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의 해변
크로켓 존슨 글.그림, 김미나 옮김 / 자음과모음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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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켓 존슨의 동화 [마법의 해변]

어릴적 꿈이 어른이 되어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고 여기는건 아직도 우리안에 순수함이 남아있기 때문이리라. 

뭐 그리 대단한 어른이 될꺼라고 그리도 자신하며 소녀는 미래를 위한 꿈을 꾸었던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꿈도 희망도 상상도 자꾸만 내 주변에서 사라져가는 걸 느끼게 되니 점점 초라해지는듯하다.. 

마법의 해변에서는 그런 모든 상상의 것들이 앤과 벤이라는 주인공 꼬마들에 의해 글자만 바닥에 써도 현실이 되어 나타난다. 단어 하나에 맛있는 쨈과 빵이 생기고 우유가 나타나고 원하는 건 모두가 상상을 함과 동시에 모래바닥에 쓰기만 해도 이루어진다. 
아이의 상상력은 거기서 끝이 아니다. 이런 마법의 나라에는 필시 왕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그래서 또 끼적인다. 왕이라고~~ 파도가 밀려나더니 모래언덕 위에서 왕이 나타난다. 그런데 왕인 그는 아이들에겐 도통 관심을 쏟지도 않고 낚시만 하고 있다. 그렇다고 물고기를 낚아 올리지도 못하는 듯하다. 눈치를 보아하니 그냥 세월을 낚는 사람같다. 꼬마가 다시 바닥에 물고기라 적는다. 물고기가 잡혀올라오자 그제서야 아이들을 뒤돌아보며 자신이 왕이 되려면 푸른숲과 도시 그리고 성이 있어야 한다며 또 투덜댄다. 심지어 성으로 갈 말도 필요하단다. 물욕이 가득한 왕이다. 조심스레 하나씩 글씨를 써나가는 아이들은 자신들이 써내려간 글자들이 점차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듯 하다. 그런데 어른인 왕은 어떤가? 투덜대고 믿지도 않고 뭔가를 자꾸 요구하기만 한다. 결국 믿고 상상하고 만들어내는 것은 오로지 아이들의 몫이다. 

마법의 해변은 아이들과 어른들의 생각 차이를 몇줄 되지 않는 글에서 완벽하게 보여준다. 아이들은 상상이라는 것이 언제든 이루어질 수 있다는 믿음이 있는데 반해 어른은 모든 것에 부정적이라 끊임없이 의심한다. 상상이란게 뭐란 말인가? 그것이 뭐든간에 마음 속에서라면 모두 이루어질 수 있는 꿈의 세계가 아니던가? 글을 읽다보니 상상조차도 꿈 조차도 즐겁게 꾸지 못하는 어른인 왕이나 나나 참 못났다는 생각이 든다. 

왕이 떠나간 다음 아이들이 그려낸 상상의 조각들이 점점 바닷속으로 가라앉는데도 아이들은 여전히 희망적이다. 자신들이 이 글의 주인공이며 이 책 속의 주인공이니 자신들 마음먹는대로 세상은 달라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면서도 마지막 장에 와서는 왠지 모르게 어른의 세계로 발을 내밀고 있는 듯한 벤과 앤의 모습이 무척 안쓰럽게 여겨진다. 

이 책의 특징이라면 단정하듯 맺어놓지 않고 열린 결론으로 마무리 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마음에 든다. 닫혀버린 결론으로 상상을 끝맺는 글들은 어느새 기억 속에서 사라지기 마련이거나 일반적인 결론밖에 낼 수 없지만 이 동화는 작가가 결론을 내주지 않고 또 다른 상상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살면서 내내 곱씹으며 생각하게 될 듯한 동화다. 어른이 되어버린 것도 억울한데 상상의 날개조차 제대로 펼치기도 전에 커버린 지금 이순간이 서글퍼진다. 요즘 동화는 참 좋구나 싶다.

작가가 그렸다는 스케치도 참 책이랑 어울린다. 원래는 다른 사람이 그리려던 것을 작가가 미리 이렇게 그렸으면 좋겠다고 그렸던 밑그림이라는데, 그래서 연필로 그려놓은 그림 속에서 지우개로 덜 지워진 듯한 그림조차 뭔가 아련해지는게 좋다. 꼭 제대로 된 그림만 삽화로 쓰는 것 보단 이렇게 습작처럼 그려진 그림이 때로는 마음을 울릴때가 있는데 동화의 원래 의미처럼 그림과 글이 참 잘 어울리는 책을 오랜만에 본듯하다.

어쨌든 아이들을 위한 동화라기보다 어른들이 한번쯤 읽어보면 좋을 듯한 동화 [마법의 해변]이다.
그대! 접었던 상상의 나래를 펴보시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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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야
마광수 지음 / 어문학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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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된 마광수작가의 소설 '나는 너야'!!!

극단적인 페티쉬나 성교의 형태를 아무 거리낌없이 표현하는 작가로는 마광수만한 사람이 또 있을까 싶다. 1990년대 초 마광수만큼 이슈가 된 인물도 드물다. 그는 자신의 글 <즐거운 사라>때문에 외설 시비가 끊이지 않았던 작가다. 아무리 우리가 지난 세대보다 훨씬 더 개방적인 세상에 산다고 해도 성이라는 것에 대한 일반인들의 생각은 실로 무지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어쩌면 가장 아름다운 것이며 가장 섬세한 것일지도 모르는 우리의 성의식을 작가는 자신의 성적 환상과 취향 그리고 이 세계를 살아가는 모든 상상적 호기심들을 소재로 나름의 주인공들을 통해 풀어내고 있다. 결혼 전이나 지금이나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불편하고 부끄럽다 느끼는 걸 보면 나 역시 얼마나 한국의 성의식이라는 것에 관해서 과거에 머물러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에로티시즘과 포르노의 차이는 뭘까?

그것은 예술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는 것과 동시에 오로지 성관계만을 집중적으로 다루느냐의 차이다. 작가의 에로티시즘은 거의 포르노 수준에 가까운 어찌보면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취향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점은 작가가 그려내고 있는 주인공들이 그들 나름의 심리 상태가 더해져 그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점점 더 세세하고 외설스럽게 느껴짐과 동시에 각자의 심리상태를 글로 풀어내는 방식은 작가만의 독특한 스타일인 듯한데 자신의 어릴적 트라우마를 이런 식의 글로 치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건 뭘까? 그의 글을 읽다보니 사진가 헬무트 뉴튼과 노부요시 아라키가 자꾸만 떠올랐다.

 

글의 대부분에는 청년시절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지금 작가는 그 시절로 회귀하고 싶은 그의 욕망을 그려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한 그는 자신이 다녔던 학교에 대해 무한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는 듯 한데 글에 등장하는 몇몇의 주인공들 역시 하나같이 작가 자신을 대신한 사람들인 거 같고 학창 시절과 젊은 날의 자신이 그 학교에 다녔다는 것에 대해 굉장한 자부심을 가진듯 연거푸 반복해서 써낸다.

 

내가 읽는 방식이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글쓰기의 형식도 특이하다. 아직 덜 성숙한 사람이 쓴 것처럼 뭔가 엉성하고 서투른듯한 부분들이 작가의 세계관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인건지 (이전 소설을 읽어보지 못해서 잘 모르지만) 일부러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작가의 원래 성향이며 계속 이렇게 써왔는지는 모르지만 마치 성년이 아닌 사람이 쓴 거처럼 특이하다.

 

페티쉬나 포르노의 형태를 보면 지극히 남성적인 시각에서 쓰는 경향이 많다. 또한 사디즘적인 남성 자신의 성적 경향을 대신해서 글로 표현하는 작가들이 많다. 작가의 글 곳곳에도 언어 성폭력에 가까운 문장들이 등장한다. (내 입장에서 볼 때) 글이 아무리 자유롭게 쓰는 작가 고유의 표현양식이라고는 하나 지극히 주관적인 작가의 내면세계와 그의 취향만을 다루는 것은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의 내면세계만을 표현하는 것 보다 여성들이 원하는 에로티시즘에도 관심을 가져볼만할 거 같다)

 

마지막으로 언급하자면 작가는 사랑의 개념을 육체적인 것에 많이 치중을 두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 다른 스타일의 사랑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는 정신적인 사랑보다 오로지 육체적 관계에만 집착한다. 또한 대부분의 글들이 주로 짝사랑에 대한 글이다. 아니 외사랑이다. 친구의 여자를 사랑하거나~~ 꿈 속에서나 만날만한 아니면 포르노에서나 등장할 듯한 남성들의 희망사항일 뿐인 여자들이 대부분이다. 주인공들은 그들을 상대로 꿈을 꾸고 있다. 마치 자신이 그녀들의 주인인양 말이다. 작가의 글을 읽다보면 여성의 어떤 자세나 제스추어를 보더라도 꼭 성적인 환상으로 연결하는 버릇이 있는 듯하다. 내가 볼 땐 그냥 편안하게 주인공과 대화를 하는 것 뿐인데 글의 여주인공들은 마치 발정난 암캐마냥 언제나 색기를 흘리는 것처럼 그려내고 있다.

 

과감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했던 소설의 전체적인 내용을 보면서 꼭꼭 눌린 무의식과 성적 본능을 한껏 드러내고 있는 것은 작가의 세계관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지만 그렇다면 좀더 다양한 세계관을 가진 에로티시즘 문화와 글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 어쨌든. 성에 대한 언어표현을 과감히 표현하는 작가로 치자면 마광수만한 사람이 없음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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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다섯 가지 대답 - 더 나은 삶을 위한
뤽 페리 & 클로드 카플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 더퀘스트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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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better Life!

우리는 모두 더 좋은 삶, 아니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희망한다. 그러나 좋은 것과 나은 것은 어감 상 다른 곳을 지향한다. 좋은 삶은 비교를 통해 과거와의 단절을 염두에 둔다면, 나은 삶은 노력과 발전을 통해 과거를 이어 미래까지 간다.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바로 나은 삶에 대한 고찰이다. 과거 없이 현재는 없으며 현재 없이 미래도 없다.

사유를 통해 자기시대를 이해하는 것이 철학이다’ - 헤겔

  철학은 의식하지 않는 부지불식간에 현재 닥친 개개인의 상황에 따라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발전시켜 나가면서 대응하는 것까지도 포함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그러한 상식적인 수준의 사유만을 언급하지 않았다. 좀 더 나아가 우리보다 앞서 살았던 선인, 현인들의 어록과 철학을 두루 살펴보면서 일반적인 상식에 머무를 수 있는 독자들에게 친절하게도 어려울 수 있는 철학적 해석을 쉽게 풀어주려고 노력한 흔적을 곳곳에 보여주고 있는데 제목처럼 다섯가지의 단계별로 알려주는 철학적 사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참에 이 책을 통해 그동안 몰랐던 그리고 알았지만 막연했던 생각들이 정리될 수 있어 좋다.

종교적 가치와 철학적 가치가 추구하는 세계는 다르다.

종교적 가치는 신의 영역에 대한 이성의 조아림, 계시와 무한한 초월적 힘에 대한 경배와 내세에 구원되고자 하는 삶의 의지이다.

반면 철학은 종교와는 다른 이유로 반드시 인간에게 필요한 존재이다. 철학적 가치는 개인의 자유로운 이성과 삶에 대한 가치를 실현하고자 인간 욕망의 구현이다. 철학적 가치는 인식, 진리, 정치, 미의 구현 등 다양한 분야 등으로 나뉜다. 철학은 참된 삶이자 더 나은 잘 살고자 하는 삶에 대한 희망이다. 여기에는 반드시 인간의 죽음이라는 문제가 따라붙는다. 신이 아닌 인간이기에 유한한 삶에 대한 가치를 언제나 유념하고 살아야 한다. 그렇다고 철학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철학은 유한한 나를 벗어나 세상의 다른 인간관계 속에서 지속적으로 계승되어 발전해나간다.

 과거의 철학자들이 오늘의 우리에게 아직까지도 어떤 울림을 줄 수 있는 것은 여러 가지 예술의 형태로 존재하는 미학처럼 다양한 세계관을 통해 사유의 의미를 알려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유일신과 같은 전지전능한 신의 존재라면 모든 진리의 근거는 하나로 통일되어 전달될 수 있으나 인간은 신과 달리 모든 것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는 존재다. 따라서 한 인간이 다른 인간과 유사한 의견을 내놓거나 새로운 의견을 주장하며 그에 관해 심층적 고찰을 할 수 있는 이유는 하등의 문제가 될게 없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똑같은 스펙트럼을 가진 존재가 없으니 말이다. 심지어 일란성 쌍둥이조차도. 그러므로 새로운 철학자의 출현과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 철학사조들은 현대를 사는 우리가 수용하는데 있어 다양한 해석을 내놓을 수 있다.

그 첫 단계로 카오스(현대에 들어와 다시 주목받는 카오스)즉 혼돈의 시대를 거쳐 탄생한 신들의 세계에 대한 묘사가 등장한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 하늘을 상징하는 우라노스, 그들 사이에 태어나는 티탄, 키클롭스(벼락, 번개, 천둥), 우라노스와 가이아가 떨어지며 존재하게 된 시간과 공간의 탄생, 크로노스와 레아, 그들의 아들 제우스, 신들의 전쟁, 제우스가 이기면서 각자 자기에서 원칙대로 조화롭게 공존하게 된 신들. 다시 코스모스의 세계.

코스모스의 조화를 시작으로 인류의 철학은 자연철학의 시대를 거쳐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신 스토아학파에 이르기까지 카오스 즉 혼돈에서 벗어나 우주적 질서의 존재를 통해 완벽하게 조화로운 질서를 수립, 즉 코스모스를 지향했다.

이들 철학자의 주장대로라면 인간은 그러한 코스모스 안에 부분적으로 자리 잡은 일부분일 뿐이다. 사람의 몸으로 치자면 신체를 유지하기 위한 개별 장기에 해당하며 제 각각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정확히 하는 것이야말로 조화로운 삶을 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아폴론신전에 쓰여 있다는 '너 자신을 알라', '매사에 도를 넘지 마라'와 같은 말이 의미가 있는 것도 이 때문이라 볼 수 있다.

뒤를 이어 계승된 그리스의 철학은 400년간 지속된 기독교시대를 맞이하면서 그 의미가 종교적으로 변신을 하며 신을 위해 존재하는 시녀로 전락한다. 신비스러움을 유지하기 위해선 본질적인 삶의 의미나 지혜, 진리와 같은 것들은 신학의 영역에서 다뤄야 할 문제로 인간의 이성으로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여겼다. 신학은 인간이 인간을 구원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형상을 한 그리스도를 통해 영생의 길을 구원받길 희망했다.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의 차이는 더욱 명확하다. 헤겔에 따르면 유대교의 입장은 칸트의 정언명령처럼 율법대로 살아야하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 자연과 율법을 대립시키고 있다. 그들에게는 다른 무엇보다 교리대로 살아가야하는 규율이 더 큰 근간이 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별개로 보았다. 반면 그리스도교의 예수는 사랑에 대한 해석을 광범위하게 내놓음으로써 율법은 사랑을 통해 자연스럽게 마음에서 우러나와 지켜져야 하는 것으로 본다.

또 가톨릭이 기존의 철학 특히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재미있게 읽혀진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리스 철학의 위계질서가 그리스도교에 와서 더욱 확고해지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 바로 플라톤의 말처럼 모든 존재는 제자리를 지켜 각자 자기 할 일을 해야 한다는 것. 기독교문화의 상부와 하부구조 형태도 이런 문화를 그대로 수용하면서 신의 말씀은 상부구조, 인간은 하부구조의 형태를 띠는 위계질서를 그대로 이어갔다.

고대 그리스가 코스모스의 조화를 우선순위에 두었고, 그리스도 교인들이 신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것을 우위에 두었다면 인문주의자들은 어디에 두었을까? 그들은 인간의 자유에 모든 초점을 맞추었다. 인간 본성의 자유는 어느 누구에게 종속되지 않고 인간성, 존엄성, 위대성을 가진 존재로 본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은 참 아이러니하다. 인간의 본성상 그 억눌림의 저변에는 반항과 저항이라는 본능이 꿈틀거리게 마련이니 말이다. 이성을 억누를수록 자유를 꿈꾸었던 인간은 그리스철학과 신학이 지향하는 진리에서 벗어나 참된 인간의 이성적 세계를 꿈꾸기 시작한다. 인간이기에 자유를 꿈꿀 수 있으며 그런 존재이기에 자연을 극복할 수도 있다. 인문주의의 근간을 이룬 초기학자 피코 델라 미란돌라(다양한 학문에 능했다고 한다)에 의하면 인간이 위대한 이유는 신과 동물의 중간자 역할이 아니라 자연과 세계 밖에 있기 때문이고 자유를 누릴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플라톤 시대의 철학자들이 이야기하듯이 자연의 생명은 누구나 어떤 본질(원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에 맞는 위치와 존재로 나타나며 자기 본분을 지켜 우주의 질서 속에 조화롭게 태어나는데 인간은 그 어떤 곳에도 속하지 않고 자신의 선택에 의해 자신의 위치를 차지할 자유를 얻었다고 한다. 그렇게 때문에 히브리스(교만)으로 치닫기 쉬우며 제자리를 차지한 생태계를 파괴할 힘까지 지닌 존재로 보았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없고 ''라고 말하는 것이 이와 같다고 한다. 없기 때문에 충족하기 위해 채워야 하는 존재 그것이 인간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한 코기토 에르고 숨을 말한 데카르트는 외부 세계의 영향은 지양하면서 얼마나 인간이 이성적 판단을 통해 참된 삶, 좋은 삶을 꿈꿀 수 있는 자아적 존재인지를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사유라는 관점에서 설명한다. 그가 말하는 사유는 온전히 사유할 수 있는 주체적 자아가 존재한다는 절대적 확실성에 입각해 존립할 수 있다. 자아, 즉 주체성을 회복한 개개인은 개인의 자유를 통해 사회 전체의 가치를 위해 범위를 확장하여 자연과 전통이라는 틀을 새롭게 재구성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불합리한 전통에 입각한 실증법 역시 이상적이고 합리적인 법으로 바뀔 수 있으며 전통적 종교의 개념 역시 합리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이성에 입각한 사유의 개념을 넘어서는 분야에 대해서는 신의 영역에 두고 있어 선험적, 자연철학에 입장에 머물렀다. 그의 의견에 따르면 신은 쓸데없는 공간은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파스칼과 같은 이들은 선험의 의지하지 말고 오로지 경험에 의존한 과학적 사고방식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기존의 선입견을 밀어내고 자신의 주체성을 확립하여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하며 주체가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들을 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힘을 합쳐야 한다.

또한 칸트에 의해 좀 더 나아가자면 사유의 확장을 통한 인간의 이성을 명확히 하게 되며 문학과 예술을 통해 더 나은 인류의 존재와 영원불멸을 지향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절대적 전지자인 신의 존재로 인해 인간의 한계를 두었다면 칸트에 와서는 초월이 불가능한 유한성을 출발점으로 신을 생각하게 된 것. 결국 인간이 중심이 되는 사유를 하게 된 최초의 출발점이라 볼 수 있다.

이모든 것을 인간의 이성만으로 설명이 가능할까? 그에 대한 대답으로 저자는 아니라고 말한다. 서양철학 특히 인문주의가 시작되면서 인간의 주체성과 시각문화로 인해 이성에 대한 존중은 시작되었지만 그 때문에 완전을 지향하는데 있어서는 무리가 따랐다. 오히려 이성중심의 편협한 세계상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해체주의가 등장한 것도 이 때문이다. 모든 것을 이성으로 해석하려던 철학에서 벗어나 이성의 반대편에서 묵인되던 무의식과 비인간적 정서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대표적인 철학자로 니체를 예로 드는데 그가 말하는 허무주의를 들어보면 니체는 과거의 철학이 아주 머나먼 초월적 진리나 신의 말씀과 같은 것들에 의존하는데 반기를 들며 기존의 가치들에 대한 맹목적으로 지향하는 것을 금기시 한다. 나는 없고 오로지 주변의 것들에 초점을 맞춘 삶을 원하는가? 결국 내가 원하는 이상향보다는 다른 사람이 만들어둔 또는 신이 원하는 방향성을 추구한다는 것은 결코 내 삶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내 안의 조화로운 삶에 대한 궁극적 목표의식을 가지고 현재의 삶에 충실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길러야 한다. 내 삶의 주인은 나니까~~ 그러나 여기에도 오류는 있다. 합리적, 보편적 인간성을 희망하지만 인문주의는 또 다른 희생과 대의를 추구하려는 이상화를 지향하기 때문에 그런 것들 보다는 그것에서 벗어나 내 안의 이성적 욕망과 무의식, 죽음의 의미, 쾌락, 본능, 충동, 영원회귀하고자 하는 욕망을 조화롭게 만들어 자신의 삶을 더욱 사랑해야한다고 말한다.

네가 다시 살고 싶은 바로 그 모습대로 살아라. 그것이 너의 의무다. 어쨌든 너는 그렇게 살아갈테니까! 그 의무를 다하는 노력은 더없는 기쁨일지니! 무엇보다 휴식을 원하는 자는 쉬어야 할지니! 무엇보다 복종을 원하는 자는 복종하고 따라야 할지니! 어쨌든 자기가 무엇을 더 좋아하는지 제대로 알고 결코 물러서지 말지니! 영원히 그래야 할 것이다

이런 삶의 예술이 바로 해체주의에서 영향 받은 입체파다. 전통주의 예술과 달리 현대미술은 기존의 예술이 주시하지 않던 인간의 내면, , 신체 등에 주목하고 있는데 바로 현대미술의 핵심이 탈코드, 해체, 포스트 아니던가~ 그러나 해체주의에도 모순이 있다. 저자는 니체의 상대주의를 예로 들면서 '사실은 없고 해석만 있다'라는 말을 한다. 모순에 빠질 가능성이 생긴다. 홀로코스트의 예를 드는 수정주의자들처럼 일본의 아베와 그들의 민족주의가 떠오르는 건 비단 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모순을 극복하려면 새로운 철학이 등장하는 건 당연지사. 하이데거의 기술시대를 맞이하면서 좋은 점도 많았지만 인류는 어떤 목적성과 목표의식들은 점점 사라지고 오로지 자본주의 경쟁 세계 속에서 기계들에 종속되거나 밀려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러한 경쟁 사회 안에서 기특하게도 자본주의의 결과물 어쩌면 선의의 결과물일지도 모르는 사랑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사랑의 형이상학적 원리는 전통적 방식의 결혼관과는 사뭇 다른 오로지 개인의 감정을 중요시하는 것이다. 산업혁명과 함께 변화가 시작된 이러한 현대의 가족체계는 집단 중심의 세계에서 해체된 개개인의 자유를 가장 큰 목표로 삼는다. 시작은 그러했지만 사랑의 목표, 사랑이라는 형이상학이 추구하는 방향은 개개인의 연애와 같은 사랑에 만족하지 않는다. 이것은 연애감정의 사랑에서 출발하여 가족 구성원에 대한 사랑으로 발전하였고 더 나아가 이웃, 세계로 뻗어나가는 것이다. 이른바 사적 영역에서 출발한 사랑이 공적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하는 것이 최선이라 믿었던 자연철학, 플라톤에서 출발한 국가의 개념, 신을 으뜸으로 강력한 위계질서 속에 등장한 그리스도교, 나아가 인간의 위치를 격상시킨 르네상스, 계몽을 통해 모든 인간의 평등함을 외친 세계관의 출현, 명확한 이성관의 확립, 편협한 세계관에 반발하여 등장한 무의식, 욕망, 죽음 등 인간 감정으로의 영원 회귀, 자본주의 경쟁세계의 서막을 알린 기술시대의 등장,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뛰어넘는 사랑에 대한 의미까지......(물론 중간 중간 다른 철학자들이 많이 등장한다)

알다시피 사랑의 종류는 무수히 많다. 저자가 말했듯이 아가페, 필리아, 에로스 등 다양한 사랑들이 존재한다. 작가가 도입문에서 언급한 '사랑은 타자의 초월성만을 이유삼아 우리 자신을 초월하게 한다'. 그렇다! 사랑은 나를 넘어선다. 그것은 유한한 세계를 넘고 희생과 이기심을 넘어서 삶의 궁극적 목표를 만들어준다.

현대 철학의 가장 핵심은 결국 사랑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지금 현재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 현재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는 발목을 붙잡고 미래는 꿈만 꾸느라 인생을 허비할 수 있다. 곧 다가올 미래는 분명 지나면 현실이 될 것이고 또 과거가 된다. 오늘 지금 현재는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에 비해 한순간일 뿐이다. 오늘을 바로 살아갈 수 있는 힘, 지혜를 길러라. 카르페디엠

 

어렵지만 읽어볼만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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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의 아침은 자유가 시작된다 - 구글 인사 책임자가 직접 공개하는 인재 등용의 비밀
라즐로 복 지음, 이경식 옮김, 유정식 감수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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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검색 서비스로 구글을 접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우리는 누구나 구글이라는 회사의 근무 환경에 대한 이야기와 구글 직원들의 근무 조건 등을 뉴스 기사를 통해 접하게 되었을 때 꽤나 흥미를 느끼는게 사실이다. 심지어 이책의 서두에 나오는 것처럼 구글은 전 세계 5만명이 넘는 직원이 근무하고 있으며 일하기 좋은 100기업 6년 연속 1, 전 세계 대학생이 뽑은 가장 일하고 싶은 직장에서 1, 하버드 대학보다 25입사하기 어려운 직장 등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렇듯 구글은 늘 업계의 동경과 성공 신화로 다루어지면서 성공한 CEO, 입사 조건, 근무 조건, 그들의 새로운 본사 사옥에 대한 비전까지도 매력적인 콘텐츠로 다양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간혹 내주변의 경우에도 지인의 이직에 관한 소식 중에서 구글로의 이직 사례가 나오면 대부분 부러움과 긍정적 분위기의 이야기 등이 많이 나왔던 기억이 있다.


보통 회사를 떠올리면 월요병과 야근, 가족과의 시간 단절 등이 연관되어 나오고는 하는데 왜 구글은 꿈의 직장이라고까지 불리우며 모두의 선망이 되었을까? 혹시 회사 PR의 전형적인 결과 아닌가, 사실은 그냥 일반 회사와 다르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자꾸 드는건 그만큼 현실에서 접하는 회사와 관련된 경험, 이야기들이 그다지 유쾌하거나 신나게 들려오지는 않기 때문일 것이다. 작년 화제의 드라마 였던 미생만 보더라도  직장인들의 폭발적인 공감과 화제를 불러 일으키는 부분 역시 직장에서의 행복이 아닌 불행적인 소재가 대부분일 만큼 직장은 우리에게 암울한 시대의 상징이 되고 있다.

사실 나는 구글의 아침은 자유가 시작된다는 제목에서부터 조금 반감이 되었다. 구글이라는 직장의 해피엔딩 같은 스토리가 이제 슬슬 물리는 와중에 ? 자기들의 아침은 자유가 시작된다고?’ 뭔가 그들만의 파티를 또 자랑하는 건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600페이지에 가깝게 두껍고 무겁기까지 해서 정말 들고 다니면서 꺼내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먼저 말하자면 이 책은 좋은 자료들이 가득한 책이다. 구글이라는 조직을 다루는 책이다보니 당연 구글의 방대한 자료들을 통해 나름 흥미로운 데이터가 제시되고 있으며 무엇보다 저자인 구글의 인사담당자 라즐로 복의 인적 자원에 대한 고용, 교육, 관리, 전략 등 다양한 부분에 대한 이론과 풍부한 사례들이 이 책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물론 구글은 성공한, 자원이 풍부한 회사이니까 이 책에서 다루는 것과 같이 다양한 프로그램과 지원책들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 것 아니냐 라고 할 수 있지만 국내 굴지의 대기업 또는 그나마 조직의 우연성이 어느정도 있다는 국내 외국계 기업을 보았을 때는 결코 풍부한 자원만이 구글과 같은 사례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이제는 점점 더 개인의 꿈과 가치를 실현하는 직업을 찾기 어렵고 생활을 위한 소득원으로의 직장을 들어가게 되는 현실을 보았을 때 이 책을 읽고 나면 더욱 현실과의 괴리를 느끼게 되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이 읽힘의 존재 이유는 그 괴리를 메우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되고 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게 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고 본다.

참고로 이 책의 방대한 페이지로 인해 한번에 쭈욱 읽지 않고 시간 날 때만 끊어보면 그나마 매력적인 내용이 슬슬 시덥잖은 구글의 자랑질로 오인될 수 있으니 마음의 여유가 되는 주말이나 휴가 기간에 읽어보길 바란다.

구글의아침은자유가시작된다,서평,북뉴스,라즐로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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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하면 보인다
신기율 지음, 전동화 그림 / 쌤앤파커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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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내가 의식적으로 행하는  모든 것보다 생각의 생각을 거듭해 사고의 세계를 확장시켜 가슴 저 깊숙한 곳에서 말하는 직관을 믿으라는 책이다. 시시 때때로 보내오는 그것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라 치부할 수도 있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제3의 감각이라고 말한다.


책의 중간 쯤에 나오는 모피어스에 대한 이야기는 매트릭스를 본 사람들이라면 그가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 알 것이다. 그는 이름 그대로 '꿈의 전령사'다. 모피어스가 하는 일은 우리가 일상에서 놓치고 있는 많은 현상들을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쳐버릴 때 꿈을 통해 메세지를 전달해주는 것이다. 일명 예지몽 같은 것들을 말한다.  그 꿈들은 이미 우리 안에서 경고를 주면서 비로소 상황에 대해 대처할 능력을 기를 수 있게 해준다. 그러니까 직관은 내부의 본능을 깨워야 살아난다. 나라는 사람의 완전한 모습은 이런 직관이 깨어 있을 때야 현재의 나와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앞으로 일어나는 일과 지금 현재 발생하는 것들에 지혜롭게 대응하며 살아갈 수 있다.

우리는 가끔 몸이 하는 말을 무심히 지나칠 때가 많다. 그런 언어들은 내 안의 센서를 작동해서 내 몸 안에 일어나는 모든 것들에 세심하고 사려깊게 반응하며 나라는 인간을 조화롭게 만든다.  끊임없이 나를 일깨우고 나라는 존재를 믿고 공명하면서 내 안의 언어를 귀기울이다보면 나라는 사람의 직관은 그것을 믿고 깨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다면 이런 직관들은 온전히 마음에서만 나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심리학에 깊이 빠져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것. 그렇지만 저자는 몸과 마음이 함께일 때야 그것이 작동한다고 했다. 서양의 의술과는 달리 동양의 의술에서는 12개의 경락혈이 존재하고 그것이 뻗어나간 자리에 우리의 신체 장기와 몸이 이루어지는데 특히 5개의 장으로 중요 기관들을 설명하고 있다. 심장, 폐장, 간장, 비장, 신장이 그것이다. 이것들이 신체와 함께 공명할 때 생각과 몸이 하나가 되어 직관이 발생한다는 것. 이것은 계속 달리면서 생성되는 것이 아니다. 어느정도 시간을 두고 쉬어가면서 끊임없이 내 몸의 곳곳에서 이야기하는 것들에 귀기울여야 한다.


우리 눈을 유혹하는 수많은 것들이 현대에는 존재한다. 그것에 눈이 팔려 정작 내안의 소리는 듣지 못한다. 사람들은 내 안의 소리를 무시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문제들에 빠져 스트레스라는 고통을 소비나 노력만으로 대체하려고 한다. 남이 뛴다고 나도 뛰고 남이 가진 것들을 가지는 것으로 내 마음의 병을 치유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한다. 결국 나 자신을 그들의 잣대에 맞춰 살아가는 것일 뿐 진정한 나 자신은 어디에도 없다.


책 중... 내가 가장 의미있게 봤던 부분은 저자와 아이와의 대화 '저 별에서 보면 우리도 별이다' 이다.

아이와 함께 별보기를 좋아하는 부자가 나눈 대화를 소개한다.


"아빠, 저 별에서 보면 우리도 별이야?"

"맞아, 우리도 하늘에 떠 있는 별이지."

"그럼, 우리가 하늘나라 사람이야?"


정작 생각해보지 않았던 질문을 아이들은 해댄다. 저자 역시 놀랬다고 한다. 재밌는 상상이지만 진짜 맞는 말이 아닌가. 다른 행성에서 보면 우리도 또다른 신이 될 수도 있겠구나 싶다. 그들도 우리에게 자신들의 소망을 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신이란 존재가 따로 없구나 싶다. 저자도 그런 행성들 속에서 우리가 그들에게 신이 될 수도 있다 생각하니 신이라는 존재는 얼마나 많은 이들의 희망을 들어주어야 하는 존재인지 생각해보게 되었다고 했다.

내가? 그들의 신이라고? 상상이지만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저 창의적인 생각이라 치부하기엔 아이의 생각이 해맑다. 그래서 더욱 어른이란게 부끄러워진다.


결국 직관의 의미를 다시금 새겨보자면 내몸과 내안의 소리에 조용히 귀기울이고 진정한 나를 만났을 때 직관은 발생하는 것이다. 보이는 것에 치우치는 삶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것에도 나는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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