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 (무삭제 완역본) - 현대판 프로메테우스 현대지성 클래식 37
메리 셸리 지음, 오수원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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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심과 혐오가 빚어낸 비극적인 결말

 

과학과 기술 발전의 이면복제인조인간에 대한 이슈를 이야기할 때마다 자주 언급되는 작품 <프랑켄슈타인>. 1818년에 세상의 빛을 본 200년이 넘은 소설이자 역사상 최초의 SF 소설인 이 소설은 인간으로서 손대지 말아야 할 금기의 선을 넘은 과학자 프랑켄슈타인과 창조주인 그 조차도 감당하지 못한 그것통칭 괴물이나 악한으로 불리는 존재의 이야기다. 흔히 괴물의 이름을 '프랑켄슈타인'이라 오해하곤 하는데, 프랑켄슈타인은 박사의 이름이며 그의 피조물인 괴물은 따로 불리는 이름 없이 그것(it), 악한, 괴물 정도로 칭해진다.

 

당시 미지의 세계였던 북극을 탐사하던 월턴은 아주 먼발치에서 괴물을 목격하고그 뒤를 쫓고 있던 지친 프랑켄슈타인을 발견해 배에 태운다프랑켄슈타인은 월턴에게 자신이 어떤 것을 쫓고 있는지그 존재가 어떤 일을 겪었고 어떻게 변화해왔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준다.


이 소설은 월턴의 편지와 괴물의 탄생괴물이 겪어야 했던 세상과 그에 대한 분노프랑켄슈타인의 후회와 고통혐오의 감정을 이야기하고 있는데나는 왠지 프랑켄슈타인보다는 그가 창조해낸 괴물에게그의 이야기에 더 많은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개인적인 콤플렉스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돌이킬 수 없는 가장 끔찍한 악, 죽음이라는 불행에 사랑하는 이와의 인연을 찢긴 가족들의 마음. 영혼에 깃든 공허감. 얼굴에 비친 깊은 절망감은 말해서 무엇하겠습니까."


"삶과 죽음이야말로 내가 최초로 뚫어내야 하는 이상적인 경계였습니다."

 

프랑켄슈타인은 어머니를 잃고 불멸에 집착하며 인간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 새로운 생명을 창조한다그는 재료를 구하고 괴물의 형체를 쌓아올리며 두근거림을 느끼는데 자신이 창조한 괴물이 실제로 생명을 부여받자 참을 수 없는 역겨움에 그 존재를 버리고 도망치고 만다그는 어떻게든 생명을 창조하는데 성공했지만그것을 똑바로 마주하고 책임질 힘은 없었다.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을 보고 받게된 충격으로 환청과 공포에 시달리긴 했으나 이내 다시 자신의 삶으로 돌아간다나름 넉넉한 가정 형편과 프랑켄슈타인을 아끼는 가족들어릴 적부터 연을 이어온 정인까지하지만 태어나자마자 자신의 창조주에게 버림받은 괴물은 평안한 삶을 살지 못한다괴물이 마주해야 하는 세상은 차별로 가득 찬 아주 거칠고 위험한 곳이었다아가씨를 구하려다 되레 생명의 위협을 받았고오랜 시간 지켜본 결과 드디어 믿을 수 있는 친구를 만났다 생각했으나다가가려 용기를 내자마자 그가 꿨던 짧은 꿈은 순식간에 깨지고 만다

 


괴물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창조주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피조물을 책임지지 않고 오히려 크게 혐오한다괴물은 어떠한 선택도 하지 못한 채프랑켄슈타인의 실험 결과로 이 세상에 탄생했으나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한다평범한 사람보다 세뼘이상은 더 큰 키와 덩치거칠고 날카로운 목소리와 흉측한 외모창조주조차 품지 않은 괴물은 아름다운 피조물이 아닌 말 그대로 괴물이었을 뿐이다괴물은 헛간에 머물며 인간들의 말과 그들의 행동지식들을 습득하며 인간의 세계에 조금씩 스며들기 위해 노력하지만 괴물의 흉측한 외모를 본 인간들은 그가 어떤 말을 하고어떤 마음을 가졌는지 따위는 궁금해하지 않고그저 괴물을 배척할 뿐이다.

 

괴물은 프랑켄슈타인과 인간들에게서 받은 상처로 인해 잘못된 선택을 한다자신은 갖지 못한 소중한 것들을 한가득 갖고 있는 프랑켄슈타인에게 상실과 고통을 경험하게 하는 것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에 의해 고통과 후회혐오를 느끼고 끝내 분노를 느끼며 괴물을 뒤쫓는다넘어선 안될 선을 넘은 자에게 남은 것은 감출 수 없는 상실감과 파멸뿐이었다.


이는 <프랑켄슈타인>의 저자 메리 셸리가 앞으로 다가올 과학기술의 발전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대략 짐작해볼 수 있는 부분이다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생명이 없는 신체 조각들을 모아 새로운 생명을 창조해낸 것은 분명 엄청난 기술이다. 하지만 그것을 책임지고 적절히 다룰 마음과 대비책을 전혀 세우지 않은 채 실험을 진행하고 후회와 혐오도망을 반복한 결과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소중한 사람들을 잃게 된다과학기술의 발전 또한 그렇다발전하고 있는 기술과 그 결과물을 적절히 보호할 방법문제가 발생했을 때 대비책 등을 전혀 세우지 않고 정해진 영역을 넘는데만 집중하면 그 끝엔 파멸만이 있을지도 모른다.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을 창조한 그날을 후회한다그리고 이내 괴물을 혐오한다그가 괴물을 혐오한 이유는 인간과 다른 혐오스러운 외모와 나의 가족친지들을 죽였다는 사실때문이다괴물이 프랑켄슈타인의 가족들을 해한 건 분명 용서받을 수 없는 행동이지만그가 괴물을 미워할 정당한 자격이 있는 걸까. 프랑켄슈타인은 뒤늦게 실수를 통감하고 다시는 같은 괴물을 창조해내지 않으리라 결심하지만 때는 늦었다.

 

 

<프랑켄슈타인>은 손대지 말아야 할 금단의 영역에 손을 댄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광기와 후회, 파멸을 통해 과학 기술의 발전과 동시에 우리가 해결하고 대비해야 할 문제들, 그에 대한 책임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처참한 외부자의 눈으로 바라본 인간들을 통해 그들의 선하고 악한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인간이 날 경멸하는데 왜 나는 인간을 존중해야 하는 거요?"

"내 심장은 사랑과 연민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고요."

 

인간과 똑같은 언어를 쓰고, 사랑과 연민을 느낄 수 있지만 모두가 사랑하지 않은, 모두가 혐오했던 존재는 마지막까지 외로움의 구렁텅이로 빠져든다. 저주스러운 창조자는 끝까지 피조물을 책임질 수 없었고 피조물은 한 번 더 절망을 겪는다. 괴물은 정말 죽음을 택한 것일까. 그것을 '악한'으로 만든 건 과연 누구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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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지킵니다, 편의점 - 카운터 너머에서 배운 단짠단짠 인생의 맛
봉달호 지음, 유총총 그림 / 시공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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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지 않은 것을 지키는 날들'


요즘은 편의점과 가까운 ‘편세권’인가를 딱히 따질 것도 없이 웬만한 동네엔 여러 개의 편의점이 입점해있다. 편의점이 이렇게 궁극의 편의를 갖춘 존재가 된 게 언제부터였는진 잘 기억 안 나지만, 아무튼 편의점은 우리에게 없어선 안될 존재가 되었다. 특히 자취 생활을 했던 얼마전까지 나에게 편의점은 빛이자 구원.. 커다란 식량 창고였다.


아주 예~전에 내가 아주아주 어렸을 때. 편의점이 하나 둘 동네에 들어설 때쯤. 나에게 편의점은 조금은 어색한 곳이었다. 마트와는 다른 느낌으로 정돈되어 있는 과자들. 여름이면 손끝이 차가울 정도로 시원했던 에어컨 바람, 새하얀 빛을 내뿜고 있는 전등, 왠지 세련되어 보이며 마트보다 조금씩은 비쌌던 물건들. 특히 그 시절 마트에선 흔히 볼 수 없었던 즉석식품들이 얼마나 신기했는지.. 편의점에 들어설 때면 항상 심장이 떨렸다. (이렇게 말하니 엄청 옛날 사람 같은 건 기분 탓이겠지..


아무튼 편의점은 항상 내 가까운 곳에 있었다. 편의점에 가지런히 진열된 간식들은 항상 내 지갑을 탐했다. 엄마가 초등학생 딸에게 준 천 원짜리 몇 장, 딱맞는 교복 치마 주머니에서 꺼낸 오천 원. 그리고 나중엔 내 이름이 적힌 카드까지.. 나는 편의점과 함께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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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오래된 친구들의 얼굴보다 더 자주 보는듯한 편의점 간판, 그리고 카운터에 서 계신 낯익은 직원분. 우리는 오늘도 어색한 눈인사를 주고받는다.


계산을 할 때면 손님과 편의점 직원은 카운터를 사이에 두고 짧은 대화를 나눈다. 그 대화는 계산이 끝남과 동시에 흩어지고 손님과 직원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카운터의 일부를 재껴 카운터 안으로 넘어가는 건 어렵지 않지만, ‘카운터’란 본래 직원이 아닌 이상 넘어갈 수 없는, 넘어가선 안될 절대적인 선이기에 난 카운터와 그 너머의 직원에게 꽤 큰 거리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다른 세상처럼 느껴지는 카운터 너머에도 사람이, 그의 하루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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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빛나지 않으면서 어디든 있는 ‘편의점 같은 글’을 쓰고 싶다는 것이 내가 가진 소박한 목표다.


<오늘도 지킵니다, 편의점>은 여전히 편의점을 지키고 있는 점주 ‘봉달호’ 작가님의 이야기다. 회사 건물에 위치한 편의점. 수많은 유동인구와 매일같이 보는 익숙한 얼굴들이 뒤섞인 곳에서 어느덧 9년. 단맛, 짠맛, 씁쓸한 맛의 이야기들이 겹겹이 쌓인 편의점의 매대에서 고소한 삶의 향취와 다양한 사람 냄새가 풍겨온다. 저자의 애정과 열정, 수많은 이들의 추억이 담긴 편의점의 달고 짠 이야기. 너무도 인간적이고 언젠가 한 번쯤은 들어봤던 것 같은 누군가의 이야기. 무겁지 않아 주머니 안에 쏙 넣어놓고 수시로 꺼내보고 싶은 이야기. 새로운 문제 앞에서 고민하게 된 ‘자리를 지키는 것’의 의미에 대한 이야기까지. <오늘도 지킵니다, 편의점>은 이런 이야기들이 담긴 책이다.


"버틸 수 있을 것인가. 지킬 수 있을 것인가."

"건물 안 모든 조명이 힘을 잃고 소화전 등불 하나만 어둠 속에서 붉게 빛을 발한다. 밝을 때는 보이지 않던 저것도 언제나 자기 자리를 지키며 제 몫을 다하고 있었구나."


우리는 으레 시간의 무게를, 당연하게 흘러가는 것들의 소중함을 잊곤 한다.이 책을 읽고, 최선을 다해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수많은 존재들을 무심히 지나쳤던 나의 보통의 날들을 떠올려보았다.


“버틸 수 있을 것인가.” 9년 차 편의점 점장인 저자는 최근 들어 이런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팬데믹 시대. 확진자로 인해 장사를 일찍 접어야 했던 날, 어둠 속에서 홀로 열심히 모터 소리를 내는 냉장고를 보며 그는 생각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인가. 예전처럼 돌아갈 순 있는 걸까.


이 고민을 반복하며 그는 ‘지키는 것’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매일 당연하게 열었던 편의점과 당연하게 마주했던 수많은 손님들. 끊기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시간의 흐름. 그는 고민 끝에 이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던 변화의 순간들은 ‘그 자리에서 그만큼의 시간을 버텨내야만 받을 수 있는 시간의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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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우리는 살아간다. 나는 변한 것 하나 없고 이뤄놓은 무엇 하나 없는 것 같은데 남들은 변하고 쌓아가는 풍경 곁에 때로 한숨 쉬고 가끔 서럽기도 하지만 세월에 흔들리면서도 묵묵히 내 자리를 지켰다는 사실, 그것이 바로 내가 맺은 열매임을 깨달으며 오늘도 우리는 각자의 시간을 지킨다.


봉달호 작가는 점장으로서 편의점을 지키고, 나는 나의 시간을 지키며 새로운 하루를 맞이한다. 우리는 사회적인 문제, 개인적인 문제, 또 어떠한 문제들로 인해 언제든 흔들릴 수 있다. 하지만 그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오늘도 언제나처럼 그 자리를 지킬 수 있길, 나와 당신은 무사히 서로의 시간을 지켜낼 수 있기를 바란다.


늦은 밤, 이른 새벽까지도 항상 밝은 불을 켜놓고 손님들을 맞이하는 편의점처럼 당신도 그 자리를 지켜준다면 참 좋겠다. 당신이 생각날 때마다 찾아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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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다고 느꼈던 자리의 소중함, 그 자리를 습관처럼 찾아와주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한 책 <오늘도 지킵니다, 편의점>.

당연한 것은 없다. 자연스레 돌아오는 하루를 지켜내는 건 보기보다 어렵다. 하지만 모두가 각자의 자리와 시간을 지킬 수 있길, 우리를 덮쳐오는 수많은 문제들에 골머리 앓지 않기를, 모든 일이 술술 풀리기를,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도 무탈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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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고풍 요리사의 서정
박상 지음 / 작가정신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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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무한한 우주와 맛의 굴레 속으로 빠져들다'

 

박상 작가님의 작품을 접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머리속에 새로운 이름과 몇 가지 정보를 입력하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복고풍 요리사의 서정>을 펼쳤다. 그리고 책을 덮으면서 생각했다. 이 작가님의 책을 서점에서 사든, 도서관에서 빌려보든 어찌 됐든 읽어봐야겠다고. 책날개에 적혀진 소개부터 범상치 않았던 박상 작가님은 재치 있는 문체로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내 목덜미를 밑을 향해 잡아끌었다. 책을 읽으며 계속해서 다음 페이지가 궁금해졌고,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찰진 표현들이 엿가락 늘어지듯 쭈욱- 끝없이 늘어졌고 나는 책 옆에 놓인 내 글을 보며 상당히 끄어어했고 뿌으어한 기분을 느꼈다. 이 작가님에 비하면 난 정말 노잼 인간이었구나..

 

이탈리아 옆에 위치한 폐쇄적인 섬나라 삼탈리아에서 펼쳐지는 시심 가득한 모험 이야기 <복고풍 요리사의 서정>. 여러 가지 위기를 맞이하며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의지 넘치는 소년은 아니지만, 넘치는 시심과 시집으로 가방을 가득 채운 대한민국 남자 원식은 이탈리아 브로커를 통해 가장 폐쇄적이라고 소문난 섬나라 삼탈리아로 향한다. 여행자의 신변을 위협한다고 소문난 곳으로 향하는 길이기에 그는 편안한 비행기나 기차 대신 울렁이는 배에 몸을 싣는다. 원식은 브로커에 의해 삼탈리아 주변 해안에 덩그러니 남겨진다. 첫 시작부터 순탄하지 않은 이 여행에서 원식은 어떤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이 이야기는 공중에 떠있는 듯 가벼우면서도, 묵직한 시심과 시공간의 순환을 알맞게 첨가해 비벼낸 하나의 요리 같다. 돈보다 아름다운 시 한 편이 더 귀중한 나라 삼탈리아에서 원식은 전설의 레시피와 삶의 고리를 찾아 헤맨다. 원식은 때로는 거친 파도를 만나 아끼는 아령을 내던져야 할 위기를 맞이하기도 하고, 아름다운 시를 내놓으라며 협박하는 어린 강도들을 만나기도 하고, 경찰에 쫓기기도 한다. 하지만 어쩐지 이 낯선 섬나라에서 쫓기고 있으니 잡히면 죽는다는 생각보다는 얘네는 진짜 쫓아오고 있긴 한 건가?’싶은 엉뚱한 의문이 들기도 한다.

 

위험과 새로운 만남이 쉼 없이 교차되는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섬에서 원식은 현실에서 찾지 못한 삶의 의미를 찾아간다. 무한한 우주에서 궁극의 요리란, 아름다운 시란 무엇일까. 어쩌면 한없이 복잡해질 수도 있는 이 고뇌의 시간을 박상 작가님은 자신만의 색으로 아주 익살스럽게 풀어낸다. 팍팍한 현실을 살아가는 와중에, 우스갯소리 같지만 주옥같은 대사들이 곳곳에 끼얹어진 소설 한편을 읽을 수 있다는 건 큰 행운이다. 이 책의 제목을 검색해놓고 이 책을 읽지 않는다면 엄마에게 이를 것이니, 그것이 두렵다면 꼭 이 책을 읽어달라 부탁하는 바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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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식은 시인이 되고 싶었다. 그는 시를 창작하기 위해 대학에 간다. 하지만 열정과 타고난 재능이 항상 비례할 순 없는 법. 원식은 시란 똥 가루 같은 걸 종이에 뿌려놓고 무늬를 감상하는 게 아니라는 전공 교수님의 신랄한 비판을 듣고 요리사의 길로 들어선다. 김밥을 싫어하던 김밥 집 아들은 맛의 인터스텔라를 만들어내는 어머니의 김밥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린다.

 

원식은 엄마 친구의 남편의 친구을 사부로 모시며 야생의 주방에서 요리를 시작한다. 그는 말도 안 되는 체계를 가진 주방에서부터 내성을 키우고 열정을 불태운다. 완벽한 자장면을 만들기 위해 몰두한 결과 원식은 연인 앨리스와 헤어지기도 하고, 깊은 맛의 라멘 육수를 만들기 위해 냄비 하나를 다 채울 만큼의 땀을 흘린다. 애초에 시보다는 요리에 재능이 있었던 원식은 차근차근 경험을 늘려 기깔나는 파스타를 만드는 요리사가 된다.

 

음식 재료 하나하나에 담긴 우주를 이해하며 새로운 다른 세계에 진입한 원식은 다시 만난 앨리스의 제안으로 요리 경연 프로그램에 나가게 된다. 방송을 타며 유명세를 날리려고 할 때-- 원식은 마지막 라운드에서 김밥을 곁들인 파스타를 만들어 혹평을 받았고, 설상가상으로 돈 조반니의 레시피를 사용한 걸 들키게 된다. 그는 노력은 하지 않지만 요행을 바라는 이를 표현하는 밈의 주인공이 되고 온갖 비난을 받는다. 원식은 서서히 사라져가는 요리에 대한 열정과 사랑하는 이와 결별한 아픔을 털어내기 위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돈 조반니가 살았다는 섬나라 삼탈리아로 향한다.

 

한국에선 대부분의 사람들이 종이책을 소비하지 않고 있다. 시집은 그중에서도 어려운 것 또는 얇은데 비싼 책으로 치부된다. 근데 저-기 먼 나라 이탈리아의 옆에 있는 작은 섬나라에서 한국의 시가 웬만한 액수의 지폐보다 큰 가치를 갖고 있다니. 원식은 예상과 다른 삼탈리아의 분위기와 시심이 가득한 사람들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시를 사랑하는 원식에게 이곳은 지상낙원이나 마찬가지다.

 

시 한 구절을 읊으면 푸지게 고기를 먹을 수 있고, 친절한 택시 기사님에게 감사를 표할 수 있고, 새로운 애인에게 진한 사랑을 고백할 수 있다. 원식은 옛사랑과 닮은 에밀리를 만나 과거를 회상하고, 시와 사랑에 흠뻑 젖는다. 박상 작가님은 이러한 환상의 나라 삼탈리아를 만들어냄으로써 시와 문학의 가치를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시와 시집은 그저 얇지만 비싼 책이 아닌,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마음도 사로잡을 수 있고, 하나의 공동체를 만드는 힘이 있는 막강한 존재라는 사실을.

 

원식은 시심으로 똘똘 뭉친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겨우 돈 조반니의 후손을 만나게 된다. 마지막까지 원식의 일행에게 달려들던 불행의 아이콘들은 시심이 가득한 동료들의 뛰어난 능력치에 힘없이 나가떨어진다. 꽤나 오래전부터 사회를 좀먹고 있었던 포르노와 바이러스, 흡혈 나방 따위의 것들이 바닥에 하나둘 나가떨어지니 더러운 바닥을 싹- 청소했을 때처럼 상쾌한 기분이 든다. 유해한 것들을 물리치고 드디어 마주하게 된 돈 조반니의 묘비엔 모든 재료들의 우주를 관통하는 비밀 레시피가 적혀있었다.

 

맛이란 아래의 정밀한 주문으로 나온다. , 맛있겠네.”

 

 

인생이란 누가 쓰는 각본인지 몰라도, 환상성을 조금 가미하지 않으면 견디기 힘든 건지도 모른다.

 

빈티지 화덕에서 읽다 만 엄마의 김밥 레시피와 딱 일치하는 한마디. 원식은 이 한마디를 위해 이렇게 달려온 것이었다. 서바이벌 요리 프로의 결승전이 있던 날, 김밥을 좋아하지 않는 김밥 집 아들에게 내려진 김밥 만들기 미션은 엄마와 김밥을 이해하지 못했던 아들 원식에게 큰 당황감을 안겼고, 그는 처참한 실패를 맛본다. 현실에 지친 원식은 행운을 빈다는 말에 질렸도다. 나는 직접 주겠으니 삼탈리아로 오라. 나를 발견하라. 내 비밀을 나눠주겠다.’는 돈 조반니의 말을 떠올리고 삼탈리아 행을 결정한다. 현실을 떠나 새로운 맛의 진리를 탐하기 위해 환상의 세계로 간 것이다. 원식의 삼탈리아 여행기는 돈 조반니의 레시피를 알아내는 것을 가장 큰 목표로 삼고 있지만, 목표를 추구하기 이전에 현실을 벗어나고 싶었던 원식의 바람이 그의 등을 떠밀었을지도 모른다.

 

<복고풍 요리사의 서정>은 원식이 요리를 배우고, 요리 경연 프로그램을 나가 몰매를 맞게 된 한국에서의 과거 이야기와 시심이 가득한 섬나라 삼탈리아 여행기로 구성된다. 초반엔 현실과 모험, 두 이야기가 다른 물살을 타고 흐르는 듯 느껴지기도 하지만, 두 이야기는 어느새 한 가닥이 되어 원식의 머리 위에 내려앉는다.

 

한국의 유부김밥 달인의 비밀 레시피와 삼탈리아의 파스타 달인의 비밀 레시피는 , 맛있겠네.”로 동일했고, 원식이 사랑했던 전 연인 임 앨리스가 지겹다며 바꾼 이름 에밀리와 똑같은 이름을 가진 에밀리가 삼탈리아에서 원식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감싸 안는다.

 

시공간의 무한한 반복 때문에 자꾸만 만나게 되는 남녀가 4차원 속 서로를 인식하는 매개체가 되는 빈티지한 사물의 의미를 깨닫는 이야기 어때? 너무 서정적이고 로맨틱할까?

 

앤티크 한 집안에서 TV 프로그램 이름 대신 시 한 편을 읊는 사람들이 사는 도시 삼탈리아. 원식은 삼탈리아에서 무한히 반복되는 우주와 궁극의 레시피에 대해 깨닫는다. 궁극의 맛을 가진 음식을 만들기 위해선 수많은 재료들의 우주를 이해하고, 또 허물어야 했고, 그것을 뛰어넘는 순간 진짜 요리사의 반열에 오를 수 있게 된다. 뛰어난 요리사였던 돈 조반니는 자신의 레시피를 시로 만들고, 원식은 돈 조반니의 시를 읽으며 요리를 배우기로 마음먹는다.

 

시를 이해하는 자가 뛰어난 요리를 만들고, 다시 유치한 시를 쓰고, 유치한 시를 읽던 소년은 시와 요리를 이해하기 위해 요리사가 된다. 원식과 앨리스는 원식의 음식에 대한 열정으로 인해 이별을 맞이하고, 모든 걸 뽑아내 만든 요리를 통해 다시 사랑하게 된다. 무한한 반복을 담은 커다란 우주 속에서 인생은 그에 맞춰 돌고 있다. 충분히 로맨틱하고 서정적인 완벽한 맛의 모험이었다. 앞으로 요리를 하다가 망할 것 같은 삘이 오면 진심을 담아 간절하게 속삭여봐야겠다. “맛있어져라가 아니라 , 맛있겠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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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나와 아레스 - 제17회 '마해송 문학상' 수상작 문지아이들 166
신현 지음, 조원희 그림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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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정해진 길로 달려야 하는걸까?


관중들이 바글거리는 경마장에서 결승점 하나만을 바라보고 온 힘을 다해 달리는 말을 본 적이 있는가. 본인의 의지보다는 채찍과 훈련의 결과로 빚어진 게임 한판에서 우린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아테나와 아레스>는 기수인 엄마 아빠 밑에서 자란 쌍둥이 새나와 루나, 그리고 같은 날 태어난 말 아테나, 아레스를 통해 평소에 깊이 들여다보지 못했던 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남들이 칭찬하는 타고난 능력내가 하고 싶은것의 차이, 그리고 정해져 있는 결승점에 대한 의문. 어른이 정해둔 결승점에 들어간 아이는 과연 행복할까?

 

한날한시에 태어난 쌍둥이지만 겉모습도 성향도, 품고 있는 꿈도 다른 쌍둥이 새나와 루나. 같은 날 밤 태어났지만 서로 다른 털색을 가진 말 아테나와 아레스. 어른들은 아이들과 말의 외적인 조건과 그들이 처한 상황을 토대로 달려가야 하는 결승점을 일방적으로 제시한다. 마사에서 태어난 아테나와 아레스는 당연히 (식용으로 라도)상품성이 있는 말, 훌륭한 경주마가 되어야 했고 여자아이인 새나와 루나는 축구 같은 남자아이의 취미를 갖는 게 아닌 긴 머리를 묶고 얌전히 앉아 공부를 해야 하는 존재로 인식된다. 엄마 아빠는 기수가 되고싶다는 새나의 꿈을 말리지 않았지만 엄마가 말에서 떨어져 큰 부상을 당하게 되자 아빠는 새나에게 기수가 되는 것을 그만두라고 말한다.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가며 아이의 꿈을 온전히 받아들여주지 않는 어른과 정해진 길을 달려야 하는 아이. 이건 비단 새나와 루나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어른들은 아이의 의견과는 상관없이 아이가 탄탄대로라고 여겨지는 몇 가지의 길만을 걷길 바란다. 이유는 정말 다양하다. 다른 길로 가는 건 비전이 없어서, 내가 걸어보니 아닌 것 같아서, 아이를 지켜본결과 이 능력을 타고난 것 같아서 등등.. 아이들은 어른들의 의지에 밀려 경주마가 되고 아이의 행복과 의사는 묻지 않은 채 그들의 발걸음에 수많은 기대와 보상을 건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끝없이 기대하고 길들이려 하며 언젠가 가져올 결과물을 기다린다. 이러한 어른의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크게 두가지 모습으로 성장한다. 배우라는 것을 배우고 하라는 일을 선택하는 얌전한 아이와 쉽게 고집을 굽히지 않는 아이. 이 책에서 전자는 루나와 아테나, 후자는 새나와 아레스다. 아테나는 첫 훈련 날부터 자연스레 사람을 태우는데 성공하고 일찍 마사로 돌아간 반면, 아레스는 사람을 태우지 않으려고 기를 쓴다. 첫 훈련이 있기 이전, 엄마와 분리되어 새로운 마사에 들어가는 것조차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던 사고뭉치 말. 그게 바로 아레스다. 새나는 그런 아레스의 마음을 이해하고 달달한 각설탕을 아레스에게 실컷 먹여준다.

 

아테나는 순종에 흔치않은 흰 털을 가진 말이었고 아레스는 흔한 갈색 털을 가진 말이다. 경주마를 사러 시장에 나온 사람들은 당연히도 아테나에게 큰돈을 지출하고 인기가 없는 아레스는 식용으로 팔려나갈 위기에 처한다. 새나의 간청으로 어찌 살아돌아오긴 했지만 아레스는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새나는 아레스가 아테나처럼 멋진 경주마가 되면 아빠와 아저씨들에게 인정을 받을 것이고 아레스도 행복해질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아레스는 정말 행복할까?

 

경주마가 되어서 우승하면, 말이 행복할까?”

 

말들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다. 목장에서 태어나는 것부터 시작해 경주마가 되거나 식용으로 팔려나가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하지만 목장에서 태어난 이상 말들은 당연히 상품가치가 있어야 한다는 의무를 부여받는다. 우리 사회에서 태어난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보며 덕담이랍시고 이런 말을 건넨다.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거라.” 어른들이 말하는 훌륭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정해둔 결승점을 향해 다리 근육이 터져라 뛰어가는 사람? 그렇게 쉬지 않고 달리게 되면남는 건 피로와 권태뿐일 것이며 결승점에 도착한다 해도 성취감과 행복은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 아테나처럼 정해진 경기장을 탈출해 스스로 머리를 박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무엇이든 지나친 게 문제다. 지나치게 기대하고, 지나치게 강요하고, 지나치게 모든 걸 건다. 어른이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강요와 주입식 교육이 아닌 아이를 돕는 것뿐이다.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될 때까지 옆을 지키고 아이 스스로 정한 결승점이 생기면 아이에게 채찍을 휘두르는 게 아닌 옆에 서서 함께 달려주는 것. 그게 진정 아이를 사랑하는 일이란 걸 모르는 어른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고 느끼는 요즘이다.

 

정해진 길을 가지 않아도 괜찮다. 부상으로 인해 더 이상 말을 타지 못하게 된 새나, 루나의 엄마가 아레스와 함께 새로운 길을 찾았듯이, 상품가치가 없는 천덕꾸러기 말이었던 아레스가 엄마의 소중한 다리가 되었고 말을 타지 못하게 된 기수인 엄마는 다른 이들의 마음을 보듬어주는 사람이 되었듯이 말이다.

 

경마 경기를 할 때 사람들은 앞만 보고 달릴 수 있도록 말의 시야를 제한한다. 옆이나 위가 아닌 결승점만 보고 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 아니면 안 돼!”라고 외치며 아이들의 시야를, 밟고 있는 땅의 방향을 무조건적으로 제한하고 있는 어른이 있다면 절대 그러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타고난 성향, 외적인 조건, 능력이 어떤 것이 있든 아이가 갈 길은 아이가 직접 선택하는 것이 옳으니, 채찍을 들거나 아이의 눈 옆에 가림막을 치지 말았으면 한다. 인생이라는 한판 게임에서 결승지점을 향해 달리는 건 자신의 의지로 온전히 행해야 할 일이니까. 그렇게 스스로의 힘으로 해낸 한판 게임이야말로 진정 의미가 있는 일이자 자신의 행복을 찾는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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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만세 소설, 향
오한기 지음 / 작가정신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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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어린이들의 웃음이 100%쯤 보장되는 그 가벼운 외침이 울려 퍼지는 이 소설. <인간만세>는 어쩌면 가볍고 웃기게 비칠 수도 있다. 누군가가 쉼 없이 외쳐대는 똥!이란 단어와 막힘없이 나아가는 전개. 그리고 어딘가 익숙한 배경과 인물들까지. 아주 술술 빠르고 가볍게 읽히는 이야기다. 하지만 웃음을 잠깐 참고 진중히 들여다보면.. 아마 지하 3층쯤 깊이에 위치하고 있는 듯한 꽁꽁 숨겨둔 실재하는 것문학에 대한 고찰을 발견할 수 있다.

 


도서관이 무대이면서 똥과는 달리 깔끔하고, 적당히 유머러스하고 풍자적이며, 무엇보다 인간미가 넘치는 이야기. 그게 사람들이 선호하는 문학이다.”

 

<인간만세>는 저자 오한기 작가님의 답십리 도서관 상주 작가 경험기를 토대로 만들어진 소설이다. 처음 이 한 줄을 읽었을 땐 도서관 작가나 책에 대한 고찰이 들어있는 진지한 소설이려나’.. 예상했었는데, 아주 제대로 틀렸다. 이 책은 책의 주인공이 언급했듯이 적당히 유머러스하고 풍자적이며 인간미가 넘치는 그런 문학이었다.

 

답십리 도서관에서 상주 작가로 일한 건 작년 가을부터 올해 봄까지였다. 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200만 원의 월급을 받고 자서전 특강, 독서 토론회 운영 따위를 하는 일종의 계약직 강사였다.”

나름 만족했다.”

 

이 책은 답십리 도서관에서 벌어지는 실체 없는 사건과 실체 없는 인물, 그리고 실존의 의미를 따지는 인물의 수다로 이루어져 있다. 지원금으로 돌아가는 상주작가 고용 시스템 덕분에 노동강도에 비해 꽤 괜찮은 수입을 벌고 있는 답십리 도서관의 상주작가인 주인공과 문학의 실체를 믿지 않으면서도 매번 도서관 프로그램에 나와 회원들을 쫓아내는 KC 교수. 그리고 소설 속과 현실에 모두 존재하고 있는 동명이인 진진. 마이크를 훔쳐가 똥!을 외치는 민활성. ‘문학계 후배임을 들먹이며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하는, 승진 욕구로 가득한 도서관 관장. 마지막으로 쉽게 실체를 보이지 않는 괴물 EE까지.. 별 특이한 인물들이 와르르 등장한다.


 

대체 문학은 무슨 의미가 있는 거죠? 소설에는 어떤 가치가 있는 거냐고요.”

 

주인공은 상주작가로서의 의미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나름 만족스러운자리에 앉아 예산을 소비하기 위해 발행하는 소식지에 올릴 소설을 휘뚜루마뚜루 써낸다. 나중에 읽어보니 자신도 작위적이라고 느낄 만큼 아주 대충 말이다.

 

그럭저럭 상주작가로 강의를 마치고 도서관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그의 앞에 문학을 부정하는 로봇 같은 KC 교수가 등장한다. 그는 작가인 주인공에게 묻는다. “대체 문학은 무슨 의미가 있는 거죠?” 나는 KC 교수의 이 말이 <인간 만세>라는 책의 중심 주제가 아닐까 생각했다.

 


물론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들이 다 배설물을 배출하는데 왜 똥이 인간만의 트레이드마크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물고기들도, 새들도, 하다못해 곤충들도 똥을 싸지른다.”

인간 이꼬르 똥입니다. 이건 인간만의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은 소설 마감을 위해 여러 소재를 떠올린다. 가장 강력하게 떠오른 소재는 인간과 똥’. 섭취와 배설을 인간의 본능이자 인생의 의미라 정의한 그는 답십리 도서관과 똥의 연결고리를 찾는다. 그리고 그쯤 똥 괴물 EE와 민활성의 목소리가 강렬하게 맴돈다.

 

! 그 뒤로 이 외침이 하루에도 몇 번씩 도서관에 울려 퍼지곤 했다.”

당황해서 우두커니 서 있을 때, 강의실 밖에서 민활성의 목소리가 30만 원짜리 일제 무선마이크를 타고 메아리쳤다. 민활성을 찾아 나섰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민활성의 손에 들려 사라져버린 30만 원짜리 마이크, 어느샌가 사라져버린 상주작가로서의 의미, 나에게만 들리는 똥! 소리, 하지만 보이지 않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 똑같은 마이크를 찾아오라며 들들 볶아대는 도서관 관장. 평화로운 상주 작가의 일상은 어느새 우당탕탕 도서관 모험기로 바뀌게 된다.

 

이태준, 김유정, 이상, 예전이었다면 침을 흘리며 훑어봤을 초판본이나 절판본들도 보였다. 상주 작가 임기 첫날 동대문구 국회의원 기증 도서를 잘 보이는 데 배치하기 위해 오래된 책들을 옮기느라 분주하던 사서들이 떠올랐다. 그 책들이 어디 갔나 싶었는데 전부 이 창고에 있었다.”

 

누가 똥! 을 외치는가, 누가 그의 귀에 똥! 이 맴돌게 하는가. EE는 어떻게 상상의 범위를 넘어 현실로 왔는가. 진짜를 가짜로 바꿔놓아도 아무도 알지 못하는, 그리고 문학의 진짜 가치를 따지기보다는 깔끔한 국회의원 기증 도서를 뽐내는데 급급한 이 공간에서 사건의 실체’, ‘문학의 실체를 찾아 헤맨다는 것이 약간은 이상하게 느껴진다. 이 실체들에 정말 답이 있긴 한 걸까? 특히 30만원짜리 일제 무선 마이크. 그게 정말 있긴 했던 걸까.. 그리고 창고에 박혀버린 희귀한 초판본들은 본래의 가치를 되찾을 수 있는 걸까.

 


주인공은 답십리 도서관을 감싸고 있는 미스터리한 현상을 조사하기 위해 진진을 상주 작가 자리에 앉힌다. 주인공이 이전에 썼던 소설에 등장했던 주인공과 이름이 같은 진진은 작가님의 책을 읽었다며 상담을 신청하고 끈질기게 주인공을 쫓는 인물이다.

 

상주작가의 자리를 빼앗겼으니 작가님을 문학적으로 살해하겠다.”라는 메일까지 남기는 그를 보며 나는 그가 아주 열성적인 사람이라 생각했다. 주인공은 그런 진진을 차단하고 싶어 했지만 연체 도서를 받기 위해 그의 집을 방문한 순간, 집안에 잔뜩 쌓인 책들과 다시 쓰이는 글들을 보고 새로운 협상안을 제시한다.

 


역시 나의 구세주는 어쨌거나 저쨌거나 소설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 목표는 모든 도서관에 있는 책을 다시 쓰는 작업을 하는 겁니다. 그 과정이 하나의 소설이자 예술이죠.”

 

주인공은 상주 작가가 되고 싶어 했던 진진에게 상주 작가 자리를 맡기고 본격적으로 자신이 듣고 있는 소리의 실체와 문학의 의미를 찾아 도서관을 모험한다. 모든 것이 마음에 드는 상주작가 자리지만 아침 9시에 출근하는 것을 아쉬워했던 그가 새벽 5시에 자발적으로 도서관으로 출근한다. 진진은 책을 다시 쓰고 주인공은 천장 위에 숨어있는 문학의 의미를 찾는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의 삶의 구세주는 소설뿐이니까.

 

처음엔 그저 재밌고 신나게 달렸고, 책의 중간쯤에 닿았을 땐 이거.. 정체가 뭐지..?”싶다가 후반부에 닿을 땐 그래서.. 문학은 뭐지?”하는 고민을 하게 되는 소설이었다.


마지막으로, 뜬금없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어린 모습의 민활성이 천장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을 때, 나는 무엇이든 이라는 단어면 충분했던, 그저 본능과 본래의 의미에 충실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기도 했다.

"대체 문학은 무슨 의미가 있는 거죠? 소설에는 어떤 가치가 있는 거냐고요."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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