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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우주를 혼자 여행하지 않는다 - 여성 영웅 서사의 세계
게일 캐리거 지음, 송경아 옮김 / 원더박스 / 2025년 8월
평점 :
어마어마한 책을 읽었다. #여자는우주를혼자여행하지않는다 는 여성인 나뿐만 아니라 남성인 남편, 아들들,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도 어마어마할 책이다. 이 책은 이제까지 우리가 읽고 보아왔던 문화상품 속 여성과 남성의 여정을 보다 키 큰 나무 위에서 조감하는 매우 참신하고 미래지향적인 분석서이자 평론서다.
네 개의 키워드를 (여자, 우주, 혼자, 여행하지 않는다)를 쥐고 나무에 올라가 ‘여성 영웅 서사의 세계’를 섬세하고 치열하게 분석하는 이는 미국의 소설가 게일 캐리거다. 소설가가 되기 전 그는 고전 신화학과 철학, 인류학에 열렬한 흥미를 가지고 고고학자의 길을 걸었다고 한다. 그는 신화에서 대중문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야기 세상을 넘나들며 이미 평가가 끝난 이야기에 새로운 자리를 제시한다. 인간의 감정적 심리를 만드는 내적투쟁보다 이야기의 서술과 구조에 집중할 것이고, 내면적 깨달음과 자기수용이라는 여성 영웅에 대한 기존의 시각을 이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그는, 일찍이 동류의 작업을 했던 조셉 캠벨과 융과도 거리를 두고 자신만의 탐색을 과감하게 시도한다. 고립을 자처하고 영광을 독점하는 남성 영웅 이야기와, 남성 영웅의 집과 품이 되는 것으로 여성 영웅의 지위를 획득하는 기존 남녀 영웅 구조를, 이야기는 그대로 둔 채 기준을 다시 세워 재해석한 것이다.
작가가 새로운 기준으로 삼은 키워드가 여럿인데 대표주자는 ‘연대’와 ‘위안’이다. 너무 흔하다고? 전혀 새롭지 않다고? 맞다. 이 단어들은 언제부턴가 도덕교과서 같은 뻔한 얼굴로 우리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진부함이 새로운 기준이 될 수 있는 건 이들의 쓰임새 덕분이다. 게일 캐리거는 ‘연대’와 ‘위안’으로 이야기의 내용이나 주제를 설명하지 않는다. 서로를 위안하고 돌보는 공동체성을 이야기의 전체 구조를 설명하는 데 사용한다. 이로써 ‘연대’와 ‘위안’은 더 이상 특정 여성의 내적 특성이나 일상에 국한되지 않고, 여성(적) 영웅 여부를 가르는 삶 전체의 기준이 된다. 이 기준을 따른다면 생물학적 성과 상관없이 누구나 진짜 영웅이 될 수 있다.
게다가 그는 그동안 터부시되어 온 ‘로맨스’를 여성 영웅 여정의 수호자이며 본질적으로 연결된 장르로 격상시켜준다. 이 부분에서 참으로 짜릿했다. 학창 시절 읽기와 숨기기 사이에서 줄을 탔던 로맨스 소설책의 너덜너덜해진 귀퉁이가 떠올랐다. 내가 그토록 로맨스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던 건 남주의 구릿빛 근육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서사를 이끌어가는 대화, 공감, 우정, 공동체성에서 느낀 희열도 아주 컸다는 것을 힘주어 고백해본다.^_^
자, 이런 식으로 작가의 안내를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해리포터와 트와일라잇, 귀멸의 칼날과 진격의 거인, 그리고 삐삐롱스타킹과 순례주택 등 거쳐온 모든 이야기를 다시 만나고 싶어진다. 책을 읽는 내내 넷플릭스를 켤까 말까 당장 볼까 말까, 새로운 눈으로 세상 속 이야기와 우리의 삶을 되짚어보고 싶은 욕구가 치솟았다.
제목을 보고 언뜻, 남성 영웅을 폄하하거나 부정하는 것 아닌가, 여성성과 남성성이라는 이분법으로 갈등을 야기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나처럼 그런 염려를 하는 이에게 더욱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싶다. 英雄(뛰어난 수컷)의 위대하고도 고독한 행적을 좇음으로써 영웅 자신과 영웅이 되지 못한 주변인을 동시에 소외시켜오던 기존 남성 영웅 이야기에 따뜻한 손을 내밀어 대동단결과 홍익인간을 권하는 새로운 영웅 이야기를 만나게 될 거라고 말씀드린다.
그밖에 이런 분들에게도 선물하고 싶다.
-대중문화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싶은 사람
-더 이상 외롭고 싶지 않은 남성
-자신이 괜찮은 사람임을 확인하고 싶은 여성
-멋진 연애를 하고 싶은 남녀
-‘백마 탄 왕자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싶지 않은 남성(p177)
-‘간병인 신드롬’에 시달리고 싶지 않은 여성(p177)
-어떤 사람 곁에서 살아야 하는지 알고 싶은 사람
-자녀에게 읽힐 책을 지혜롭게 선택하고 싶은 사람
-자녀를 미래지향적인 사람으로 키우고 싶은 사람(요건은->p152)
-자녀가 진실한 사랑을 하기를 원하는 부모
-오지라퍼(내가 어떤 종류의 오지라퍼인지 알 수 있다-구원자인지 참견자인지)
쓰고 보니 거의 모두!! 😆😆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기대와 희망으로 마음이 부푼다.
우리는 우주를 혼자 여행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