는 일인 것처럼 느끼면서 무능력함을 곱씹으면서 암담해지면서 자책하면서 나는 그냥 있다. 관계 실패와 회피에 익숙한 사람이면 흔히 그렇듯 몸피를 줄이고 체온을 낮추는데도 능하다. 관계는 그렇게 취소된다. 존재도 취소될 수 있다면 가장 먼저 나를 그 취소의 순서에 세우겠지만 그럴 수가 없다. 이 불능의 감각, 존재 대신 자꾸 취소되는 마음들. 그러려니 하고 살았더니 그것 봐라, 하고 돌아오는 삶의 단념들에게 묻고 묻고 또 묻는다. 집요한 질문일수록 틀린 질문이다. 틀린 질문일수록 집요해진다. 이제 나는 그걸 안다. - P108

몸은 차별과 혐오가 기입되는 가장 첨예한 장소다. 몸을 기울인다는 건 그런 장소의 닿음이다. 내 몸은 어디에 닿아 있는가. 질문이 저 멀리 앞서가고 있다. 나는 이제 겨우 내 몸에 도착한 상태다. 방청소에 몸을 쓰다가 알았다. 살려고 이러는 거구나. 약속을 취소하고 책상 앞에 앉자마자 알았다. 애쓰고 있는 거구나, 내가. 문제는살자, 하고 애쓴 일들이 도무지 삶 쪽으로 나를 인도하지 못한다는 거였다. 내 마음 편한 방식이 내게 정말 도움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 P124

약속이 취소되면 안심이 된다. 약속 상대를 좋아하지 않아서도 아니고(그런 경우도 있다) 외출 준비가 귀찮아서도 아니다(그럴 때도 있다). 그건 전적으로 내 문제다. 약속이 상대방의 사정으로 취소되는 순간 긴장이 풀리면서 나른해진다. 거절에 언제나 실패하는 이들이 기댈 데라고는 비자발적 ‘취소‘밖에 없으니까. 타인과는 어느 정도 긴장이 수반되기 마련이지만 그 정도가 유난히 심한 편이다. 타인 앞에서 늘 과장되어 있고 과도한 에너지를 쓰며 사회화된다. 통화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누구와 함께든 살아 있는 동안은 그럴 것이라는 예감. - P14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