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정말 멋진 기록입니다.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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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남 오빠에게 (어나더커버 특별판)
조남주 외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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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은 'metoo'의 행렬이다.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불거진 사회적인 이슈들은 여성 문제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불러일으켰고, 다양한 <페미니즘> 책과 강연들은 우리와 근접거리로 다가왔다. 작년 <82년생 김지영, 조남주, 민음사> 이 던진 사회적 문제 의식은 조금은 성숙해진 페미니즘 운동의 한 분야를 장식하고 있다. 실제 대통령에게 전달된 책이라는 화제성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는 책이 되었고 그 책이 던지는 진지한 질문은 우리가 올바른 젠더의식을 가지기 위한 시발점이 되었다.
-물론 <82년생 김지영> <우리는 페미니스트가 되어야합니다.><나쁜페미니스트> <애덤스미스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나요?><남자들은 나를 가르치려한다> 등의 저작을 통한 시각의 수정은 , 사회적 담론의 깊이에 대한 우려의 시각도 있지만, 우리는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의 경구가 어느 개업하는 식당에 성공염원으로만 걸리지 않기를 바라게 한다.
<현남오빠에게는>는 총 7명의 작가들이 모여 다양한 여성의 삶을 이야기한다. 표제작인 <현남오빠에게> 는 82년생 김지영의 작가 조남주, 이후 작품은 다양한 작품 활동과 여성 작가의 목소리를 내는 작가들이 보였다. 최은영, 김이설, 최종화, 손보미,구병모, 김성중
이책을 두고 읽기로 한 중에 검사의 성추행 피해 고백으로 시작된 'metoo'운동은 -물론 물건너 미국 헐리우드의 성추행 사건의 고백으로 시작한 -이제까지 없었던 고무적인 일이기도 하다.
<현남오빠에게>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으며, 우리가 날마다 마주하는 일상성이 주는 잔혹감과 미처 채 깨닫지 못한 현실의 공포감을 안겨준다. 슬프기만 하다기 보다는 나조차 젠더의식의 미약한 뿌리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라게 하는 단편모임집이다.
이책을 읽으면 ' 새삼 '이라는 단어가 생각나지만-문제 의식이 새롭지 않다는 뜻이다.-그렇다고 아직도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는 우리 삶을 돌아보게 한다.
인간의 이기심, 사회적 존재라는 인간의 이기심은 자신의 위치, 물론 시시각각 변하는 자신의 위치에서 파생된 역할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 인간으로 타인을 바라보는 내가 얼마나 인간적일 수 있느가를 묻는 김이설 작가의 <경년更年> 이라는 작품은 중년의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의 자신의 정체성과 다른 여성을 바라보는 자신의 정체성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작품이다.

당연히 나의 일이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회사에서 일하니까, 학교에선 공부하고 , 어린건 아직 어리니까. 집안일은 집에 있는 나의 몫이라고 생각핬다. 일과를 마치고 돌아오는 식구를 위해 소비하는 나의 시간이 나의 가치라고 믿고 살았지만 소용없었다. 해도 표도 안나고, 안하면 더 표 나는게 집안 일이었다. 회사는 월급이라도 주고, 아리들은 성적표라도 받아오지. 나는 ? (p.81)-<경년 >중

김이설 작가는 경년을 통해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한 여성의 바꾸니 삶을 조망한다. 아들의 입장일 수 밖에 없지만 아들과 남편을 바라보는 그들속에서 자신의 젠더를 회복하는 엄마인 나.  아들의 엄마였기 때문에 딸들을 잊는 모습에 피곤을 느끼는 것이 가혹하기도 하지만 , 그들이 늘어갈수록 희망인 있을 것이다.

나와 진아가 아주 다르게 살아가는 건 그저 아주 다른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세상의 통념에 따라가지 않은 진아의 선택만 옳은 것이 아니듯, 내가 의심없이 결혼과 출산을 선택한 것은 미숙하고 게을러서가 아니었다. 통념에 의문을 품지 않고 기혼 여성이 된 것을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자책할 필요도 없었다. 이제는 진아의 삶을 흠모하고 싶지 않았다. (p.116)
네가 여자여서, 세상의 온갖 부당함과 불편함을 이제 어린 너와도 나워 갖게 된 것이 서글프기 때문이라는 걸 말할 수는 없었다.(p.119)-<경년> 중

김이설 작가의 <경년> 는 내 나이 또래의 누구나 경험하는 이야기를 섬뜩하지만 다른 세계에서는 아는 이야기로 두얼굴인 우리를 만나게 한다.
조남주 작가의 < 현남오빠에게>는 자신의 뜻대로 여성의 삶을 가두고 재단한 현남오빠로 구체화되는 세계와 일별을 고하는 작품이다. 이상하게 초등학교 선생님의 무슨 오래전 이야기를 들려주셨던 생각이 난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여자는 세명의 남자를 섬긴다. 아버지, 남편, 아들"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폭력과 불의에 복종하라는 의미와 진배없지 않은가) 아무것도 모르던 우리는 그말을 무슨 격언처럼 새겼던건지 모른다.
도대체 섬길 대상이 무엇일까라는 의문을 품은 것은 한함 오랜뒤였다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지속적인 세뇌는 나를 나로서가 아닌 누군가의 00,누군가의00으로 위치매김하는데도 거부감이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현남오빠에게>나는

다시 한번 분명히 말하지만 청혼은 거절합니다. 저는 더 이상 '강현남의 여자'로 살지 않을거예요. 오빠는 그럴듯한 프로포즈가 없어서 제가 망설이는 줄 알지만 아닙니다. (중략) 저는 제 인생을 살고 싶고 너랑 결혼하기 싫은 겁니다. 본격적으로 결혼 얘기가 나오고 나서야 꺼림칙햇던 모든것이 분명해졌어. 그동안 오빠가 나를 한 인간으로 존중하지 않았다는 것, 애정을 빙자해 나를 가두고 제한하고 무시해왔던 것, 그래서 나를 무능하고 소심한 사람으로 만들엇던 것.
오빠가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나를 돌봐줬던 게 아니라 나를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만들엇더라. (중략)_
덕분에 이제라도 깨달앗거든, 강현남, 이 개자식아!(p.38)-<현남오빠에게 > 중

통쾌함을 날린다. 그녀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가 수많은 그녀를 만나기를 기대해본다.
<쇼코의 미소>를 통해 등단한 최은영 작가의 단편< 당신의 평화> 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명절 우스개 소리 "시어머니가 며느리 한테 딸처럼 살자고 하고 딸처럼 행동하면 친정에서 잘못배웠다"라고 말하는 현실을 옮겨놓은 것 같다. 최은영 작가는 며느리 선영보다는 정순ㅇ이 며느리로서의 고단한 삶을 목격하고 증언하는 맏딸 유진, 정순의 관계를 배치하여 남성적인 사회에서 일상에서 무너지는 여성연대의 비극성을 드러내고 있다
어느 미친놈이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것을 떠들고 다녓을까?
역사적으로 폭력적이고 육식적인 남성의 세계에서 여성의 연대는 늘 존재해왔고 , 실제 현존하는 여러 부족 사이에서도 발견되었다.
정순이 자신의 시집살이를 선영을 통해 되풀이하려는 피해의식을 유진은 끊을 수 없는 굴레로 생각한다. 유진의 아버지와 준호의 남성적 시각의 차이는 여성인 정순을 더욱더 패배감 느끼게 하는 것이다. 정순이 진정 '평화'를 얻는 것은 시집살이의 되물림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찾는 것이라는 유진의 말은 우리모두에게 고부갈등이라는 명절의 희안한 기삿거리를 일거에 날릴 수 있는 것이 되지 않을까.

그가 말햇던 현명한 아내, 현명한 어머니란 무슨 의미엿을까.참고 참고 또 참는 사람, 남자가 하는 일에 토를 달지 않는 사람, 남자와 아이들에게 궁극의 편안함을 제공하는 사람, 자기 욕구를 헐어 남의 욕구를 채워주는 사람, 자기 주장이 없거나 약하므로 갈등을 일으킬 일도 없는 사람...그가' 현명함' 이라는 말을 입에 올릴때마다 유진은 거부감을 느꼈다. (p.51)
그집에서 유진의 미래는 그와 그의 식구들에 의해 다르게 설계되었다. 대학 교육을 받고, 여성학 수업을 들었으면서도 유진은 어쩐지 그의 식구들 앞에서 그의 식구들이 보기 좋은 모습으로 행동했다.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와의 갈등을 피하고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서 그런 태도를 취했던 걸까. '자기 여자' 데려가 부모에게 인정받고 싶어햇던 그의 욕구를 ㅇ진은 머리로 이해할 수 잇었다 우진이 애해할 수 없고 차마 돌아보기 싫엇던 사람은 그때의 유진 자신이었다. (p.61)-<당신의 평화> 중

"딸가진 집이 죄인"이라는 말은 우리 부모님도 늘 하던 말이었는데, 어려운 살림살이에서도 우리를 키우셨던 부모님이 '왜' 죄인인지 의문은 들면서도 나도 거기에 맞춰 살았던 것 같다. 오랫동안 나도 타자를 통해 나의 가치를 인정받고, 나의 존재를 증명받으려고 했던 것이 사실이다.  유진이 선영을 자기 식으로 바라보는 정순과 거기를 두려는 이유도 끊임없는 학습을 통해 전승되는 여성의 삶의 고리를 끊고자 하는 열망인지도 모른다.

그 거리는 유진에게 어떤 안타까움을, 그리고 자유를 줬지만 언젠가 그만큼의 슬픔을 줄것이었다. 유진은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어떤 사랑도, 어떤 후회도 그 슬픔을 갚아 줄수 없다는 사실도, 그러나 이 순간 유진은 최선을 다해 이 익숙한 반복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을 뿐이었다. 혼자가 되고 싶을뿐이었다. (p.73) -<당신의 평화 >중

김성중 작가의 <화성의 아이>는 우주개발의 희생물이 된 라이카(역사속의 개다) 와 화성으로 보내진 클론의 이야기이다. sf소설을 읽는 것같은 작품을 통해 클론과 라이카, 부서진 로봇을 통해 새롭게 복원된 모성 사회를 꿈꾸게 한다.
구병모 작가의 <하르피아이와 축제의 밤> 을 통해 여성의 잔혹한 수난사를 비유한다.  하르피아이는 실제 여성 수학자로 잔인한 고문을 받고 살해당했다고 하는 데 무엇보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했다는 작가의 말은 역사속를 돌아보게 한다. '마녀 사냥'은 있지만, 상대적으로 남자인 마법사는 존경을 받지 않앗던가.  잔혹한 서바이벌 게임을 통해 남성을 단죄하는 대회는 반대로 잔혹하게 여성을 난도질하는 현실의 재연일 것이다.

고작 그정도 연관짓기엔 억측이엇으며 표본또한 충분히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릿속ㅇ르 맴도는 단신 속의 말들...딸 같아서.... 평소 가족 대하듯이...오해가 잇는 듯....모함에 불과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쾌했다면 성의껏 사과하를 전하며.... 그말들은 한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써써던 수마노은 우아한 말들과 맥락도 내용도 조금씩 다르나 본질적으로 유사한 의도를 품고 있었다... (p.231) <하르피아이와 축제의 밤> 중

세상에 완벽한 예견이었을까. 아니면 그들의 말처럼 오랜 관행이라 우리는 익숙하게 아는 것일까 .현재의 수많은 미투운동의 가해자로 지목된 당사자들이 하는 말들 아닌가. 이런 말들이 너무나 익숙한 것에 공포감을 느낀다.

네소스의 함정에 빠진 헤라클레스, 아폴론과의 내기에서 패배한 마르시아스, 에루리디케를 영원히 잃고 여인들의 원한을 산 오르페우스, 도래할 새봄의 파종을 위해 제몸을 바치는 디오니소스까지 이런 저런 이유로 살가죽이 벗겨지거나 육신이 찢겨진 허구의 이야기 속 남자들은 하고많았으나 , 이 순간 어둠속으로 추락하는 표의 의식에 떠오른 것은 머리카락과 옷을 빼앗기고 귤껍데기와 사금파리로 살이 도려내어져 살해당한 수학자 히파티아, 실존했던 그녀였다 (p.240)- <하르피아이와 축제의 밤>

'나는 죽음으로 비로서 나를 완성한다'를 로망 가리의 말은 나에게 오랫동안 남았다.
여성으로 사는 삶을 계획한 적도 없지만 나는 여성으로 산다.
엄마로서의 삶을 나의 엄마를 통해 미리 봤지만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는 누군가의 역할로는 더더욱 살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이제 갈곳을 몰라 할때도 많다.
이 일곱편의 작품을 읽으며 나는 여성이기 이전에 자유로운 인간이기를 꿈꾼다.
여성학자 이민경은 
" 이 일곱편의 이야기들은 바로 거기서부터 이어진다. 컸던 혼란과 두려움보다는 작은 혼란과 두려움을 낳은 데로부터,그리고 이 이야기들은 스스로의 생각을 의심하는데 지쳐 세상과 자신 중에 틀린 쪽이 자신이라고 생각할 뻔한 어떤 여성을 구해줄 것이다. 그 여성은 홀로 품고 잇던 마음이 호라자로 태연히 찍힌 것을 보고 자신에 대한 불신을 조금 거두어 볼 것이다. 이미 자신은 틀렷다는 마음을 먹은지 오래인 여성의 마음마저도 조금 돌려볼 수 있을 것이다 ....
그러므로 이어 쓰고
거꾸로 쓰고
새로 쓰고
다시 쓴다면
아직은 낯설은 글들이 쌓이고 다져져 새로운 땅을 만들어 줄 것이다. "
고 이책을 소개한다
세상 어떤 누군가도 자신의 삶이 부정도지 않기를 ,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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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책임 - 한홍구 역사논설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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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잡지 못한 역사는 반복된다.

역사는 책임지는 사람들의 것이다.

몇 주전부터 잡고 있었던 책인데,다른 책에 밀려 계속 미루다  이제  책을 덮었다. 세월호 이후,단 한명의 국민도 구조하지 못한  국가와 이 국가를 운영하는사람들을 밝혀보고자 쓰게 되었다는 저자의 말처럼,역사와 책임은 한국현대사에 집중하고 있다.

믿을것은 우리 자신밖에 .우리 자신들이 만들어온 역사밖에 없다. 호흡을 길게 가져야 한다(중략)
우리가 믿을것은 우리 자신에 내재한 이 복원력밖에 없다.더 이상 대한민국 국호를 책임지지 않는 자들,위기의 순간에 무엇운 해야할지 모르는 자들에게 맡겨둘 수없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간직한이들이 움직여야 한다. 역사는 책임지는 사람들의 것이다,ㅡ머리말 중 (p.11)

한홍구 교수는 역사와 책임을 통해,말그대로  역사앞에서 책임지지 않는 그들을 고발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세상은 참 변했다. 가끔 예전 이야기를 하다 격앙되는 나조차, 모르는 수많은 일을 이 책에서는 증언한다.

세월호는 우리에게 준엄한 물음을 던진다. 책임이란 무엇인가?역사앞에서 책임을 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속옷바람으로 도망치는 .어처구니없는 선장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저 기막힌 모습을 우리는 역사의 굽이굽이 많이 보아왔다(p.17)

한홍구 교수는  세월호의 도저히 이해할수 없는일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생각해보면 그의 말처럼 백성은 죽는데,위정자들은 도망치기 바빴다. 추석즈음 개봉할 영화 "남한산성"도  백성을 버리고 도주한 왕의 얘기가 아닌가. 그의 말처럼 참으로 오랜시간 백성들은 나라를 위해 싸웠는데, 그들은  목숨을 위해 도망쳤다.
그는 1950 년 6월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그의 이야기가 나로선 새삼스럽진 않다. 많은 책이나 유인물을 통해 이야기되었었고,관점이 다른다하여도 한국현대사의 수많은 자료들은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을  이야기한 책과 구별될 수 있는 것이 그는 명확히 세월호로 시작하여,역사적으로 세월호를 일으킨 그들이 현시점의 문제가 아님을 고발한다.
수많은 간첩단 조작사건, 수많은  의로운사람의 죽음을 기획한 사람들,일제시대 친일파들이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통합진보당 해산이라는 민주국가라면 있을수 없는 자유로운 정당을 이념이라는 잣대로 해체하여도 우리는 이념의 잣대대로만 바라본다. 그 이면에 어떤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지,모른다.
통합진보당보다  더 강력했던 것이 제헌헌법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경제 문제에 있어서 개인주의적 자본주의 국가의 체제를 폐기하고는 사회주의적 균등의 원리를 채택" 했다고 한다. 대한민국을 건국할때의 국시였던 헌법의 사상은 지금에서는 폐기 직전이다. 제헌헌법은 사실 전혀 몰랐는데, 놀랍다.정치민주주의와 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를 조화하고자 한 제헌헌법의 정신이 소수의 위정자들에 의해 쓰레기처럼 폐기된데는 무지몽매한 우리의 책임도 클것이다.
특히 김기춘뎐에서 그는 한국사법엘리트의 대표인 김기춘을 통해 ,정권이 바뀌어도 기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우병우라는 괴물이 하루이틀의 문제인가.
프레모 레비는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나치의 반인륜적 범죄를 저항없이 받아들인( 큰저항없이) 독일국민의 책임에 대해서도 묻고 있다. 역사와 책임에는 소수 위정자들의 책임만 있지 않을 것이다. 매번 되풀이되는 역사를 끊어내지 못한 우리의 책임도 클것이다.

민주주의 시대에 정치인들에게 천리마는 시민이다. 지금 자기 등에 말안장 얹어주길 바라는 시민은 한국 역사상 그어느때보다도 많다
10 년전을 돌아보라. 역사의 기회는 생각보다 자주 온다. 싸움의 의지를 다지고 싸움의 근육을 회복할지어다. 신야를 달리는 천리마의 울음소리가 듣고 싶다.(p.253)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로 우리에게 남아있는 시인은 빼앗긴들에는 반드시 봄이 온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역사는 되풀이된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의 폐허속에 싹을 틔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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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인문학 - 클레멘트 코스 기적을 만들다
얼 쇼리스 지음, 이병곤.고병헌.임정아 옮김 / 이매진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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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인문학은 클레멘트 코스의 기적을 이룬 얼 쇼리스 박사가 클레멘트 코스를 하게 된 계기와 코스의 과정을 이야기 하고 있다.
책에서도 밝히듯 우리나라에서도 클레멘트 코스를 진행했었다고 한다,
옮긴 이에 반가운 이름이 있다. 고병헌 성공회대 교수님이 계신데,그분의 강의는 한번은 도서관 학교에서 한번은 직접 모시어 마을 공동체 강의로 진행했었다.
그때는 줏대있는 부모로 사는 것의 주제로 진행했었는데. 교수님의 강의에 웃고 울었던 기억이 난다.
이 책은 인문학을 공부하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을 깨는 책이다.
인문학하면 인간들중 성찰 할 수 있는 기본 자질이 된 지성인이 주로 배우는 학문이라고 생각하는데 이클레멘트 코스를 하게 된 계기를 이야기 하는 얼 쇼리스 박사의 생각은 기존의 관념을 뒤집는 것이다.
나조차 인문학=지성인 이라는 틀에 박힌 생각으로 읽저 읺았난 생각이 되면서,부끄러움이 느껴졌다.
솔직히 나는 이 책의 여러 부분보다 옮긴이의 말에 있었던 일화가 생각난다.

저는 교수님들이 이책을 매우 어렵다고 해서 읽기 전에 많이 긴장했어요.하지만 오늘 워크샵에 읽지도 않고 참석 할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할수없이 책을 잡았지요. 그런데 저는 책이 매우 쉽게 읽혔어요. 그리고 이해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고요.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왜 그런지 말이죠. 제 생각에는 2장부터 10장까지 의 내용은 사실 교수님들의 삶의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그런 이책에서 제시한 빈곤이나 가난,무력,폭력등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개념들이 교수님들에게는 낯설 뿐 아니라 ,그런 내용이 반복되면서 지루함을 느끼셧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하지만 그 내용들은 빈곤 '안'에서 사는 우리들에게는 결코 낯선 개념일 수 없으며, 그래서 흥미롭기 조차 했어요. (p.40)

얼 쇼리스 박사의 클레멘트 코스의 기본 취지중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한다. " 그것은 대화 가운데 존재하며, 대화는 '가난한 이들도 인간이며,그들의 인간성을 가장 적절하게 존중하는 방식은 공적인 삶의 영역에서 시민으로서 대우하는 것이다.: 라는 생각에서 시작한다.(p.38) 고 밝히고 있다.
그는 왜 가난한 빈부의 격차가 발생하는지,가난이 파생시키는 사회적 개인적 문제를 직시하는 것으로 클레멘트 코스의 필요성과 기존 취지를 설명한다.

만약 가장 영향력있는 미국인들이 선택한 이 단어가 적절하고 사회과학자들의 이론이 정확하다면-표면적으로 확실하게 그렇게 보이는 -현대사회의 목표는 부유함이 아니라 불평등이다.
편집자이자 수필가인 루이스 랩햄은 그답지 않게 극단적인 예를 들어 이런 글이 쓴적 있다."캐비어를 먹는 한 사람이 잇으려면 누군가는 반드시 개밥을 먹어야 한다. ".... 그는 승자와 패자,현대 세계의 게임,그리고 미국적인 방식과 같은 극단의 사례를 선택했다.(p.44)
만약 빈곤이 분화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고, 그것에서 많은 것들이 파생되었다면 ,단순하고 정확한 정의가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의 빈곤은 물질적 결핍과 숱한 도덕적 좌절이 겹쳐져서 만들어진 복합성 그 자체다 사우스 브롱크스 여성들과 마르크스가 옳앗다. 양은 질로 진화한다. 전적으로 소득에만 기초한 빈곤선은 중산츨의 삶을 발견한 사람으로부터 빈민을 가려내는데 적합하지 않다.(p.55)
이제 24번 구역에서는 어떠한 정치 활동도 일어 날수 없다. 모든 사람은 자신만을 위해 존재한다. 경제가 지배규칙이 된것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만을 위해 존재한다. 세계는 경주만큼이나 상대적이며,상대적인 빈곤은 견디기가 어렵다.이것은 인류 공동체에 참여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자기존종의 모욕이다.게임의 끄트머리에서 중산층과 승자와 맺는 동맹을 선택하고 다른 모든이들을 빈민으로 규정해버리면 24번 구역에 시기심이 등장한다. 그 시기심에서 소외,증오,그리고 분노가 피어오른다.(p.58)
클레멘트 코스를 설립하기 위해 소크라테스의 방법론을 선택할 때 우리는 학생들의 정치적 삶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것은 교수의 강의를 듣기 위해 학생들이 앉아만 있기만 하면 되는 프랑스식 모델과는 다른것이었다.소크라테스는 글로 기록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결정을 위채'정치적 삶'을 예로 들었다. 그는 생각과 행동을 융합해 정치를 탄생시킨 것이다.정치적 삶과 정신적 삶은 비슷한 과정을 거쳤고,유사한 방법을 사용했다. 정치는 언제난 대화였다. 대화처럼 정치는 한사람만으로 이워질 수 없으며,사람과 사람사이에 펼쳐진 자유 공간, 즉 정치적 공간이 일어난다.(p.65)
어떤 집단에 속한 회원들의 행위에 대한 협상이나 정치적 삶에서 일어나는 활동은 사생활의 영역에서 발생할 수 없다. 현대 사회에서는 무기력이나 폴력 행태의 반응이 정치적 삶을 대신한다. 원시사회의 의식은 정치적 삶을 허용하지 않았다. ...현재처럼 필요의 법칙에 따라 산다는 것은 무력의 법칙에 따라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이런 상황에서 정치적 삶이란 불가능하다.그렇다고 아리스터텔레스가 정치를 안락한 삶이나, 여가의 한 유형이라고 생각한건 아니다.더욱이 정치 그 자체가 정치의 존재 이유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필요'라는 중압감은 개인을 행동하는 삶에서 팍팍한 생존의 현장으로 밀어내버린다. 그런 상황에서는 각 개인이 지니고 있는 행복으로 이끄는 습관들이 발현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필요'에 지배당하는 삶을 노예제도와 비교했다.(p.70)
만약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면 혁명이 일어날것 같지 않는 나라에서 사는 빈민들에게 닥친 문제는 어떻게 주류 신화를 뒤엎느냐 하는데 달려 있다. 황금시대를 버리면 그들은 그 신화를 통헤 받던 위안을 잃게 될 것이고 그 신화를 계속 붙들고 잇으면 그들은 가난 속에, 자신들의 처지를 위로해주는 설명이 필요한 채로 남겨질 것이다.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빈곤을 뿌리치고,주류 신화가 옥죄고 있는 이중의 속박을 깨뜨리기 위한 노력은 영웅적인 모험을 요구한다. 이 모험은 종종 비극으로 끝나기도 한다. 영웅적인 빈민들의 용기가 대단하다 할지라도 끈질기에 살아남는 것이 신화의 본질이기 때문이다.(p.81)
힘은 시민의 공적 삶이란 '행동하는 삶'의 결과이며, 힘 그자체가 '행동하는 삶'이다. 정당한 힘은 오로지 이런 행동하는 삶을 통해서만 가늖며,한나 아렌트가 말했들시 힘은 저장될수 없는 것이다. 행동이 그치는 순간 힘는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난 이러한 시민의 행동도 힘있는 집단이 서로 동의한 수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정치적 삶은 아노미적 상태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p.131)
결국 해결의 실마리는 '시내 중심가의 사람들의 정신적 삶'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에 있었다. 정치만이 무력의 보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었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이 공적 세계에 참여하여 정치적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성찰적 사고를 할 수 잇는 능력이 필요했다.그리고 이 성찰적 사고능력이 바로 비지니스 세계에서 말하는 시내 중심사 사람들의 정신적 삶이엇던 것이다. (p.170)
정치적 삶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길이라면 인문학은 성찰적 사고와 정치적 삶에 입문하는 입구였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들을 가난에서 해방 시켜줄 사람이 필요하지 않았으며, 그런 탈출구는 진작부터 존재하고 잇었다. 그러나 성찰적 사고와 정치에 이르는 길을 열어 제치려면 부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삶을 준비하는 과정간의 차이가 제거돼야 한다. 그리고 현대 사화를작동하는 '게임의 법칙'은 평등과 동등한 대화를 촉진시킬 수 있는 법칙으로 대체되어야 할것이다. 이런 일들이 가능하려면 가난한 이들의 삶뿐만 아니라 사회전체를 개혁해야 한다. (p.174)
인류가 주어진 운명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던 상테에서 벗어나 '자치'를 실행하기 까지의 과정에서 정치가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 그 역사를 '자기 통제'의 개념에서 추적해낼 수 잇다. 자기 통제'라는 개념속에서 인문학,평온함, 그리고 인간의 삶에서 지워낼 수 없는 어려움들을 성찰을 통해 극복하는 것 등과 같은 뜻들이 담겨잇다. '자기 통제'는 무력에 맞설 수 있는 방어 수단이며,진정한 '힘'에 대한 정의이고,인간다움 그 자체다.(p.198)
타자의 행복을 보장하는 일은 추구할 가치가 있는 목표다. 그리고 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방법으로써의 민주주의는 모든 것을 무릎 쓸 만한 가치가 있는 위험이다.(p.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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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방 최인호 중단편전집 1
최인호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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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문학관을 즐겨봤었다. 읽는 것만큼 보는 것을 좋아하던 나는 오랜시간 동안 TV문학관과 베스트셀러 극장을 즐겨보았다 .그러나 학창 시절 이후 한국근현대문학을 즐겨 접하지는 않았다. 일본 문학을 읽는 만큼도 안 읽었다고 이제와서야 고백해본다. 숭례문학당의 단편읽기 시즌 2에서 읽은 마지막 책은 최인호의 <타인의 방> 단편집 중 '술꾼'이다.
고등학교 2 학년때 등단하여, 어느날 누나집에서 배를 깔고 두시간만에 써내려갔다는 <술꾼> 은 도저히 두시간의 감성으로는 읽을 수가 없다. 가히 그를 천재라 하지 않으면 ,누구를 칭할 수 있을까
신들린 듯이 써내려간듯한 술꾼에서는 소년과 술꾼들, 아버지와 아픈 어머니가 나온다
아픈 어머니를 위해 술집을 돌아다니면서 아버지를 찾는 소년은 결국 그것이 허상임을 되풀이는 되는 상처임을 직시할 뿐이다. 죽은 육친을 그것이 죽음인지. 페스트의 랑베르가 겪은 생이별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소년이 세상에 홀로 남았음을 그것이 전쟁이라는 상흔의 결과임을 누구나 알수 있다.
'잊지마세요' 결국 스스로 다짐하는 아버지를 찾겟다는 다부진 ,그러나 그 시절의 상처를 누구나 알기에 더욱더 슬프고 참을 수 없는 애잔함에 몸소리 쳐진다.

"아주머니, 나술 ,술 마시러 왔어요 " "정말이지 취하고 싶어요" (P.107)
" 잊지 마세요. 우리 아버지 이름말이야요. 국.승.현 나중에 혹 술집에서 만나더라두 내가 술먹더란 말 하디 마세요. 정말이야요." (P.97)
술꾼들은 이제 너무 취해서 한사람 한사람 집을 저주하고,마누랄 저주하고, 맏아들을 둘째아들을 저주하고, 생활을,미래에 대한 희망을, 원수놈의 월급을, 도대체가 살아간ㄴ 그 자체를 , 그리고 자기 자신을 저주하기 시작했다. (P.97)
한잔의 술이 그를 자유롭게 했다. 헤어질때 들이켜는 마지막 술처럼 그 한잔의 새로운 술은 그를 기쁘게 했다. (P.102)
언덕 아래에서 차가운 먼지냄새 섞인 바람이 불어왔다. 그는 사냥개처럼 그 냄새를 맡으며 이를 악물고,내일은 틀림없이 아버지를 찾을 수 잇을거라고 단정했다. (P.109)
아픔도 없이 날재죽지가 양 옆구리에서 부터 돋아나와 자기를 새처럼 가볍게 하리라는 것도 알고 잇었다. (P.106)
" 우리 아바진 술만 먹으믄 울엇시오. 기리티만 난 보다시피 울딘 않아요".(P.108)
그는 자기가 갈곳이 어딘가를 잘 알고 있었다.아무리 취해도 그는 자기의 노정을 잊어버린적이 없었다. (P.105)
.“아주마니. 나 술, 술 마시러 왔시요.”
그는 자기 말을 믿어달라는 듯 애원하는 시선을 보냈다.
“……이애가 미쳤나?”
 “딱 두 잔만 먹갔시요. 돈두 있시요.”
 아이는 여인 앞에 지폐 두 장을 내보였다.
 “정말이지 취하고 싶어요. 내 주량은 내가 잘 알고 있시요. 두 잔만, 딱 두 잔 더 먹으믄 꿈도 없이 잘 잘 수 있갔시요. 지금 이 정도에서 그치면 안 먹은 것보담 더 못하구, 잠두 잘 오딜 않으니끼니.”
아이는
민물고기처럼 웃었다. 주방의 불빛이 쓸쓸히 한 줌 그의 얼굴에 비끼고 있었다. (P.107)

그때였다. 갑자기 사내가 잠에서 깨어난 듯 흠칫하며 나이프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그 나이프가 아이의 목을 겨누었다. 아이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사내의 눈이 병적으로 빛나고 있었으며 말린 입술 아래로는 흰 웃음이 무기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요 술주정뱅이 꼬마 자식아.”
  사내는 짖었다.
  “내 널 편하게 죽여주마.”
  아이는 무어라고 항거하려 했으나 혀를 놀리는 것이 쓸데없는 짓임을 알았다.
  “꼼짝 마라, 이 꼬마야.”
  그의 왼손 안에서 번쩍이는 나이프는 그 아이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아이는 목 근처에 가벼운 통증이 오는 것을 느끼었고 그는 안이한 생명의 탄식소리를 들었다.
 (망할 놈의 목이다.)
 사내의 손이 출발을 알리는 체육교사의 그것처럼 잔뜩 추켜졌다. 그의 손아귀에서 칼날은 작은 새처럼 불꽃이 튀었다. 그리고 그 칼은 순간 허공을 그어 내렸다. 아이는 공기와 마찰하는 가벼운 소리와 함께 부싯돌을 긋는 것 같은 찰나적인 섬광이 그의 손에서 번쩍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사내의 손이 제 가슴을 찌르고 탁자 앞으로 고꾸라지는 것을 보았다. 아이는 총알처럼 술집에서 퉁겨져 나왔다.
(바보 같은 자식이다.)(P.104)


 
도대체 나를 흔드는 슬픔은 무엇일까 아버지를 찾는 끈을 놓치 못하는 소년의 모습이 ,아이가 아버지를 찾는 것이 결국 그의 삶의 끈임을 서글프게 알아가는 것이 몸서리치게 슬프다.
술꾼들이 소년의 말에 대꾸하는 모습은 그 모습이 하루 이틀이 아님을 되풀이 되는 삶의 비장함임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다.
술꾼들은 그들의 방식으로 부모를 찾아 헤매는 소년을 대한다. 자기 혐오와 경멸,그리고 어린소년에게 술을 먹이면서 위로아닌 위로를 건넬 수 있을 뿐이다. 소년의 삶이 앞으로 얼마나 참혹할지는 알지 못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작가의 그의 하루가 지났을 뿐 되풀이 될 또 다른 하루가 올것을 예견하게 한다. 소년이 울지 않고 되풀이되는 속에서 스스로 위로를 찾는 것은 아이러니하고 전쟁에서 가장 고통받는 것이 아이들임을 드러내지만 ,아이들로 인해 새로운 시대의 하루의 희망이 있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박기범의 문제아를 읽을대처럼 극 사실주의 문학은 나를 오열하게 하지만 , 그러나 그 사실적인 현실 고발은 우리에게 또다른 희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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