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덤 스미스 - 도덕을 추구했던 경제학자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다카시마 젠야 지음, 김동환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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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애덤 스미스'의 사상을 고찰한 책

다카시마 젠야라는 일본 학자의 해석으로 애덤 스미스의 사상을 알아 본다.


책 내용 자체가 '국부론', '도덕감정론'에 담긴 애덤 스미스의 생각을 해석하는 것이 주이므로 어쩔 수 없이 서평도 애덤 스미스의 사상을 요약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이러한 류의 책을 과거에 몇 권 읽어본 적이 있다. 

유명한 사상가들의 책은 그거 하나만 읽었을 때 그들의 생각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기 쉽지 않다.

그래서 해석서를 같이 읽는 편이다.

과거에 읽은 것들로 '다윈'의 종의 기원을 해석한 책이나 '니체'의 선악의 저편을 해석한 책이 있다.


그러한 해설서들과의 큰 차이는 '도입부'

이 책은 작가가 재해석한 '애덤 스미스'의 사상을 전개하기에 앞서 '애덤 스미스'의 일대기를 서술 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왜 애덤 스미스가 이러한 가치관을 갖게 되었는지?', '그 당시 시대 상이 애덤 스미스의 사상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다 설득력 있게 만들어 준다.


시민사회를 진보, 향상시키는 가장 큰 동력은 정치와 경제이다.


시민사회의 정부는 시민을 위한 정부, 시민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정부가 아니면 안 된다.


국가라는 것은 재산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법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제정된 것이다.

법의 목적은 재산 침해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고 국가의 목적은 재산 소유자를 보호하는 데 있다.


경제의 발전을 토대로 하여 그 위에 학문과 예술이 꽃을 피우게 된다.


사람들은 기쁨이나 성공에 대해서도 동정할 수 있다.

세상과 사회는 인간성에 근거하여 그 사람의 개인적 감정의 발로에 일반성과 사회성을 부여해 준다.

이것이 공감의 논리이다.


경제의 세계란 무법자의 세계도 아니며 내팽개쳐진 자유방임의 세계도 아니다.

경제라고 하는 것은 개별 인간의 자유로운 활동에 맡겨두어도 지장이 없는 세계,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보다 더 효과적인 세계이다.


스미스의 중상주의 비판의 기초에는 실물잔고 사상이 자리잡고 있다.

즉, 한 나라의 부를 증진시키기 위해서는 오로지 그 나라의 생산력을 증가시키는 방법말고는 없다는 것이다.


스미스가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절대주의 권력과 결탁한 거대 무역상인이나 특허회사, 그리고 역사가 오래된 길드 조직 밑에서 안주하고 있던 제조업자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독점적 이익을 지키는 데 급급했으며 국부를 증진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특권층이었다.


 국부를 늘리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을 취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이 스미스의 기본 과제였다.

그것은 생산력을 증진시키는 것으로 귀착된다.


스미스는 생산력을 증진시키는 수단으로서 분업만을 염두에 두었던 것은 아니다.

노동 공정상의 분업만이 아니라 서로 다른 직업 간의 분업, 농업과 공업 및 상업 간의 분업, 게다가 도시와 농촌 간의 분업과 같이 사회 전체로 확산된다.


스미스 역시 자연권 사상의 소유자였는데 그는 특히 재산에 대한 사유권을 ‘가장 신성불가침한 인간의 권리’라고 선언하고 있다.

자유경쟁 사회는 신성한 사유재산과 이를 옹호하는 정치권력을 만남으로써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스미스는 지주, 자본가, 노동자 이 세 가지 계급 간에 괴리와 불균형이 생길 수 있음을 인정했지만 크게는 계급조화 사상을 견지하고 있었다.

스미스에게 있어 분업과 사유재산과 자유경쟁 사회에 대한 확신은 노동자계급에 대한 휴머니티와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스미스가 염두에 두었던 자본은 일정한 화폐가치를 의미하기도 하고 토지나 기계를 가리키기도 하고 저장된 상품이기도 했다.

때로는 인간의 재능까지도 자본의 범주에 포함시켰다.


스미스에게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란 사상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에 반해 마르크스는 역사를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적응->모순->모순의 극복이란 동태적 발전과정으로서 파악했다.


 여기서 스미스의 계몽사관과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은 결정적으로 차이를 드러내게 된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스미스에게서 배웠고, 스미스의 유산을 물려 받았다.

후대의 거의 모든 학파들은 스미스를 공통의 고전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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