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말해, 프레카리아트는 단순히 이질적인 게 아니라 위계적이다. "누군가의 삶은 다른 누구의 삶보다 더 위험에 취약하고, 더 망가지기 쉽고, 더 불안정하고, 더 전망이 없다."(김홍중 2016: 50) 불안정성의 차등적 분배를 논하면서 주디스 버틀러(2018: 47)가 던진 질문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누가 인간으로 인정받는가? 누구의 삶이 삶으로 간주되는가? 마지막으로, 무엇이 애도할 만한 삶이 되게 해주는가?" 버틀러는 9.11 테러 당시 퀴어한 생명들은 부고란에 포함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동시에 미국에 의해 발생한 전쟁 사상자에 대한 부고는 없다는 불편한 진실을 상기시킨다. "이라크 어린이 20만 명이 걸프 전쟁과 그 여파로 인해 사망했다 한들, 개인으로나 집단으로나 우리는 그들 중 어느 누구의 삶에 대한 이미지나 사고 틀을 가지고 있기는 한가? (・・・) 그 아이들에게는 부여된 이름이 있는가?" (2018: 66) 자신을 프레카리아트로 선언한, 혹은 그렇게 호명된 사람들 간에도 위계에 대한 질문은 중요하다. 어떤 형태의 취약성이 공론장에서 논의될 만한 권위를 획득하는가, 혹은 그러지 못하는가? 어떤 집단의 고통이 "우리 내면의 깊은 감정을 뒤흔"들면서 "관심의 원circle of concern"(누스바움 2019: 30-31) 안에 포함되고, 제도적 개입이나 집합적 대응을 촉발하는가?(조문양 2020: 20-21) - P322

메리필드(2015: 292)가 강조했듯, "지속하는 마주침이 일어나면 그 어떤 것도 예전과 동일해지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들을 생성의 과정 속으로, 뭔가 다른 것이 되어가는 과정 속으로 쏘아 보낸다". 불평등이 만인의 언어가 되고 겹겹의 불안이 다수의 ‘피해자‘ 선언을 부추기는 시대이지만, 그럼에도 어떤 생명은 다른 생명보다 훨씬 더 취약하다. 폭우가 도시를 삼켰을 때 어떤 운전자는 물에 잠긴 승용차 때문에 골치가 아프지만, 어떤 인간은 반지하에서 속수무책으로 주검이 되고 만다. 서로 마주치고, 연결되고, 다른 불안을 들여다보려는 수고를 포기한 채 각자가 방공호를 파느라 분주한 시대에 인류학의 자리는 어디일까? 적어도 나는 사람들이 만드는 배치를 단순히 따라가기보다 함께 배치를 만들어가는 정치적·윤리적 실천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의 헛발질은 감수해야겠지만. - P353

성찰과 토론, 새로운 시도를 거듭하면서 주민운동의 방향도 조금씩 달라졌다. 2021년 11월 중순에 열린 ‘한국주민운동 50주년‘ 기념 행사에서 활동가들은 주민운동의 방향을 가난(주제), 공동체(방식), 생명(목적), 지역사회(실천 현장), 협동(실천 원리), 민주주의(실천 목표)로 요약했다. 기후위기가 모두의 생명권을 보장하는 운동의 배경으로 전면에 등장했다. "생명은 삶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며 인간다운 삶 그 자체다. 사회적 억압 속에 놓여 있는 가난한 사람들이 ‘같이 살자‘고 절규한다. 억압의 굴레에서 벗어나 인간답게 살고자 한다. 인간의 억압으로 고통받는 땅과 물, 공기가 ’같이 살자‘고 절규한다. 사회적 죽음, 생태적 죽음을 극복하고자 하는 강렬한 삶의 열망이며 지속가능하게 살아가려는 의지다."(최종덕 2022: 138) - P395

또 하나, 주민들의 건강에 예민한 활동가들은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이나 배치 이론을 굳이 공부하지 않아도) 한 인간의 존재가 그의 본질에서 오는 게 아니라 그가 맺는 관계로부터 나온다는 점을 쉽게 인지했다. 쪽방촌에서 병든 몸의 병원 길에 동행하고, 주검이 된 몸의 장례를 치러주는 일을 수도 없이 반복하며, 활동가들은 인간의 신체가-앨러이모(2018)가 ‘횡단-신체성trans-corporeality‘이라 표현한 대로-언제나 인간을 넘어서는 세계와 맞물리면서 형성된다는 점, 가난한 인간의 몸이 독성으로 뒤덮인 "땅, 물, 공기"와 만날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는 점, 오랫동안 혹독한 세계와 마주하면서 형성된 빈자의 신체는 그 자체로 느린 폭력이 빚어내는 장기적 비상사태"(닉슨 2020 : 20) 라는 점을 자연스럽게 이해했다. 인간은 "사회물질적 어셈블리지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존재가 된다"지만(김은성 2022: 34), 극빈의 인간이 세계와 관계하며 형성한 관계의 다발은 고만고만하게 비슷해서 서울역이든 그 인근 동네든 결국 일정한 장소에, 남루한 비인간 자연과 함께 모여 산다. "한번 고인 가난은 흩어져도 다시 고였다."(이문영 2020:278) - P396

나는 이 책 서두에서 ‘우리 시대 빈곤은 어떠한가‘라는 질문을
‘빈곤을 어디로 가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바꿔보기를 제안했다. 이 질문에 답하기는 원래도 어렵지만, 인류세라는 시공간에서는 더욱 막막하다.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적어도 한국 사회활동가들이 보여준 ‘동거‘ 만큼은 논의의 규모가 달라지더라도 우리가 품어야 할 윤리가 아닐까 한다. 자활과 자립을 섣불리 강요하는 정부 정책은 낡고 병든 몸이 일정한 프로그램을 거쳐 ‘건강한‘ 몸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발전의 꿈에 머물러 있지만, 오랫동안 가난한 사람들과 동거해온 활동가들은 다른 꿈을 꿨다. 이들의 회복력이 더딜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 당장에 거창한 반전을 바라기보다 별 볼일 없는 일상을 함께 견디며, 그럼에도 누구등 지금보다 더 나은 세계-내-자리를 확보할 자격이 있음을 서로 배우고, 이 느린 시간을 거쳐 가난한 주민이 제 권리를 "스스로 말하는"(허병섭 2009) 세상을 바랐다. 이런 세상은 활동가-동거인한테도 유익하고 소중하다. "어떤 활동가가 가난한 주민들을 만나고 그들 속에서 무언가를 도모하느냐 아니냐는 결국 그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살고 싶으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신명호 2011:31) 취약하고 유한한 존재, 빈곤이라는 문제, 빈곤을 둘러싼 공론장, 빈곤에 맞선 비판 · 저항과 함께 [同] 머무르고 살아간다는 [居] 감각과 인식, 의지와 노력이 지구라는 너른 지평에서 창발하는 꿈은 여전히 나를 긴장하게 만든다. 지구와 오래 동거하고 싶은 인간이라면 기꺼이 감수해야 할 긴장이다. - P39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