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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고풍 요리사의 서정
박상 지음 / 작가정신 / 2021년 6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무한한 우주와 맛의 굴레 속으로 빠져들다'
박상 작가님의 작품을 접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머리속에 새로운 이름과 몇 가지 정보를 입력하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복고풍 요리사의 서정>을 펼쳤다. 그리고 책을 덮으면서 생각했다. 이 작가님의 책을 서점에서 사든, 도서관에서 빌려보든 어찌 됐든 읽어봐야겠다고. 책날개에 적혀진 소개부터 범상치 않았던 박상 작가님은 재치 있는 문체로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내 목덜미를 밑을 향해 잡아끌었다. 책을 읽으며 계속해서 다음 페이지가 궁금해졌고,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찰진 표현들이 엿가락 늘어지듯 쭈욱- 끝없이 늘어졌고 나는 책 옆에 놓인 내 글을 보며 상당히 끄어어했고 뿌으어한 기분을 느꼈다. 이 작가님에 비하면 난 정말 노잼 인간이었구나..
이탈리아 옆에 위치한 폐쇄적인 섬나라 ‘삼탈리아’에서 펼쳐지는 시심 가득한 모험 이야기 <복고풍 요리사의 서정>. 여러 가지 위기를 맞이하며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의지 넘치는 소년은 아니지만, 넘치는 시심과 시집으로 가방을 가득 채운 대한민국 남자 ‘원식’은 이탈리아 브로커를 통해 가장 폐쇄적이라고 소문난 섬나라 삼탈리아로 향한다. 여행자의 신변을 위협한다고 소문난 곳으로 향하는 길이기에 그는 편안한 비행기나 기차 대신 울렁이는 배에 몸을 싣는다. 원식은 브로커에 의해 삼탈리아 주변 해안에 덩그러니 남겨진다. 첫 시작부터 순탄하지 않은 이 여행에서 원식은 어떤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이 이야기는 공중에 떠있는 듯 가벼우면서도, 묵직한 시심과 시공간의 순환을 알맞게 첨가해 비벼낸 하나의 요리 같다. 돈보다 아름다운 시 한 편이 더 귀중한 나라 삼탈리아에서 원식은 전설의 레시피와 삶의 고리를 찾아 헤맨다. 원식은 때로는 거친 파도를 만나 아끼는 아령을 내던져야 할 위기를 맞이하기도 하고, 아름다운 시를 내놓으라며 협박하는 어린 강도들을 만나기도 하고, 경찰에 쫓기기도 한다. 하지만 어쩐지 이 낯선 섬나라에서 쫓기고 있으니 ‘잡히면 죽는다’는 생각보다는 ‘얘네는 진짜 쫓아오고 있긴 한 건가?’싶은 엉뚱한 의문이 들기도 한다.
위험과 새로운 만남이 쉼 없이 교차되는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섬에서 원식은 현실에서 찾지 못한 삶의 의미를 찾아간다. 무한한 우주에서 궁극의 요리란, 아름다운 시란 무엇일까. 어쩌면 한없이 복잡해질 수도 있는 이 고뇌의 시간을 박상 작가님은 자신만의 색으로 아주 익살스럽게 풀어낸다. 팍팍한 현실을 살아가는 와중에, 우스갯소리 같지만 주옥같은 대사들이 곳곳에 끼얹어진 소설 한편을 읽을 수 있다는 건 큰 행운이다. 이 책의 제목을 검색해놓고 이 책을 읽지 않는다면 엄마에게 이를 것이니, 그것이 두렵다면 꼭 이 책을 읽어달라 부탁하는 바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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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식은 시인이 되고 싶었다. 그는 시를 창작하기 위해 대학에 간다. 하지만 열정과 타고난 재능이 항상 비례할 순 없는 법. 원식은 ‘시란 똥 가루 같은 걸 종이에 뿌려놓고 무늬를 감상하는 게 아니라’는 전공 교수님의 신랄한 비판을 듣고 요리사의 길로 들어선다. 김밥을 싫어하던 김밥 집 아들은 맛의 인터스텔라를 만들어내는 어머니의 김밥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린다.
원식은 엄마 친구의 남편의 친구을 사부로 모시며 야생의 주방에서 요리를 시작한다. 그는 말도 안 되는 체계를 가진 주방에서부터 내성을 키우고 열정을 불태운다. 완벽한 자장면을 만들기 위해 몰두한 결과 원식은 연인 앨리스와 헤어지기도 하고, 깊은 맛의 라멘 육수를 만들기 위해 냄비 하나를 다 채울 만큼의 땀을 흘린다. 애초에 시보다는 요리에 재능이 있었던 원식은 차근차근 경험을 늘려 기깔나는 파스타를 만드는 요리사가 된다.
음식 재료 하나하나에 담긴 우주를 이해하며 새로운 다른 세계에 진입한 원식은 다시 만난 앨리스의 제안으로 요리 경연 프로그램에 나가게 된다. 방송을 타며 유명세를 날리려고 할 때-쯤- 원식은 마지막 라운드에서 김밥을 곁들인 파스타를 만들어 혹평을 받았고, 설상가상으로 돈 조반니의 레시피를 사용한 걸 들키게 된다. 그는 ‘노력은 하지 않지만 요행을 바라는 이’를 표현하는 밈의 주인공이 되고 온갖 비난을 받는다. 원식은 서서히 사라져가는 요리에 대한 열정과 사랑하는 이와 결별한 아픔을 털어내기 위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돈 조반니’가 살았다는 섬나라 삼탈리아로 향한다.
한국에선 대부분의 사람들이 종이책을 소비하지 않고 있다. 시집은 그중에서도 어려운 것 또는 얇은데 비싼 책으로 치부된다. 근데 저-기 먼 나라 이탈리아의 옆에 있는 작은 섬나라에서 한국의 시가 웬만한 액수의 지폐보다 큰 가치를 갖고 있다니. 원식은 예상과 다른 삼탈리아의 분위기와 시심이 가득한 사람들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시를 사랑하는 원식에게 이곳은 지상낙원이나 마찬가지다.
시 한 구절을 읊으면 푸지게 고기를 먹을 수 있고, 친절한 택시 기사님에게 감사를 표할 수 있고, 새로운 애인에게 진한 사랑을 고백할 수 있다. 원식은 옛사랑과 닮은 에밀리를 만나 과거를 회상하고, 시와 사랑에 흠뻑 젖는다. 박상 작가님은 이러한 환상의 나라 ‘삼탈리아’를 만들어냄으로써 시와 문학의 가치를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시와 시집은 그저 ‘얇지만 비싼 책’이 아닌,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마음도 사로잡을 수 있고, 하나의 공동체를 만드는 힘이 있는 막강한 존재라는 사실을.
원식은 시심으로 똘똘 뭉친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겨우 돈 조반니의 후손을 만나게 된다. 마지막까지 원식의 일행에게 달려들던 불행의 아이콘들은 시심이 가득한 동료들의 뛰어난 능력치에 힘없이 나가떨어진다. 꽤나 오래전부터 사회를 좀먹고 있었던 포르노와 바이러스, 흡혈 나방 따위의 것들이 바닥에 하나둘 나가떨어지니 더러운 바닥을 싹- 청소했을 때처럼 상쾌한 기분이 든다. 유해한 것들을 물리치고 드디어 마주하게 된 돈 조반니의 묘비엔 모든 재료들의 우주를 관통하는 비밀 레시피가 적혀있었다.
맛이란 아래의 정밀한 주문으로 나온다. “음, 맛있겠네.”
인생이란 누가 쓰는 각본인지 몰라도, 환상성을 조금 가미하지 않으면 견디기 힘든 건지도 모른다.
빈티지 화덕에서 읽다 만 엄마의 김밥 레시피와 딱 일치하는 한마디. 원식은 이 한마디를 위해 이렇게 달려온 것이었다. 서바이벌 요리 프로의 결승전이 있던 날, 김밥을 좋아하지 않는 김밥 집 아들에게 내려진 김밥 만들기 미션은 엄마와 김밥을 이해하지 못했던 아들 원식에게 큰 당황감을 안겼고, 그는 처참한 실패를 맛본다. 현실에 지친 원식은 ‘행운을 빈다는 말에 질렸도다. 나는 직접 주겠으니 삼탈리아로 오라. 나를 발견하라. 내 비밀을 나눠주겠다.’는 돈 조반니의 말을 떠올리고 삼탈리아 행을 결정한다. 현실을 떠나 새로운 맛의 진리를 탐하기 위해 환상의 세계로 간 것이다. 원식의 삼탈리아 여행기는 돈 조반니의 레시피를 알아내는 것을 가장 큰 목표로 삼고 있지만, 목표를 추구하기 이전에 ‘현실’을 벗어나고 싶었던 원식의 바람이 그의 등을 떠밀었을지도 모른다.
<복고풍 요리사의 서정>은 원식이 요리를 배우고, 요리 경연 프로그램을 나가 몰매를 맞게 된 한국에서의 과거 이야기와 시심이 가득한 섬나라 삼탈리아 여행기로 구성된다. 초반엔 현실과 모험, 두 이야기가 다른 물살을 타고 흐르는 듯 느껴지기도 하지만, 두 이야기는 어느새 한 가닥이 되어 원식의 머리 위에 내려앉는다.
한국의 유부김밥 달인의 비밀 레시피와 삼탈리아의 파스타 달인의 비밀 레시피는 “음, 맛있겠네.”로 동일했고, 원식이 사랑했던 전 연인 임 앨리스가 지겹다며 바꾼 이름 ‘에밀리’와 똑같은 이름을 가진 에밀리가 삼탈리아에서 원식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감싸 안는다.
시공간의 무한한 반복 때문에 자꾸만 만나게 되는 남녀가 4차원 속 서로를 인식하는 매개체가 되는 빈티지한 사물의 의미를 깨닫는 이야기 어때? 너무 서정적이고 로맨틱할까?
앤티크 한 집안에서 TV 프로그램 이름 대신 시 한 편을 읊는 사람들이 사는 도시 삼탈리아. 원식은 삼탈리아에서 무한히 반복되는 우주와 궁극의 레시피에 대해 깨닫는다. 궁극의 맛을 가진 음식을 만들기 위해선 수많은 재료들의 우주를 이해하고, 또 허물어야 했고, 그것을 뛰어넘는 순간 진짜 요리사의 반열에 오를 수 있게 된다. 뛰어난 요리사였던 돈 조반니는 자신의 레시피를 시로 만들고, 원식은 돈 조반니의 시를 읽으며 요리를 배우기로 마음먹는다.
시를 이해하는 자가 뛰어난 요리를 만들고, 다시 유치한 시를 쓰고, 유치한 시를 읽던 소년은 시와 요리를 이해하기 위해 요리사가 된다. 원식과 앨리스는 원식의 음식에 대한 열정으로 인해 이별을 맞이하고, 모든 걸 뽑아내 만든 요리를 통해 다시 사랑하게 된다. 무한한 반복을 담은 커다란 우주 속에서 인생은 그에 맞춰 돌고 있다. 충분히 로맨틱하고 서정적인 완벽한 맛의 모험이었다. 앞으로 요리를 하다가 망할 것 같은 삘이 오면 진심을 담아 간절하게 속삭여봐야겠다. “맛있어져라”가 아니라 “음, 맛있겠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