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신분증 뒤에는 스티커 한 장이 붙어 있다. ‘응급 상황 시 아래 번호로 연락해 주세여. 집 안에 반려동물이 혼자 있습니다.’ 짝꿍과 엄마 번호를 차례로 적어두었다. 집에 사는 고양이는 말을 할 수 없고, 전화할 수 없으며, 굳게 잠긴 문을 열 수도 없다. 나는 내가 갑자기 죽게 되더라도 나와 함께 살던 고양이가 살아 있는 동안은 지금과 비슷한 수준의 보살핌을 받길 원한다. 새해에는 신분증에 스티커를 한 줄 더 추가했다. ‘무의미한 연명 치료를 원하지 않습니다.‘ 혹시나 내가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위급 상황에 처했을 경우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확실히 해 두고 싶었다. 짝꿍과 나는 이 주제로 여러 번 대화를 나눴고, 서로의 생각을 지지하며 공감한다. 나는 때때로 오늘을 잘 살기 위해서 죽음을 생각한다.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좋은 죽음‘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좋은 삶‘을 사는 것"이라는 말에 깊이 동의한다. 죽음은 공평하다. 나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필연인 죽음은 늙은 결과가 아니라 살아온 것의 결과로 평가받아야 한다. 그런 생각이 든 날은 좀 더 씩씩한 하루를 보내게 된다. 외할머니는 어땠을까. 외할머니는 자신의 죽음을 고민해 본 적 있을까. 우리는 왜 이 주제를 한번도 나누지 못했을까. 외할머니에게 아직 묻고 싶은 것이 많다. 그러니 한라봉이 남아 있고 보행 보조기를 ‘모셔 놓은‘ 당신 집으로, 당신이 돌아오면 좋겠다. 나는 당신에게 꼭 묻고 싶은 게 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속에서 완화 치료전문가인 수전이 자신의 아버지에게 물었던 질문이다. "제가 알아야 할 게 있어요. 당신이 생명 유지를 위해 얼마만큼 견뎌낼 용의가 있는지, 그리고 어느 정도 상태면 사는 게 괴롭지 않을지 알아야만 해요." 그래서 당신 대답에 따라, 당신 뜻대로 존엄한 죽음을 ‘선택‘할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이 우리에게 허락된다면 좋겠다. "결국은 이기게 되어 있는 죽음"을 주제로 우리가 오래 대화할 수 있으면 좋겠다. - P61
대런 맥가비는 《가난 사파리>에서 독자에게 한 가지 태도를 제안한다. "나는 우리가 먼저 정직해지는 데서 시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혁명은 없을 것이다. 우리 평생에는 없을 것이다. 이 체제는 다리를 절룩거리며 나갈 것이고 우리도 그래야만 할 것이다." 그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한때 바랐듯이 정치권력이나 체제가 바뀌기를 ‘순진하게‘ 기대했다. 이제는 그저 일정 부분 망가진 울퉁불퉁한 길을 일단 걸어가 본다. 내면의 힘을 발견하고 기르는 편에 서서 할 수 있는 일을 해 보려 한다. 어떤 문제를 해결할 힘은 누군가로부터 오는 게 아니라(빈곤은 이런 방식으로 산업화되었다) 나에게도 있다는 걸, ‘가난한‘ 우리도 이 세계의 일부이고 책임 있는 구성원이자 시민이라는걸 믿으면서. - P75
<페미니즘을 팝니다>의 저자 앤디 자이슬러는 성평등을 이렇게 정의한다. "성평등이란 단순히 여성의 지위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여성에게도 커다란 실패를 허용하는 것이다." 시장 후보를 뽑는 투표장에 들어간 제인은 자신의 이름에 투표한다. 그 순간 제인은 20대의 자신, 아비바로부터 질문을 받는다.
"하나만 물어도 될까? 어떻게 그 스캔들을 극복했어?" "수치스러워하기를 거부했어."
그 문장을 읽은 이후 나는 또 한번 달라졌다. 실패나 실수를 이전보다 덜 두려워하게 됐다. ‘내가 해도 될까‘ ‘잘할 수 있을까‘ ‘못 할 것 같아‘라는 생각을 물리치는 데 저 문장만 한 부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장래희망도 생겼다. 모건 부인처럼 ‘같이 망해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실패하고 실수해야 잘하는 방법도 알 수 있게 된다고. 두렵다면 함께 망해 주겠다고, 그러니 우리 더는 조심하지 말자고 손 내밀 수 있는 사람. 그렇게 나이 먹는다면 뒤에 오는 여성들에게 지금보다는 조금 덜 미안할 것 같다. - P134
기어이 서글픔이 다정을 닮아간다 피곤함이 평화를 닮아간다 - 김소연, <너를 이루는 말들> 부분
서글픔과 피곤함이 ‘기어이‘ 다정과 평화를 닮아 가는 일은 타인과 세상을 알고자 하는 마음을 통과하는 동안 이뤄지는 것이다. 모르겠는 것,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알고 싶다‘는 마음이 될 때 우리는 연결된다. 우리를 그렇게 연결하는 것은 아직까지도 꽤 자주 활자라서 나는 계속 언론사에서 일하는지도 모르겠다. 좋은 저널리즘이라니 우리끼리만 아는 ‘나쁜 농담‘ 같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속절없이 그런 것에 마음을 홀리곤 한다. 그리고 여전히 그 힘을 믿고 싶다. - P165
내가 편집자로 처음 기획하고 만든 책인 <죽는 게 참어렵습니다> (시사인북, 2021)는 제주에서 보낸 그런 시간 덕분에 묶을 수 있었다. 《죽는 게 참 어렵습니다》를 통해 나는 ‘존엄한 죽음‘ ‘좋은 죽음‘이라는 단어가 감추고 있는 현실을 보여 주고 싶었다. 죽음이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사건임을, 우리 모두가 연루된 일임을 드러내 질문하고 싶었다. 한 사람이 사회에서 병들고 아프며 죽어 가는 과정은 단순하지 않다. 많은 사람이 관여한다. 삶을 이야기하다 보면 질병이, 질병을 이야기하다 보면 돌봄이, 죽음과 섞여 들었다. 우리는 왜 아프면 ‘깨끗하게 죽어 버리는‘ 미래를 상상할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애써 모른 척하면서. 존엄사를 허용하는 국가들은 사회복지가 잘되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존엄사가 존엄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회가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는 복지가 존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나의 죽음을 운에만 맡길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죽음의 미래‘를 만들어 가고 있다. 죽음을 둘러싼 각자의 내밀한 경험이 더 많은 보편의 이야기로 나눠질 때 삶도 조금은 덜 잔인해진다. -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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