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차가운희망보다뜨거운욕망이고싶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
-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 - 청년 김원영의 과감한 사랑과 합당한 분노에 관하여
김원영 지음 / 푸른숲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김명철 씨가 쓴 『북배틀』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거기에 나오는 말이다. “책이란 독특하고 참신한 주장을 담고 있어야 한다.” 맞는 말이다. 남의 생각들을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뜯어다 붙여 만든 책은 환경만 파괴하는 것이다. 그런 책을 만들려고 아까운 나무를 잘라야 하겠는가.
독특하고 참신한 주장. 이 점에서『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는 가치 있는 책이다. 책을 쓴 김원영은 골형성부전으로 지체장애 1급을 받은 장애인이다. 책을 처음 접하는 순간 스치는 생각은 장애인의 장애 극복기, 장애인의 성공담, 뭐 그런 것이었다. 책장을 넘겨보면서 책의 첫인상은 온데간데없어졌다. 서울대학교 로스쿨에 재학 중인 김원영은 한편에는 좋은 직업, 좋은 학벌, 매력적인 외모로 세상의 중심에 서 있는 동료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장애, 질병, 가난으로 소외받는 동료들이 있다. 지은이는 양쪽 부류와 교류하면서 고민한다. 장애인권연대사업팀에 들어가 장애인에 대한 잘못된 사회인식을 바로잡아 보려 한다. 하지만 두 부류는 결코 섞여서 교류하며 살 수 없다는 현실을 결국 인정한다. 장애인은 정상인과는 경계선을 긋고 사는 사람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장애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시력이 좋지 않은 사람, 말을 더듬는 사람, 건망증이 있는 사람, 위장병이 있는 사람, 당뇨가 있는 사람 등등 사람들은 저마다 부족함을 살아간다. 완벽하지 않음. 그것이 인간이다. 부족한 자리에서 부족함을 메우고 보완해 나가는 과정이 인생이 아닐까.
칸트는 자유라는 개념을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것으로 정립했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지는 것, 해가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지는 것, 이런 것이 자연의 순리이다. 또한 밥을 안 먹으면 배가 고파져서 음식을 먹는 것, 피곤하면 졸음이 몰려와 잠을 자는 것, 이런 것이 자연의 순리인 것이다. 칸트가 말하는 자유는 배고파도 먹지 않는 것, 피곤해도 자지 않는 것으로 자연의 순리에 거부해 자신의 의지를 불태우는 것을 말한다. 휠체어 없이는 한 발짝도 못 움직이는 1급 장애인, 근육이 점점 오그라들어 서서히 죽음을 맞는 희귀병 환자 같은 사람들은 자연의 순리대로라면 세상에 나서지 못하고 방안에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다가 생을 마감해야 한다. 지은이는 자연의 순리에 눌리지 말고 자유의 의지를 불태워 자유를 실현할 것을 권한다. 주저앉아 있지 않고 세상과 마주한 사람, 세상을 겪고 관찰하며 나름의 세계관을 세운 사람, 뭐 이런 걸 책을 읽으며 느낄 수 있었다. 독특하고 참신한 세계관, 인간관을 볼 수 있어서 읽는 동안 가슴 찔리도록 부끄럽기도 했고,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지는 것 같아 흡족하기도 했다.
이만교 씨가 쓴 『글쓰기 공작소』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글은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쓸 때 빛이 난다.” 자신을 속이고 치장하고 꾸미려고 하는 순간 책은 진실성을 잃고 빛을 잃는다. 거침없이 솔직한 이야기. 그런 점에서 김원영의 책은 빛이 난다. 지은이 김원영은 참으로 당당하고 솔직하게 말한다. 또한 진지하면서도 유머스럽게 말한다. 지은이의 유머에 웃으면서도 마음이 숙연해진다. 그 유머로 오히려, 우리 사회가 장애인을 대하는 현실을 더욱 뼈저리게 고발하기 때문이다. 책에 나오는 구절을 살펴보자.
“휠체어를 타고 난생 처음 혼자 서울 시내로 나와 지하철을 타게 되었다. 바삐 오가는 사람들로 붐비는 2호선을 타고 누군가를 만나러 이동하는 중이었다. 엄청난 인파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들은 좁은 시장 골목으로 자동차를 끌고 오는 사람을 쳐다볼 때의 얼굴에 안쓰러움을 더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누군가는 내 머리끝에서 휠체어 바퀴 끝까지를 훑어보았고, 누군가는 왜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 굳이 나왔느냐는 말을 금방이라도 할 것 같은 눈빛을 보냈다. 복잡한 사람들의 무리 속에서 1미터쯤 아래에 있던 나는 그런 시선을 피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렇게 몇 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인파를 헤치고 한 할아버지가 다가왔다. 내 앞에 선 할아버지는 천천히 주머니를 뒤지더니(나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꼬깃꼬깃 구겨진 천 원짜리 지폐를 한 장 꺼냈다. 내 불길한 예감이 서서히 들어맞는 듯싶더니 할아버지는 이내 내 손에 그 지폐를 꼭 쥐어주었다. 내 얼굴은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구겨진 지폐에 그려진 퇴계 선생의 기다란 눈동자가 세상 사람들의 모든 시선을 흉내 내는 것만 같았다. 할아버지는 좌절하지 말고 열심히 살라며 어깨를 두 번 두드렸다. 나는 좌절했다.“
“지하철 계단에는 휠체어 리프트라는 기계가 있다. 이 기계는 중학교 1학년 음악 교과서에 나오는 <즐거운 나의 집>을 배경음악으로 초속 3센티미터 정도의 속력으로 이동한다. 만약 누군가가 “사람들의 시선을 이겨내는 훈련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면, 나는 지체없이 이 기계를 체험해보라고 추천할 것이다. 이 기계에 탑승하는 순간 우리는 주변의 거의 모든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체험에 성공할 것이다.“
영화 장면을 보는 것만큼 선명하게 눈앞에 떠오르게 하는 장면 묘사, 내가 주인공이라도 된 것만큼 가슴에 와 닿게 하는 심리 묘사, 그 장면과 심리가 합쳐져 우려내는 웃음, 웃기면서도 웃지 못하게 하는 무거운 현실과 아픔, 뭐 이런 것이 드러나지 않는가.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펜 가는 대로 내려 쓴 수필 같지만, 그 속에 사회학도 있고, 철학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