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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다 - 카르멘 라포렛 탄생 100주년 기념판
카르멘 라포렛 지음, 김수진 옮김 / 문예출판사 / 2021년 7월
평점 :
스페인 문학은 거의 접해본 적이 없는 듯하다. 생경하지만 스페인 내전 뒤의 한 가족의 이야기라는 구도가 궁금증을 일으켰다. 이 한 권으로 소설계의 거목으로 성장했다는 저자의 연혁도 호기심을 자극했다.
주인공 안드레아가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고자 바르셀로나로 오는 첫 장부터 생경함은 이미 사라진다. 고아인 처지에 사촌언니와의 불편한 생활을 청산하고 도시로 오면서 안드레아가 품었던 찬란한 꿈과 희망은 외갓집의 관 같은 침상을 바라보며 점멸한다. 겉으로는 가정부도 있고 집도 크고 넓지만 전쟁의 잔재가 얼마나 길고, 얼마나 은근하게 사람에게 흔적을 남기는지 외할머니를 비롯한 이모와 삼촌들의 히스테리적 행동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순종과 신앙심, 순결을 강요하는 이모와 예술가적인 기질만 다분하고 재능은 부족한 후안삼촌, 사람들을 통제하고 억압하는데 익숙한 로만삼촌, 어딘가 모자란듯하면서 영악한 외숙모는 삼촌들에게 얻어맞고 희롱당하는게 일상이다. 얼굴만 마주하면 서로 입에 담지도 못할 욕을 하며 신체적인 위협을 가하는 자식들을 보며 외할머니는 이미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다.
내전으로 모든 것이 뒤틀려버린 가족들의 악다구니 속에서 안드레아는 나름 대학생활에 충실하면서 다른 인생을 살아보려 한다. 대학에서 만난 부잣집 딸 에나와의 우정에 매달리시다시피 하는 안드레아의 심정은 절절하기만 하다. 변화와 새로움을 받아들일 수 없어 안드레아를 감시하고 고립시키는데 골몰하던 이모가 끝내 수녀원으로 떠나고 외숙모가 세간을 하나 둘 팔면서 집안은 점점 더 휑해지고 무너져 간다. 타인의 감정을 우습게 여기던 로만삼촌이 도리어 감정에 휘둘리게 되며 자기 자신을 해치게 될 때 안드레아는 다시 새로운 여정을 떠난다.
책을 읽는 내내 안드레아가 되어 욕설과 폭력이 난무하는 그 가족 사이에 서 있는 듯 한 착각이 들 정도로 내용은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넘친다. 실존주의 문학이라는 명성에 걸맞다.
집 안은 조용하고 아늑한 날들이 없다. 항상 누군가가 자신을 주시하는 것 같고 비명소리는 어느 순간 귓가를 때리고 춥고 배고픈 날이 허다하다. 황폐한 도시의 축소판이다. 내전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더 큰 전쟁이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다. 실제로 2차 세계대전이 목전이다.
처음에는 밑도 끝이 없이 가시 돋친 말을 쏟아 붓는 등장인물들을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내전을 겪은 그들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이 사회의 가장 기본적이고 작은 단위라는 전제하에 그들의 울분이 가족을 향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말이다. 안드레아가 본 가족이 외가를 제외하고는 상류층뿐이라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부자와 서민의 상반된 삶은 스페인내전이 촉발한 계기인데 결과적으로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도시에서의 환한 미래를 열망했던 안드레아는 이 곳에 아무것도 없음을 아무것도 얻지 못했음을 인지하지만 에나가 내민 손을 잡고 다시 다른 도시로 가기로 한다. 희망과 절망은 교차적이고 한 번의 희망과 절망을 거쳤으니 이번에는 희망 차례라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스페인 문학사에 위대한 작품으로 꼽힌다는 소설답게 많은 생각이 든 독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