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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편안한 죽음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111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강초롱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4월
평점 :
아주 편안한 죽음 , 시몬 드 보부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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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152p
사람이 죽는 것은 태어났기 때문도, 살 만큼 살았기 때문도, 또 늙었기 때문도 아니다. 사람은 무언가로 인해 죽는다.
📖153p
지금 이 순간 인간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 이는 그 자체로 세상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하지만 각자에게 자신의 죽음은 하나의 사고다. 심지어 자신이 죽으리라는 걸 알고 이를 사실로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인간에게 죽음은 하나의 부당한 폭력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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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대 중반 무렵에 언젠가 다가올 ‘죽음’을 생각하며, 이 세상에서 나의 존재가 소멸 되어버리는 그 때와 내 존재의 기원인 엄마의 죽음을 목도할 때를 상상하고 곱씹으며 불안과 우울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고통스러운 것에 집착하듯 나를 부딪쳐 보면 어느새는 무뎌지고 그 과정에서 체념하게 되겠지, 그러나 결코 ‘죽음’이란 아무리 잘게 곱씹어 삼키려 해도 소화되지 않는 어떤 덩어리로 여겨지는 무시무시한 실체라는 사실만을 고통스럽게 각인해야만 했다. 죽음이라는 그물에 얽힌 물고기처럼 그 속에서 발버둥을 쳐보다가, 언젠가는 다시 돌아와야 할 그물을 나는 고통스러운 안간힘으로 빠져나오는 것으로 의식에서 죽음을 지웠다. 그래야 ‘편히’ 계속 살 것 같았으므로.
그리고 지금 다시, 보부아르가 응시하는 엄마의 죽음을 통해 존재의 실체로서의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일로 남겨지는 일에 대하여, 살고 싶은 열망과 희망을 겹겹이 두른 채 육체적인 고통을 넘어서서 죽음을 통과하는 인간의 결말에 대하여, 그 죽음이 나의 엄마일 때 존재의 실체로서 느끼는 고통과 슬픔에 대하여 거짓없이 목도하며 가차없는 마음으로 죽는 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은 무언가로 인해 죽는다는, 반드시 인간의 숙명인 그 죽음이 인간 누구에게라도 ‘하나의 부당한 폭력’임을 규정하는 보부아르를 통해, 죽음이 있으니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미래 희망적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오히려 죽음, 오로지 그것만을 생각하고야 말았다.
보부아르는 소원했던 엄마의 죽음에 다다른 고통을 지켜보며, 가부장제 속 타자라는 정체성을 끼고 살아올 수 밖에 없었던 엄마의 지난했던 삶을 반추하고 엄마로 대변되는 가부장제 아래 모든 여성의 삶을 통과하며 스스로도 그 여성의 정체성을 두르고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보부아르는 엄마의 죽음과 함께 엄마의 삶을 돌이켜 보는 것으로 한 여성으로서의 엄마의 삶을 그대로 응시하며 ‘공감’과 ‘연대’를 통해 엄마를 이해하고 화해하는 과정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보부아르의 글쓰기를 관통하는 핵심 원리임을 알게 된다. 존재론적 숙명으로 규정되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와는 달리, 보부아르의 실존은 갈등을 끼고 살 수밖에 없는 실존 조건 아래 인간 존재들이 서로의 자유를 존중하고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부아르의 ‘실존’은 윤리적 실존을 영위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한 탐구다. (이른바, ‘실존주의적 윤리’)
보부아르는 생의 가장 극적이라 할 수 있는 죽음의 문을 열어,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죽음을 직면하게 한다. 죽음을 응시하고, 또 직면하라는 듯이. 그러니 그 죽음을 응시하는 것으로 나는 한 번 죽었다. 동시에 죽음을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보부아르의 실존적 의미를 각인해야 하는 것은, 영원한 죽음 이전에 우리는 아직 살고 있기에, 함께 공존하기 위한 공감과 연대를 위해 우리는 어떤 윤리적 실존의 노력을 더듬어가야 할 것인가의 방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보부아르의 문장에 죽음에 대한 그 모든 사색이 스며 있다. 죽음에 당도하는 그 순간에, 하염없이 스러져가는 엄마의 고통스러운 육체를 통해, 엄마의 성기를 목격함으로써, 엄마의 입 모양을 본 충격을 통해, 엄마에 대한 사랑을 절감하고, 엄마와 동일시하며, 고통스러운 연민으로 고뇌를 가누지 못한다.
엄마의 죽음에 서린 고통을 함께 하는 것으로, 온전히 고독하지만은 않은 그 죽음은 ‘편안한 죽음’이 된다.
결국 인간은 죽음으로 이어진다.
그것만이 보부아르의 실존주의 ‘애매성’을 벗어나는, 인간 실존의 결정적이고도 분명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