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better Life!
우리는 모두 더 좋은 삶, 아니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희망한다. 그러나 좋은 것과 나은 것은 어감 상 다른 곳을 지향한다. 좋은 삶은 비교를 통해 과거와의 단절을 염두에 둔다면, 나은 삶은 노력과 발전을 통해 과거를 이어 미래까지 간다.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바로 나은 삶에 대한 고찰이다. 과거 없이 현재는 없으며 현재 없이 미래도 없다.
‘사유를 통해 자기시대를 이해하는 것이 철학이다’ - 헤겔
철학은 의식하지 않는 부지불식간에 현재 닥친 개개인의 상황에 따라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발전시켜
나가면서 대응하는 것까지도 포함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그러한 상식적인 수준의 사유만을 언급하지 않았다. 좀 더 나아가 우리보다 앞서 살았던 선인, 현인들의 어록과 철학을 두루 살펴보면서 일반적인 상식에 머무를 수 있는 독자들에게 친절하게도
어려울 수 있는 철학적 해석을 쉽게 풀어주려고 노력한 흔적을 곳곳에 보여주고 있는데 제목처럼 다섯가지의 단계별로 알려주는 철학적 사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참에 이 책을 통해 그동안 몰랐던 그리고 알았지만 막연했던 생각들이 정리될 수 있어
좋다.
종교적 가치와 철학적 가치가 추구하는 세계는 다르다.
종교적 가치는 신의 영역에 대한 이성의 조아림, 계시와 무한한 초월적 힘에 대한 경배와 내세에 구원되고자 하는 삶의 의지이다.
반면 철학은 종교와는 다른 이유로 반드시 인간에게 필요한 존재이다. 철학적 가치는 개인의 자유로운 이성과 삶에 대한 가치를 실현하고자 인간 욕망의
구현이다. 철학적 가치는 인식, 진리, 정치, 미의 구현 등 다양한 분야 등으로 나뉜다. 철학은 참된 삶이자 더 나은 잘 살고자 하는 삶에 대한 희망이다. 여기에는 반드시 인간의 죽음이라는 문제가 따라붙는다. 신이 아닌 인간이기에 유한한 삶에 대한 가치를 언제나 유념하고 살아야 한다. 그렇다고 철학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철학은 유한한 나를 벗어나 세상의 다른 인간관계 속에서 지속적으로 계승되어
발전해나간다.
과거의 철학자들이 오늘의 우리에게 아직까지도 어떤 울림을 줄 수 있는 것은 여러 가지 예술의
형태로 존재하는 미학처럼 다양한 세계관을 통해 사유의 의미를 알려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유일신과 같은 전지전능한 신의 존재라면 모든 진리의 근거는 하나로 통일되어 전달될 수 있으나
인간은 신과 달리 모든 것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는 존재다. 따라서 한 인간이 다른 인간과 유사한 의견을 내놓거나 새로운 의견을 주장하며 그에 관해 심층적
고찰을 할 수 있는 이유는 하등의 문제가 될게 없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똑같은 스펙트럼을 가진 존재가 없으니 말이다. 심지어 일란성 쌍둥이조차도. 그러므로 새로운 철학자의 출현과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 철학사조들은 현대를 사는 우리가 수용하는데
있어 다양한 해석을 내놓을 수 있다.
그 첫 단계로 카오스(현대에 들어와 다시 주목받는 카오스)즉 혼돈의 시대를 거쳐 탄생한 신들의 세계에 대한 묘사가 등장한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 하늘을 상징하는 우라노스, 그들 사이에 태어나는 티탄, 키클롭스(벼락, 번개, 천둥), 우라노스와 가이아가 떨어지며 존재하게 된 시간과 공간의 탄생, 크로노스와 레아, 그들의 아들 제우스, 신들의 전쟁, 제우스가 이기면서 각자 자기에서 원칙대로 조화롭게 공존하게 된 신들. 다시 코스모스의 세계.
코스모스의 조화를 시작으로 인류의 철학은 자연철학의 시대를 거쳐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신 스토아학파에 이르기까지 카오스 즉 혼돈에서 벗어나 우주적 질서의 존재를 통해 완벽하게 조화로운
질서를 수립, 즉 코스모스를 지향했다.
이들 철학자의 주장대로라면 인간은 그러한 코스모스 안에 부분적으로 자리 잡은 일부분일
뿐이다. 사람의 몸으로 치자면 신체를 유지하기 위한 개별 장기에 해당하며 제 각각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정확히 하는 것이야말로 조화로운 삶을 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아폴론신전에 쓰여 있다는 '너 자신을 알라', '매사에 도를 넘지 마라'와 같은 말이 의미가 있는 것도 이 때문이라 볼 수 있다.
뒤를 이어 계승된 그리스의 철학은 400년간 지속된 기독교시대를 맞이하면서 그 의미가 종교적으로 변신을 하며 신을 위해 존재하는 시녀로
전락한다. 신비스러움을 유지하기 위해선 본질적인 삶의 의미나 지혜, 진리와 같은 것들은 신학의 영역에서 다뤄야 할 문제로 인간의 이성으로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여겼다. 신학은 인간이 인간을 구원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형상을 한 그리스도를 통해 영생의 길을 구원받길
희망했다.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의 차이는 더욱 명확하다. 헤겔에 따르면 유대교의 입장은 칸트의 정언명령처럼 율법대로 살아야하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 자연과
율법을 대립시키고 있다. 그들에게는 다른 무엇보다 교리대로 살아가야하는 규율이 더 큰 근간이 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별개로
보았다. 반면 그리스도교의 예수는 사랑에 대한 해석을 광범위하게 내놓음으로써 율법은 사랑을 통해 자연스럽게
마음에서 우러나와 지켜져야 하는 것으로 본다.
또 가톨릭이 기존의 철학 특히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재미있게 읽혀진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리스 철학의 위계질서가 그리스도교에 와서 더욱 확고해지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 바로
플라톤의 말처럼 모든 존재는 제자리를 지켜 각자 자기 할 일을 해야 한다는 것. 기독교문화의 상부와 하부구조 형태도 이런 문화를 그대로 수용하면서 신의 말씀은
상부구조, 인간은 하부구조의 형태를 띠는 위계질서를 그대로 이어갔다.
고대 그리스가 코스모스의 조화를 우선순위에 두었고, 그리스도 교인들이 신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것을 우위에 두었다면 인문주의자들은 어디에
두었을까? 그들은 인간의 자유에 모든 초점을 맞추었다. 인간 본성의 자유는 어느 누구에게 종속되지 않고 인간성, 존엄성, 위대성을 가진 존재로 본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은 참
아이러니하다. 인간의 본성상 그 억눌림의 저변에는 반항과 저항이라는 본능이 꿈틀거리게 마련이니
말이다. 이성을 억누를수록 자유를 꿈꾸었던 인간은 그리스철학과 신학이 지향하는 진리에서 벗어나 참된 인간의
이성적 세계를 꿈꾸기 시작한다. 인간이기에 자유를 꿈꿀 수 있으며 그런 존재이기에 자연을 극복할 수도 있다. 인문주의의 근간을 이룬 초기학자 피코 델라 미란돌라(다양한 학문에 능했다고 한다)에 의하면 인간이 위대한 이유는 신과 동물의 중간자 역할이 아니라 자연과 세계 밖에 있기
때문이고 자유를 누릴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플라톤 시대의 철학자들이 이야기하듯이 자연의 생명은 누구나 어떤 본질(원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에 맞는 위치와 존재로 나타나며 자기 본분을 지켜 우주의 질서 속에
조화롭게 태어나는데 인간은 그 어떤 곳에도 속하지 않고 자신의 선택에 의해 자신의 위치를 차지할 자유를 얻었다고 한다. 그렇게 때문에 히브리스(교만)으로 치닫기 쉬우며 제자리를 차지한 생태계를 파괴할 힘까지 지닌 존재로
보았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없고 '무'라고 말하는 것이 이와 같다고 한다. 없기 때문에 충족하기 위해 채워야 하는 존재 그것이 인간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한 ‘코기토 에르고 숨’을 말한 데카르트는 외부 세계의 영향은 지양하면서 얼마나 인간이 이성적 판단을 통해 참된
삶, 좋은 삶을 꿈꿀 수 있는 자아적 존재인지를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사유라는 관점에서
설명한다. 그가 말하는 사유는 온전히 사유할 수 있는 주체적 자아가 존재한다는 절대적 확실성에 입각해
존립할 수 있다. 자아, 즉 주체성을 회복한 개개인은 개인의 자유를 통해 사회 전체의 가치를 위해 범위를 확장하여 자연과
전통이라는 틀을 새롭게 재구성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불합리한 전통에 입각한 실증법 역시 이상적이고 합리적인 법으로 바뀔 수 있으며 전통적
종교의 개념 역시 합리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이성에 입각한 사유의 개념을 넘어서는 분야에 대해서는 신의 영역에 두고 있어
선험적, 자연철학에 입장에 머물렀다. 그의 의견에 따르면 신은 쓸데없는 공간은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파스칼과 같은 이들은 선험의 의지하지 말고 오로지 경험에 의존한 과학적 사고방식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기존의 선입견을 밀어내고 자신의 주체성을 확립하여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하며 주체가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들을 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힘을 합쳐야 한다.
또한 칸트에 의해 좀 더 나아가자면 사유의 확장을 통한 인간의 이성을 명확히 하게 되며 문학과
예술을 통해 더 나은 인류의 존재와 영원불멸을 지향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절대적 전지자인 신의 존재로 인해 인간의 한계를 두었다면 칸트에 와서는 초월이 불가능한
유한성을 출발점으로 신을 생각하게 된 것. 결국 인간이 중심이 되는 사유를 하게 된 최초의 출발점이라 볼 수 있다.
이모든 것을 인간의 이성만으로 설명이 가능할까? 그에 대한 대답으로 저자는 아니라고 말한다. 서양철학 특히 인문주의가 시작되면서 인간의 주체성과 시각문화로 인해 이성에 대한 존중은
시작되었지만 그 때문에 완전을 지향하는데 있어서는 무리가 따랐다. 오히려 이성중심의 편협한 세계상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해체주의가 등장한 것도 이 때문이다. 모든 것을 이성으로 해석하려던 철학에서 벗어나 이성의 반대편에서 묵인되던 무의식과 비인간적
정서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대표적인 철학자로 니체를 예로 드는데 그가 말하는 허무주의를 들어보면 니체는 과거의 철학이 아주
머나먼 초월적 진리나 신의 말씀과 같은 것들에 의존하는데 반기를 들며 기존의 가치들에 대한 맹목적으로 지향하는 것을 금기시
한다. 나는 없고 오로지 주변의 것들에 초점을 맞춘 삶을 원하는가? 결국 내가 원하는 이상향보다는 다른 사람이 만들어둔 또는 신이 원하는 방향성을 추구한다는 것은
결코 내 삶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내 안의 조화로운 삶에 대한 궁극적 목표의식을 가지고 현재의 삶에 충실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길러야 한다. 내 삶의 주인은 나니까~~ 그러나 여기에도 오류는
있다. 합리적, 보편적 인간성을 희망하지만 인문주의는 또 다른 희생과 대의를 추구하려는 이상화를 지향하기 때문에
그런 것들 보다는 그것에서 벗어나 내 안의 이성적 욕망과 무의식, 죽음의 의미, 쾌락, 본능, 충동, 영원회귀하고자 하는 욕망을 조화롭게 만들어 자신의 삶을 더욱 사랑해야한다고
말한다.
‘네가 다시 살고 싶은 바로 그 모습대로 살아라. 그것이 너의 의무다. 어쨌든 너는 그렇게 살아갈테니까! 그 의무를 다하는 노력은 더없는 기쁨일지니! 무엇보다 휴식을 원하는 자는 쉬어야 할지니! 무엇보다 복종을 원하는 자는 복종하고 따라야 할지니! 어쨌든 자기가 무엇을 더 좋아하는지 제대로 알고 결코 물러서지 말지니! 영원히 그래야 할 것이다’
이런 삶의 예술이 바로 해체주의에서 영향 받은 입체파다. 전통주의 예술과 달리 현대미술은 기존의 예술이 주시하지 않던 인간의 내면, 성, 신체 등에 주목하고 있는데 바로 현대미술의 핵심이 탈코드, 해체, 포스트 아니던가~ 그러나 해체주의에도 모순이 있다. 저자는 니체의 상대주의를 예로 들면서 '사실은 없고 해석만 있다'라는 말을 한다. 모순에 빠질 가능성이 생긴다. 홀로코스트의 예를 드는 수정주의자들처럼 일본의 아베와 그들의 민족주의가 떠오르는 건 비단 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모순을 극복하려면 새로운 철학이 등장하는 건 당연지사. 하이데거의 기술시대를 맞이하면서 좋은 점도 많았지만 인류는 어떤 목적성과 목표의식들은 점점
사라지고 오로지 자본주의 경쟁 세계 속에서 기계들에 종속되거나 밀려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러한 경쟁 사회 안에서 기특하게도 자본주의의 결과물 어쩌면 선의의 결과물일지도 모르는
사랑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사랑의 형이상학적 원리는 전통적 방식의 결혼관과는 사뭇 다른 오로지 개인의 감정을 중요시하는
것이다. 산업혁명과 함께 변화가 시작된 이러한 현대의 가족체계는 집단 중심의 세계에서 해체된 개개인의
자유를 가장 큰 목표로 삼는다. 시작은 그러했지만 사랑의 목표, 사랑이라는 형이상학이 추구하는 방향은 개개인의 연애와 같은 사랑에 만족하지
않는다. 이것은 연애감정의 사랑에서 출발하여 가족 구성원에 대한 사랑으로 발전하였고 더 나아가
이웃, 세계로 뻗어나가는 것이다. 이른바 사적 영역에서 출발한 사랑이 공적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하는 것이 최선이라 믿었던 자연철학, 플라톤에서 출발한 국가의 개념, 신을 으뜸으로 강력한 위계질서 속에 등장한 그리스도교, 나아가 인간의 위치를 격상시킨 르네상스, 계몽을 통해 모든 인간의 평등함을 외친 세계관의 출현, 명확한 이성관의 확립, 편협한 세계관에 반발하여 등장한 무의식, 욕망, 죽음 등 인간 감정으로의 영원 회귀, 자본주의 경쟁세계의 서막을 알린 기술시대의 등장,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뛰어넘는 사랑에 대한 의미까지......(물론 중간 중간 다른
철학자들이 많이 등장한다)
알다시피 사랑의 종류는 무수히 많다. 저자가 말했듯이 아가페, 필리아, 에로스 등 다양한 사랑들이 존재한다. 작가가 도입문에서 언급한 '사랑은 타자의 초월성만을 이유삼아 우리 자신을 초월하게 한다'. 그렇다! 사랑은 나를 넘어선다. 그것은 유한한 세계를 넘고 희생과 이기심을 넘어서 삶의 궁극적 목표를
만들어준다.
현대 철학의 가장 핵심은 결국 사랑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지금 현재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 현재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는 발목을 붙잡고 미래는 꿈만 꾸느라 인생을 허비할 수 있다. 곧 다가올 미래는 분명 지나면 현실이 될 것이고 또 과거가 된다. 오늘 지금 현재는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에 비해 ‘한순간’일 뿐이다. 오늘을 바로 살아갈 수 있는 힘, 지혜를 길러라. 카르페디엠
어렵지만 읽어볼만한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