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를 보는 이유는 대개 무언가에 싫증나거나 지루하거나 권태로워서이다. 싫증은 피로에서 생기고 지루함은 반복에서 생기고 권태는 억류에서 생겨난다. 이것은 삶의 주된 상태이고 셋 다 불감증의 양상을 드러낸다. 그리고 싫증은 중단을 바라고 지루함은 일탈을 바라고 권태는 전복을 바란다. 그러나 일상은, 중단되지 않고 일탈도 없고 전복도 없이 드라마와 패키지여행과 기념일에 의지해 간신히 흘러간다.
-승객- - P12
현은 공허하게 웃었다. 그는 막다른 곳에 기대 사는 사람 같았다.
"옷뿐만 아니라 무엇이든, 닿는 것을 못 견뎌요. 그러니 아마도, 마지막 순간에도 난 혼자 죽겠지요. 그게 좀 걸리는 일이었지만, 이젠 아무렇지도 않아요. 모든 죽음은 아무리 포장해도 결국 자연이 되는 일이니까요. 혼자 죽든 가족에 둘러싸여 죽든, 중환자실에서 산소호흡기를 매달고 죽든 마찬가지예요. 속일 수 없는 건 자연으로서의 죽음 그 자체지요."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루에 한 번씩 또박또박 사는 일뿐이다.
-승객- - P38
"이별도 자기 한계를 감당하는 하나의 방법이지. 하지만 슬픔은 오래 계속돼. 돌아보면 그때의 마음과 풍경들이 너무 아름다워서, 현실에 담을 수 없는 것을 납득하게 돼. 난 사람들이 어떻게가정을 가지고 오랜 세월을 함께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차라리 송곳 같은 현실 위에 나 혼자 살아가는 일을 이해하기가 더 쉬워."
"서로가 쓸모없어지는 것에 익숙해질 때까지만 견디면 돼. 그러면 면적이 생겨. 같이 있어도 존재감이 안 느껴질 정도로 편안해지는 게 진짜 관계의 묘미라고 생각해. 난 그런 경지를 바라."
-붓꽃- - P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