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랄한 라라
마광수 지음 / 평단(평단문화사)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발랄한 라라> 감상문.

발랄한 라라
마광수 지음 / 평단문화사
나의 점수 : ★★★★

'발랄한 라라'는 마광수님의 첫 단편소설 모음집이다.
평소 마광수님의 작품세계와 사상을 흠모해왔다고 주변에 공공연히 말하지만
정작 마광수님의 작품은 가지고 있는게 없는.. 참으로 부끄러운 팬인 본인.

그래서 더 이상 미룰수 없다고 생각하고 저번에 산 책이다.

대부분 안에 수록된것은 말 그대로 '야한 글' 들이다.
(전부가 아니라 대부분이라 말한것은 아닌것도 있기 때문이다.
마광수님 글중에서 野한것이 아닌건 없을줄 알았는데... 꽤나
충격이었다)
여기에는 차마 옮기기 힘들정도의 노골적인 성적묘사와 변태적인 섹스묘사
들이 책 한권에 가득 들어있는데,
이걸 단순히 한 변태의 망상적 기벽으로 치부하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 안에는 노골적이지만 그만큼 솔직한 인간에 대한 성찰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과연 인간과 인간은 '언어'라는 수단으로 완벽히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것일까.
수많은 대화와 한번의 격정적인 몸부림. 어떤것이 한 인간의 본질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는 수단일까.
'사랑'이란것은 정말로 영혼이란것의 교감일까. 아니면 관능적인 경탄일까.
인간에게 있어서 성관계란 생식을 위한 노동이라서 숭고하고 아름다운것일까.
아니면 그것은 음란하고, 야하고, 타락적이고, 그만큼 매력적이라서 숭고하고
아름다운것일까.

마광수의 글들을 그냥 미치광이의 저질야설정도로 치부하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아름다움'이란것은 들판에 핀 꽃. 넓게 펼쳐진 바다.
아들에게 젖을 물리는 어머니에게 어울리는것이고, 관능적인 자태의 긴
손톱으로 남자의 등을 긁는 여자에겐 '아름다움'이 아니라 '천박하고 더러운'
이란 언어가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문학이란것은 어딘가 숭고하고, 뚜렷한 주제의식이 있어야 하고, 사람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계몽시키고, 가슴속의 민족성을 일깨워 책을 덮은뒤
사람들을 비장하게 만드는 그런것이어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마광수씨의 홈페이지에서 이전에 이런글을 본 기억이 난다.

"이문열은 역사를 조작해서 돈을 벌고, 나는 섹스를 조작해서 돈을 법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역사를 조작해서 글쓰는 작가는 '대하소설작가'라 해
높이 쳐주고, 이 마광수는 '변태성욕자'라고 합니다. 어느쪽이 더 사람들에게
나쁜영향을 끼치는지는 생각해보지도 않고 말입니다."

한 인터뷰에서는 이런 멘트들도 남겼다.
"나는 리얼리즘을 싫어한다. 소설은 판타지이며 꿈이다. 소설가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고 독자는 그러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는 즐거움 때문에 소설을 읽는 것이다. 소설이 자꾸 교훈주의, 엄숙주의로 흐르는데 나는 의도된 경박성을 추구한다.
내 논문이나 에세이집을 읽은 사람들은 '박학다식'하다는 얘기를 하기도 하는데
소설은 다르다. 소설은 재미를 주기 위한 것이지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꿈이나 소설은 현실도피다."

"요즘은 야한 책이 많이 나오고 시대가 많이 바뀌었다. 성 담론이 만개하는 시대다.
그런데 내 제자뻘인 김별아 씨의 소설 '미실'을 읽다가 너무 어려워서 혼났다.
나보다 글을 더 어렵게 쓰더라. 요즘 젊은 작가들은 글을 왜 어렵게 쓰는지 모르겠다. 소설도 어렵게 써야 한다는 강박증이 있는지 성을 다룬 소설도 어렵게 쓴다.
나는 시를 써서 그런지 운율에 신경을 쓰고 경쾌한 속도감을 중시해 구어체 문장으로 쉽게 쓰려고 노력한다. 읽는 사람에게 술술 읽히려면 쓰는 사람은 골치가 아프고 쉽게 쓰는 것이 더 어렵다. 내가 너무 읽기 쉽게 써서 '즐거운 사라'가 필화에 휘말렸다는 얘기도 들었다. 아직도 문장 엄숙주의에 빠져 있는 것이 문제다.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 같은 작품은 얼마나 어렵나"

나는 마광수가 가고자 하는 '한국문학의 유미주의', '문장의 엄숙주의 타파'라는 길을 응원하고 싶다.

젊은 시절에는 연애소설을 쓰다가도, 50대가 넘어가면 곧장 역사란 소스를 자기
입맛대로 버무려 '대하소설가'로 변신해 문학적 권위주의를 지니고, 문학이란
엄숙하고 진지한것이라고 말하는 많은 작가들을 '변절자'라고 말하는 그의
통쾌한 한마디가 좋다.

여튼 '발랄한 라라'에 수록된 소설들은 딱 2개만 빼고는 정말 음란하고, 노골적이며,관능적이고 인간다운 글들이다. 모처럼 돈이 아깝지 않은 소설을 읽었다.

'마 모 아무개 교수'께서 계속 활발하게 작품을 펴내시고, 그와 더불어 자신의 이상형대로 '사라같은 긴 손톱의 여자'를 하루빨리 만나시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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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 2
마광수 지음 / 해냄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사랑이라고 표현하든 성애라고 표현하든, 그 속에 몰입할 때 느끼게 되는
육체적 쾌감의 원천은 아무래도 정신인 것 같아요. 저는 정신적으로는 이미
완전한 여자거든요. 육체적 성기의 구별이나 그에 따른 쾌감의 메커니즘의 차이 따위는
제겐 아무런문제가 안 돼요" <로라> 1편 채나의 말...

저 부분을 오늘 찾았지.
음흠, 그래, 마 광수 소설을 읽으며 내가 이잡듯 찾아야 하는 게 있어요.

마광수 님도 모르는 마광수입니다.
글 중간중간에 "혹시 날 사랑하지는 않을까?" 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 사랑은 섹스만을 의미하진 않았구요. 그리고 저 '오르가슴'에서 만났던 채나라는 여인
의 말이 좀 묘합니다.

우리가 흔히 정신적인 사랑만 운운하는 글을 보다가 거기에 육체적 장면이 나오면 그게
너무 죽이고 압권인 것 같아요.
근데 마 광수님의 소설은 반대로 육체적인 확실한 성애가 나오지만 거기에 알싸한 센티멘
탈리즘이 있어요. "왠지 외로웠다"... 이런 부분의 묘사 말입니다.

<광마잡담>에서는(역시 1인칭으로 되어있기에 작가와 주인공의 심경이 어느 정도 일치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물론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그저 착한 주인공을 만났지요.
뭐랄까, 성 앞에 철저히 착하고 순종적인 주인공...

근데 <로라>에 나온 '천민'은 물론 인간적 욕망을 결백한 것으로 보고 솔직한 사람이긴
하지만
그것만으로 해석이 안 되는 짠한 부분이 조금 있는 것도 같더랍니다.

글구, 마 교수님의 책을 읽으며 느낀 점은 작가의 상상력은 참으로 원시적 야함입니다.
그것이 너무도 둘둘 펼쳐집니다. 브루나이 공화국을 한번 상상해본 사람은 아마 웃을 겁
니다. 모든 부분이 상징적인 심리적인 야함을 드러내어 줍니다.

특히 <가질 수 없는 것의 애도> 편을 읽으며 주리의 사랑이 나옵니다.
젊은 모델을 사랑하여, 그 모델의 남근을 만지작거려 주고 색을 칠해주고 아주 재미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근데 약간 사다스틱합니다. 그걸 동감하는 걸로 봐서 나 역시 사다스틱
인데...

그 약간 이루어질 듯 말듯한 사랑.
사랑에 대한 동경, 부제와 같은 그런 상태... 그게 아마 팔고(八苦) 중에 있다지요.

그렇다면 이 작품이 다 100점이냐 하면 본시 모든 작품이 100점이란 있을 수 없다는 생각
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아주 쉬운 말들, 그 다음 정확한 묘사와 납득이 갈만한 개연
성(probablity )같은 부분을 위해서 소상하게 괄호에다 설명도 해주었고요. 이름이 갖는
상징성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술집이름이 '오르가슴' 그담에 '몸부림' 이런 거...
정말 몸부림이란 무도회장 있으면 한번 가서 몸부림 쳐보고 싶은데...

분명 아주 쉬운 문장으로 써놓아서 어떤 데는 저절로 웃음이 나옵니다.
근데 이건 아주 고도의 기술로 그리 했을 겁니다. 그담에 마 교수님의 폭넓은 독서와
사상적 깊이가 있기에 이 글이 그냥 야한 글일 수도 있지만 암시성이 있는 글일 수도
있을 것이라는 억측을 합니다.
또한 늘 소설을 읽으며 재미있는 유추는 "그담에 이 사람이 어떤 작품을 쓰려나" 하는 점
치기인데요. 그건 후반부로 넘어가야 될 것 같구요.

뭐, 저도 생활인이다 보니, 팍팍 책을 못 읽는 이유는 있지만 이 책이, 그리고 마 교수
님 소설이 많은 입방아에는 오르는 것에 비해 별루 영양가없는 성적(책 읽히는 면에서입
니다)을 내는 이유는 이것 같습니다.

야한 비디오를 보는데 난 다 끝난 거야. 근데 아직도 검댕이하고 백인 여자하고 허벌나
게 빨고 물고 해대고 있다고 합시다. 그걸 또 보는 경우도 있겠지만 뭐, 한번 끝났다면
그냥 비디오를 끄고 잠을 자겠지요.
일종의 작가는 계속 야함으로, 야함으로 거듭거듭 하는데 ...
독자는 어느 부분에서는 참으로 인정하고 "아쓰, 죽갔구만" 하지만 계속 계속 그 야함의
상상력으로 갈 정신적 힘이 쭈구렁이라는 것이지요.

요컨대 작가는 원시적 상상력이 무궁무진하고 독자는 "아, 이제 그만..." 하는 식이랍니
다. 아무리 맛난 음식도 계속 입 안으로 물고 있다 하더래도 그걸 계속 물고 있는 이상
그 맛남은 그냥 식상하는 것이니까요. 일종의 독자에게 향한 눈높이가 결여된 것은 사실
일 겁니다.
물론 나같이 우라지게 정력만 많이 갖고 태어난 년은 군침도는 책이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근데 섹슈얼리티한 부분과 센티멘탈이 왜 엇비슷하게 어릿어릿 하는지 알 것 같구
요. 그리고 성에 있어서 주인공 이하 많은 사람들이 모두다 상당히 업그레이드 되었는
데...
실제 사람들은 상당히 그렇지는 않지요.
물론 그러함으로 문학과 예술이 있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리얼리티는 소설에서 꼭 필요
한 것 같구요. 모두가 다 성에 있어서 너무 잘 알고 의견들도 잘 말하고 야하고 하더랍니
다. 그것도 좀...

음, 모든 이론에 "정"만이 있다면 그 이론 자체는 정체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야, 재미나게 '오로라'를 읽지만 이 책이 더 잘 팔려야 한다는 심정에서, 아님 마광수
님을 실제 살려야 한다는 갸륵 정성 차원에서 생각대로 올리는 글이오니 곡해가 없으시
길 바랍니다.(사람들이 '왜 너는 이랬다, 저랬다 해' 하겠지만 가만 글감정을 해보세요.
저의 의도를 알아주셨음 하고요)

중간에 올라가는 이런 엽편의 독후감은 저의 느낌이 상당부분 잘못이 있으리라는 생각 또
한 전제로 깔아주십시요. 2권까지 다 읽고 그리고 책꽂이에 꽂혀있던 조금 오래된 로라
를 보며 다시 느끼는 그 느낌의 독후감이야말로 진짜일 겁니다.

그러나 저의 편협된 체계와 혹 이 책을 읽으신 분들과 느낌을 나누고자 정말 무식한 글월
을 올리니 이 설레발에 저를 너무 미워하진 마세요. 이쁜 사람이니까요.
교수님, 울지마...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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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 2
마광수 지음 / 해냄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사랑이라고 표현하든 성애라고 표현하든, 그 속에 몰입할 때 느끼게 되는
육체적 쾌감의 원천은 아무래도 정신인 것 같아요. 저는 정신적으로는 이미
완전한 여자거든요. 육체적 성기의 구별이나 그에 따른 쾌감의 메커니즘의 차이 따위는
제겐 아무런문제가 안 돼요" <로라> 1편 채나의 말...

저 부분을 오늘 찾았지.
음흠, 그래, 마 광수 소설을 읽으며 내가 이잡듯 찾아야 하는 게 있어요.

마광수 님도 모르는 마광수입니다.
글 중간중간에 "혹시 날 사랑하지는 않을까?" 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 사랑은 섹스만을 의미하진 않았구요. 그리고 저 '오르가슴'에서 만났던 채나라는 여인
의 말이 좀 묘합니다.

우리가 흔히 정신적인 사랑만 운운하는 글을 보다가 거기에 육체적 장면이 나오면 그게
너무 죽이고 압권인 것 같아요.
근데 마 광수님의 소설은 반대로 육체적인 확실한 성애가 나오지만 거기에 알싸한 센티멘
탈리즘이 있어요. "왠지 외로웠다"... 이런 부분의 묘사 말입니다.

<광마잡담>에서는(역시 1인칭으로 되어있기에 작가와 주인공의 심경이 어느 정도 일치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물론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그저 착한 주인공을 만났지요.
뭐랄까, 성 앞에 철저히 착하고 순종적인 주인공...

근데 <로라>에 나온 '천민'은 물론 인간적 욕망을 결백한 것으로 보고 솔직한 사람이긴
하지만
그것만으로 해석이 안 되는 짠한 부분이 조금 있는 것도 같더랍니다.

글구, 마 교수님의 책을 읽으며 느낀 점은 작가의 상상력은 참으로 원시적 야함입니다.
그것이 너무도 둘둘 펼쳐집니다. 브루나이 공화국을 한번 상상해본 사람은 아마 웃을 겁
니다. 모든 부분이 상징적인 심리적인 야함을 드러내어 줍니다.

특히 <가질 수 없는 것의 애도> 편을 읽으며 주리의 사랑이 나옵니다.
젊은 모델을 사랑하여, 그 모델의 남근을 만지작거려 주고 색을 칠해주고 아주 재미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근데 약간 사다스틱합니다. 그걸 동감하는 걸로 봐서 나 역시 사다스틱
인데...

그 약간 이루어질 듯 말듯한 사랑.
사랑에 대한 동경, 부제와 같은 그런 상태... 그게 아마 팔고(八苦) 중에 있다지요.

그렇다면 이 작품이 다 100점이냐 하면 본시 모든 작품이 100점이란 있을 수 없다는 생각
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아주 쉬운 말들, 그 다음 정확한 묘사와 납득이 갈만한 개연
성(probablity )같은 부분을 위해서 소상하게 괄호에다 설명도 해주었고요. 이름이 갖는
상징성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술집이름이 '오르가슴' 그담에 '몸부림' 이런 거...
정말 몸부림이란 무도회장 있으면 한번 가서 몸부림 쳐보고 싶은데...

분명 아주 쉬운 문장으로 써놓아서 어떤 데는 저절로 웃음이 나옵니다.
근데 이건 아주 고도의 기술로 그리 했을 겁니다. 그담에 마 교수님의 폭넓은 독서와
사상적 깊이가 있기에 이 글이 그냥 야한 글일 수도 있지만 암시성이 있는 글일 수도
있을 것이라는 억측을 합니다.
또한 늘 소설을 읽으며 재미있는 유추는 "그담에 이 사람이 어떤 작품을 쓰려나" 하는 점
치기인데요. 그건 후반부로 넘어가야 될 것 같구요.

뭐, 저도 생활인이다 보니, 팍팍 책을 못 읽는 이유는 있지만 이 책이, 그리고 마 교수
님 소설이 많은 입방아에는 오르는 것에 비해 별루 영양가없는 성적(책 읽히는 면에서입
니다)을 내는 이유는 이것 같습니다.

야한 비디오를 보는데 난 다 끝난 거야. 근데 아직도 검댕이하고 백인 여자하고 허벌나
게 빨고 물고 해대고 있다고 합시다. 그걸 또 보는 경우도 있겠지만 뭐, 한번 끝났다면
그냥 비디오를 끄고 잠을 자겠지요.
일종의 작가는 계속 야함으로, 야함으로 거듭거듭 하는데 ...
독자는 어느 부분에서는 참으로 인정하고 "아쓰, 죽갔구만" 하지만 계속 계속 그 야함의
상상력으로 갈 정신적 힘이 쭈구렁이라는 것이지요.

요컨대 작가는 원시적 상상력이 무궁무진하고 독자는 "아, 이제 그만..." 하는 식이랍니
다. 아무리 맛난 음식도 계속 입 안으로 물고 있다 하더래도 그걸 계속 물고 있는 이상
그 맛남은 그냥 식상하는 것이니까요. 일종의 독자에게 향한 눈높이가 결여된 것은 사실
일 겁니다.
물론 나같이 우라지게 정력만 많이 갖고 태어난 년은 군침도는 책이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근데 섹슈얼리티한 부분과 센티멘탈이 왜 엇비슷하게 어릿어릿 하는지 알 것 같구
요. 그리고 성에 있어서 주인공 이하 많은 사람들이 모두다 상당히 업그레이드 되었는
데...
실제 사람들은 상당히 그렇지는 않지요.
물론 그러함으로 문학과 예술이 있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리얼리티는 소설에서 꼭 필요
한 것 같구요. 모두가 다 성에 있어서 너무 잘 알고 의견들도 잘 말하고 야하고 하더랍니
다. 그것도 좀...

음, 모든 이론에 "정"만이 있다면 그 이론 자체는 정체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야, 재미나게 '오로라'를 읽지만 이 책이 더 잘 팔려야 한다는 심정에서, 아님 마광수
님을 실제 살려야 한다는 갸륵 정성 차원에서 생각대로 올리는 글이오니 곡해가 없으시
길 바랍니다.(사람들이 '왜 너는 이랬다, 저랬다 해' 하겠지만 가만 글감정을 해보세요.
저의 의도를 알아주셨음 하고요)

중간에 올라가는 이런 엽편의 독후감은 저의 느낌이 상당부분 잘못이 있으리라는 생각 또
한 전제로 깔아주십시요. 2권까지 다 읽고 그리고 책꽂이에 꽂혀있던 조금 오래된 로라
를 보며 다시 느끼는 그 느낌의 독후감이야말로 진짜일 겁니다.

그러나 저의 편협된 체계와 혹 이 책을 읽으신 분들과 느낌을 나누고자 정말 무식한 글월
을 올리니 이 설레발에 저를 너무 미워하진 마세요. 이쁜 사람이니까요.
교수님, 울지마...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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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 1
마광수 지음 / 해냄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사랑이라고 표현하든 성애라고 표현하든, 그 속에 몰입할 때 느끼게 되는
육체적 쾌감의 원천은 아무래도 정신인 것 같아요. 저는 정신적으로는 이미
완전한 여자거든요. 육체적 성기의 구별이나 그에 따른 쾌감의 메커니즘의 차이 따위는
제겐 아무런문제가 안 돼요" <로라> 1편 채나의 말...

저 부분을 오늘 찾았지.
음흠, 그래, 마 광수 소설을 읽으며 내가 이잡듯 찾아야 하는 게 있어요.

마광수 님도 모르는 마광수입니다.
글 중간중간에 "혹시 날 사랑하지는 않을까?" 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 사랑은 섹스만을 의미하진 않았구요. 그리고 저 '오르가슴'에서 만났던 채나라는 여인
의 말이 좀 묘합니다.

우리가 흔히 정신적인 사랑만 운운하는 글을 보다가 거기에 육체적 장면이 나오면 그게
너무 죽이고 압권인 것 같아요.
근데 마 광수님의 소설은 반대로 육체적인 확실한 성애가 나오지만 거기에 알싸한 센티멘
탈리즘이 있어요. "왠지 외로웠다"... 이런 부분의 묘사 말입니다.

<광마잡담>에서는(역시 1인칭으로 되어있기에 작가와 주인공의 심경이 어느 정도 일치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물론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그저 착한 주인공을 만났지요.
뭐랄까, 성 앞에 철저히 착하고 순종적인 주인공...

근데 <로라>에 나온 '천민'은 물론 인간적 욕망을 결백한 것으로 보고 솔직한 사람이긴
하지만
그것만으로 해석이 안 되는 짠한 부분이 조금 있는 것도 같더랍니다.

글구, 마 교수님의 책을 읽으며 느낀 점은 작가의 상상력은 참으로 원시적 야함입니다.
그것이 너무도 둘둘 펼쳐집니다. 브루나이 공화국을 한번 상상해본 사람은 아마 웃을 겁
니다. 모든 부분이 상징적인 심리적인 야함을 드러내어 줍니다.

특히 <가질 수 없는 것의 애도> 편을 읽으며 주리의 사랑이 나옵니다.
젊은 모델을 사랑하여, 그 모델의 남근을 만지작거려 주고 색을 칠해주고 아주 재미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근데 약간 사다스틱합니다. 그걸 동감하는 걸로 봐서 나 역시 사다스틱
인데...

그 약간 이루어질 듯 말듯한 사랑.
사랑에 대한 동경, 부제와 같은 그런 상태... 그게 아마 팔고(八苦) 중에 있다지요.

그렇다면 이 작품이 다 100점이냐 하면 본시 모든 작품이 100점이란 있을 수 없다는 생각
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아주 쉬운 말들, 그 다음 정확한 묘사와 납득이 갈만한 개연
성(probablity )같은 부분을 위해서 소상하게 괄호에다 설명도 해주었고요. 이름이 갖는
상징성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술집이름이 '오르가슴' 그담에 '몸부림' 이런 거...
정말 몸부림이란 무도회장 있으면 한번 가서 몸부림 쳐보고 싶은데...

분명 아주 쉬운 문장으로 써놓아서 어떤 데는 저절로 웃음이 나옵니다.
근데 이건 아주 고도의 기술로 그리 했을 겁니다. 그담에 마 교수님의 폭넓은 독서와
사상적 깊이가 있기에 이 글이 그냥 야한 글일 수도 있지만 암시성이 있는 글일 수도
있을 것이라는 억측을 합니다.
또한 늘 소설을 읽으며 재미있는 유추는 "그담에 이 사람이 어떤 작품을 쓰려나" 하는 점
치기인데요. 그건 후반부로 넘어가야 될 것 같구요.

뭐, 저도 생활인이다 보니, 팍팍 책을 못 읽는 이유는 있지만 이 책이, 그리고 마 교수
님 소설이 많은 입방아에는 오르는 것에 비해 별루 영양가없는 성적(책 읽히는 면에서입
니다)을 내는 이유는 이것 같습니다.

야한 비디오를 보는데 난 다 끝난 거야. 근데 아직도 검댕이하고 백인 여자하고 허벌나
게 빨고 물고 해대고 있다고 합시다. 그걸 또 보는 경우도 있겠지만 뭐, 한번 끝났다면
그냥 비디오를 끄고 잠을 자겠지요.
일종의 작가는 계속 야함으로, 야함으로 거듭거듭 하는데 ...
독자는 어느 부분에서는 참으로 인정하고 "아쓰, 죽갔구만" 하지만 계속 계속 그 야함의
상상력으로 갈 정신적 힘이 쭈구렁이라는 것이지요.

요컨대 작가는 원시적 상상력이 무궁무진하고 독자는 "아, 이제 그만..." 하는 식이랍니
다. 아무리 맛난 음식도 계속 입 안으로 물고 있다 하더래도 그걸 계속 물고 있는 이상
그 맛남은 그냥 식상하는 것이니까요. 일종의 독자에게 향한 눈높이가 결여된 것은 사실
일 겁니다.
물론 나같이 우라지게 정력만 많이 갖고 태어난 년은 군침도는 책이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근데 섹슈얼리티한 부분과 센티멘탈이 왜 엇비슷하게 어릿어릿 하는지 알 것 같구
요. 그리고 성에 있어서 주인공 이하 많은 사람들이 모두다 상당히 업그레이드 되었는
데...
실제 사람들은 상당히 그렇지는 않지요.
물론 그러함으로 문학과 예술이 있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리얼리티는 소설에서 꼭 필요
한 것 같구요. 모두가 다 성에 있어서 너무 잘 알고 의견들도 잘 말하고 야하고 하더랍니
다. 그것도 좀...

음, 모든 이론에 "정"만이 있다면 그 이론 자체는 정체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야, 재미나게 '오로라'를 읽지만 이 책이 더 잘 팔려야 한다는 심정에서, 아님 마광수
님을 실제 살려야 한다는 갸륵 정성 차원에서 생각대로 올리는 글이오니 곡해가 없으시
길 바랍니다.(사람들이 '왜 너는 이랬다, 저랬다 해' 하겠지만 가만 글감정을 해보세요.
저의 의도를 알아주셨음 하고요)

중간에 올라가는 이런 엽편의 독후감은 저의 느낌이 상당부분 잘못이 있으리라는 생각 또
한 전제로 깔아주십시요. 2권까지 다 읽고 그리고 책꽂이에 꽂혀있던 조금 오래된 로라
를 보며 다시 느끼는 그 느낌의 독후감이야말로 진짜일 겁니다.

그러나 저의 편협된 체계와 혹 이 책을 읽으신 분들과 느낌을 나누고자 정말 무식한 글월
을 올리니 이 설레발에 저를 너무 미워하진 마세요. 이쁜 사람이니까요.
교수님, 울지마...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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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 1
마광수 지음 / 해냄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 마광수 소설「로라」에 등장하는 세 여자 ]


별것도 아닌 인생이
이렇게 힘들 수가 없네

별것도 아닌 사랑이
이렇게 사람을 괴롭힐 수가 없네

별것도 아닌 결혼이
이렇게 스트레스를 줄 수가 없네

별것도 아닌 이혼이
이렇게 복잡할 수가 없네

별것도 아닌 시가
이렇게 수다스러울 수가 없네

별것도 아닌 똥이
이렇게 안 나올 수가 없네

실은 삶과 섹스는 별것도 아니다. 그저 0에 가까운 확률을 뚫고 태어난 우리들이 누리는 쾌
락의 권리이다.

「로라」는 별것도 아닌 삶과 섹스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 무리의 남성들과, 한 무리의 여
성들이 이야기하고 섹스하고 서로를 탐하는 이야기이다. 실은, 별로 야하지도 않다. “이 책
이 왜 검열기관에 걸려야 하나…”라고 생각될 정도로, 마음만 먹으면 어디에서나 구할 수
있는 농도를 지녔다. 그러나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한국의 대학사회 내에서 한 대학 교수가
이정도로나 색스러운 소설을 써냈단 이유만으로 검열기관에 주목받고 있다. 어디 지하 골방
에서 자는 곰팡이 냄새 나는 3류 소설가가 이런 책을 쓴다고 검열기관이 일일이 잡겠는가?
어디까지나 검열기관이 검열한답시고 이 책의 흥행을 부추긴 것이다. 멍청한 검열기관. 하지
만 대중에게 이 소설은 그저 그런 야한 소설로만 과소평가 되어있다. 그저 긍정적인 의미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나른한 오후에 자극적인 액션영화 같은 그런 소설로.

그러나 일반 대중에게 「로라」는 상당히 과소평가 되어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사회 지배적인 언론에 의한 편견, 그리고 한국의 이중적인 성문화 한국에서는 양
성적인 면에서의 성문화는 금기시되는 경향이 강하다. 그에 대한 반동으로 음성적인 면에서
의 성문화는 일반적인 사회적 기준에 비추어 보았을 때 퇴폐적이다. 양성적인 면과 음성적
인 면의 성문화가 양극단으로 나타나는 것을 이중적인 성문화라고 표현했다.
연세대 내에서도 마광수 교수에 대한 근거 없는 편견이 이유 없이 퍼져있고, 사회적으로 보아
도 주요 언론사들에 의한, 그리고 이중적인 성문화에 대한 편견이 심한 편이다. 이 이유로 인
해, 일반 대중들은 책을 읽어보지도 않고 그저 그런 야한 소설로 여기거나, 이 책의 저자를 괴
인 혹은 변태로 여기기도 한다.

이 책의 저자인 마광수 교수에 의하면 문학은 욕망의 배출구, 카타르시스의 장이다. 그렇다
면 어째서 이 소설에서 우리가 카타르시스를 느끼는가?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다.  첫
째로, 솔직하면서도 담백한 성행위 묘사를 들 수 있다. 물론, 솔직함과 담백함의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하지만 한국의 이중적인 성문화에 비추어 보았을 때, 보수적인 사회적 기준에
비추어보아 솔직한 편이다. 그리고 담백함은 사실적인 성행위 묘사에서 나온다. 인터넷 등에
서 떠도는 일반적인 “야설”들이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고, 쓸데없는 자극만 주는데 비해
「로라」에서의 성행위 묘사는 그 자체가 판타지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적으로 그려지고 있
다. 둘째로, 이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이 성적 판타지를 채워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서 살아가는 한국인들의 욕망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주목한 부분은 바로 한
국인들의 성적 욕망을 반영하고 있는 인물들의 매력이다.

검열기관에 의해서 과대평가 되어있고, 대중에 의해서는 과소평가되는 이 소설에서 우리가
쾌락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과장되어 있지만, 우리의 욕망과 삶을 반영하
는 살아있는 인물들이다. 이 인물들에게 깊이 인상을 받은 나는 세 여자를 통해 이 책을 보
았다.

<로라 : 아프로디테>

그리스 신화에서 헤라는 일부일처의 수호신, 가정의 신으로 제우스를 끊임없이 속박하고,
제우스와 관계한 여자들에게 다양한 형태로 복수하면서도 끝까지 제우스에게 집착한다. 헤라
는 가장 정상적이라고 여겨지고,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지금까지도 법적으로 도덕적으로 수
호되고 있는 사회의 주류적인 가치관 일부일처제이다. 이 책의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이러
한 가치에 대해 반동적인 존재들이다.
헤라와 반대되는 인물로는 아프로디테를 들 수 있다. 아프로디테는 성애의 상징으로 평등하
고 개방적인 다자연애를 대표한다. 다부다처제의 표상 아프로디테. 풍요와 다산의 상징이기
도 하고, 그 이름값을 하듯 자신과 결혼한 남편뿐만 아니라 다른 남신(男神)들과도 관계를
맺고 아이를 낳았다. 제우스의 전령이자 교역의 신인 헤르메스와의 사이에서는 남성성과 여
성성을 모두 가진 헤르마프로디테를 가졌는데, 이 동성구유 신은 "여성의 오르가즘이 남성
보다 삼백 배나 더 강렬하다"는 이야기를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 외에도 아프로디테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와의 사이에서 결혼의 신 히멘을 낳았다고 한다.

로라는 물론 아이를 가지지는 않았지만, 자유로운 성애의 상징으로 개방적인 다자연애를 하
는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점에서 아프로디테와 유사하다. 로라라는 캐릭터의 모티브가 아프로
디테가 아닐까 생각 될 정도이다. 아프로디테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일단 예쁘다. 그리고 섹
시하다. 또 야(野)하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남자와의 섹스라면 유부녀는 짝이 있든 마다
하지 않고 즐긴다.
아프로디테가 미의 상징이듯, 그녀는 남자가 욕망하는 대상 그 자체이다. 그 덕에 주변에
는 남자가 줄을 선다. 섹시한 장미화랑의 그녀 로라. 마초적인 입장에서 보면 그녀는 소위
“걸레”겠지만, 아는가? 마초적인 열망을 품은 사람일수록 실은 이런 여자를 꿈꾼다는 것
을. 누구에게도 소유되지 않는 여자. 하지만 너무나 섹시하고 예쁜 그녀.
그녀와 남자들이 하는 섹스는 하는 행위나 하는 상황이나, 남성들의 성적 판타지를 자극하
는 내용이다. 남산타워 밑에서 차를 세워놓고(그것도 운전기사가 앞에 멀쩡히 있는데!)하는
카섹스는 판타지의 극치이다. 운전기사에게 보이고 있다는 점(실제로 운전기사가 볼 수는 없
겠지만 운전기사가 둘의 섹스를 의식한다.)이 노출욕망을 자극한다. 로라가 명목상이나마 유
부녀라는 것도 욕망을 자극한다. 좁은 차안에서의 서로를 탐닉하고 있다는 것이 또 욕망을
자극한다. 그녀는 남성들이 꿈꾸는 성적 판타지의 결정체이다.
그러나 그녀는 현실에서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로라라는 캐릭터의 존재 의의가 이 소설
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성적 자극을 주고,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키는 역할을 할 뿐이라고 생
각된다. 그녀는 상상 속에서만 존재할 뿐. 단지 소설 속에서 우리의 욕망을 채워주는 하나
의 판타지이다.
현실의 우리와 더 가까운 것이 명희와 미라이다. 판타지는 현실과 거리가 멀기에 판타지
일 것이다.

<명희 : 억압된 욕망>

명희는 못생겼다는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실제로, 소설에서의 그녀는 로라 보다 덜 섹시
하고 덜 야(野)하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점은 그녀가 성적매력이 없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적인 매력을 자신의 쾌락과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명희는 로라에 대한 콤
플렉스로 인해 자신의 성적인 본능까지 잠가버린다. 초기의 로라에 대한 그녀의 질투와 천민
에 대한 집착은 신경질 적이기까지 하다.

“…전 선생님의 눈길이 아까부터 언니한테로 더 쏠려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구요.”
“…제가 좀더 여쭤볼게요. 내가 정말 예뻐보이나요?”
“아무튼 선생님은 절 사랑해 주셔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전 파멸이에요.”

그녀의 집착적인 모습과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는 대중매체에 짜 맞춰진 미인들에게 외모 콤
플렉스를 느끼고, 자신의 성적인 매력을 억눌러버리는 많은 한국 여성들을 연상시킨다. 많
은 한국 여성들은 자신이 못생겼다고 생각하므로, 당연히 자신의 매력을 드러내는 일에 자신
감이 없어지고, 성적인 욕구는 있지만 성적인 욕구를 발산시키지 못하기에 결국 자신의 욕망
을 억누르는 경향이 있다. 명희는 그러한 현대의 한국 여성들을 대표하는 존재이다.
그녀들은 사랑하고 싶고, 섹스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 왜? 자신
이 못생겼다고 생각하니까. 로라는 외모적인 예쁨과 섹시함이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하
지만 어떤 여성도 로라만큼 섹시하거나 야(野)하지 못하다. 로라는 그야말로 남자들의 성적
판타지의 결정체, 이상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럼 로라 보다 못한 여자는 전부 야(野)할
수 없는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뿐이다.

“그녀는 대체 앞으로의 긴긴 날들을 어떤 모양새로 살아나가게 될까…. 만약 아주 늙어버
린 후엔…. 그리고 돈 없이 가난하게 살아가게 되는 경우라면….
나는 이런 생각에 잠기며 명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것은 또한 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
는 것이기도 했다.”

명희의 이런 모습은 억압된 여성의 욕망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억압된 남성의 욕망을 상징
하기도 한다. “…그것은 또한 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여성과 마찬가지
로 남성에게 요구되는 적절한 사회적 지위나, 혹은 돈, 혹은 젊음이 없어지더라도 지금처럼
이렇게 야(野)할 수 있을까? 사회적으로 여성에게 요구되는 젊음과 미모는 남성에게는 사회
적 지위와 돈이다. 현실에서 섹시하고 야(野)하고 색스럽게 살아가기 위해서 여자는 젊음과
미모, 남자는 돈과 사회적 지위가 필요하다.
물론 명희는 자신의 콤플렉스를 극복해 나가고, 자신의 성적인 권리를 되찾는다. 그러나 언
제까지 갈 수 있을까. 로라라면 몰라도, 명희라면 시간이 흐르고 명희의 성적인 매력이 떨어
지게 되는 날이면, 명희는 다시 외모 콤플렉스와 조울증에 시달리며 살아가게 되지 않을까?

명희라는 캐릭터를 보면서 나는 고민에 빠진다. 우리의 성적인 매력이 없을 때 우리는 우울
하게도 ‘오랫동안 같이 늙어가’며 정을 쌓아야 하는, 담백한 두부를 먹는 것 같은 사랑을
해야 하는 것일까?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그런 가정적이고 사회적으로 기능적인 소위 정상적
이라는 사랑과 삶은 신기루인 것일까?

<미라 : 현실의 현실>

미라는 작중 비중이 큰 캐릭터는 아니다. 후반부 <삶보다는 돈>과 <그저 그런>에 등장하는
캐릭터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동생을 염려하는 통속적이고 모범적인 ‘누나’인 캐릭터
이다. 출판사 직원인 미라는 돈 때문에 G사장의 아버지와 결혼한다. 「로라」에 어울리
지 않는 느낌을 주는 캐릭터로 작중에서도 다른 캐릭터들과 융화되지 못하고 겉도는 모습을
보인다.
마치 통속적인 드라마처럼, 좋게 말하면 그녀는 현재의 욕망을 버리고 미래의 욕망을 선택
하고, 나쁘게 말하면 돈 때문에 팔려나간다. 가족, 특히 동생을 위해 희생했다고도 볼 수 있
다. 작가가 인위적인 결말을 위해 등장시킨 작위적인 캐릭터 같기도 하다. 실제로 그러나 그
녀는 현실의 현실, 현실보다 더 가까운 현실상이다.
그녀의 판타지는 얕고 짧다. 아니, 거의 없다시피 하다. 이는 소설 전반에 흐르고 있는 로
라라는 캐릭터의 판타지와 극명하게 대비된다. 잔인한 현실을 들먹이며 끝을 맺고 있는 소설
의 결말을 유도하는 역할을 한다. 즉, 「로라」라는 소설의 판타지로부터, 결말을 맺고 다
시 현실의 우울함으로 빠져나오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미라의 역할이다.

현실은 잔인하다. 굳이 경제학을 들먹이지 않아도, 우리는 현재의 쾌락을 미래의 쾌락과 바
꾸며 살아가고 있다. 기회비용이라는 이름의 잔혹함… 누가 그녀를 욕할 수 있는가? 그녀는
단지 미래의 쾌락을 위해 현재를 희생시켰을 뿐인데.
그러나 아무리 봐도 그녀의 캐릭터가 매력적이지 않다. 가장 현실적인 캐릭터가 가장 부정
적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은 이 소설의 작가가 추구하고 있는 문학, 문학이란 ‘욕망의 배
출구, 카타르시스의 장’의 기조에 반하는 캐릭터라서가 아닐까.

<세 여자속의 선택>

만약 내가 소설 속에 살고 있는 인물이라면, 그리고 누군가의 삶을 선택할 수 있다면, 나
는 당당히 로라의 삶을 선택할 것이다. 로라는 권태 속에 사는 여자이다. 그러나 권태 속에
서의 구원이 섹스뿐이라고 해도, 섹스뿐이라니 얼마나 좋은가? 그녀가 보여주는 판타지, 판
타지 그 자체인 그녀, 속이 훤히 비춰지는 옷을 입을 수 있는 자유, 섹스하고 싶은 사람과
섹스 할 수 있는 능력, 섹스 후에도 별다른 트러블 없이 또 다시 자신이 원하는 누군가와
섹스 할 수 있는 자유가 난 부럽다. 갈구하지만 현실에서는 끝내 채워지지 않을 욕망. 권태
속이라도 끝없이 섹스로 욕망을 채울 수만 있다면, 이 삶이 현실에 얽매인 삶보다는 오히려
행복하지 않을까?
그러나 우울한 현실로 돌아오면 다르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현실보다 더 잔인한 조건에
의해 욕망을 제한 당한다. 사랑하는 사람, 공인되어 있는 연인과 섹스를 할 때에도 임신의
두려움을 안고 섹스 해야 하고, 다른 여자와 섹스 할 때에는 지나온 삶에서 배워온 도덕률
에 따라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 결정적으로 내 잘나지 못한 능력 때문에 나의 성적 판타지
는 끝내 충족되지 않는다. 선택은 로라이지만, 현실 속에서 부자유의 콤플렉스를 안고 사는
나는, 명희와 더 가까운 캐릭터인 것 같다.
늘 이런 자극적인 소설의 끝은 허무했다. 그러나 허무하지만 늘 당연하게 여겨온 귀결로 이
어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이 소설이 훈계조로 단순히 섹스와 욕망의 허무함
을 말하고 이제 그것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투로 말했다면, 나는 당장 읽기를 포기했을 것이
다. 섹스는 허무하다면서, 오늘도 내일도 사람들은 섹스를 한다. 알고 있지 않는가? 우리의
권태를 채워주는 것은 사랑과 섹스가 아닌가.
명희는 로라를 꿈꾸면서 사람들 사이를 헤맨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로라를 꿈꾸면서 명희
처럼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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