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 천재 고려 - 최강대국에 맞선 작은 나라의 생존 전략
이익주 지음 / 김영사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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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서평단에 선정되어 출판사로부터

도서만 협찬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미국과 중국, 일본 우리나라를 둘러싼 강대국들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있어왔고 지금도 그 틈바구니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국가를 유지하며 살아오고 있다. 거기에 교통과 통신의 발달은 세계 여러나라와의 관계를 더 가깝게 만들어 그야말로 다원적 외교를 해야하는 세상이 되었다. 이전의 조선왕조는 다원적인 외교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물론 왜나 유구 등과 교류가 없지는 않았지만 중국의 명이나 청나라와의 외교를 중시하는 일원적인 외교를 한 것으로 저자는 보았다. 하지만 조선 이전의 고려에서는 송으로 대표되는 한족의 중국왕조와 함께 북방민족들의 나라인 요, 금, 원과의 다원적인 외교가 있었다는 것이다.

비교적 최근에 조명받은, 이 책에도 나오는 광해군의 중립외교 이전에 우리 역사에서 대표적으로 외교하면 떠오르는건 바로 고려시대 서희의 담판과 그로인해 얻게 된 강동6주였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점은 첫 번째로 외교에서도 명분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소손녕이 고려를 신라에서 시작된 나라니까 고구려가 가진 땅을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의 요나라가 가져가겠다는 주장을 서희는 고구려의 후예가 고려이고 국명에서도 보인다는 명분으로써 막아내는 것이다. 실리는 중요하지만 명분없는 실리는 무법과 같은 것이라 모두가 명분없이 실리만 차릴 수는 없다.

두 번째로는 힘이다. 거란의 3차 침입이 계속되었지만 강감찬 장군은 귀주대첩으로 승리한다. 하지만 이후에 고려는 먼저 거란에 사신을 보내 책봉-조공관계를 이루게 된다.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기는 했지만 이렇게 외교관계를 이루지 않았다면 고려는 거란의 침입을 계속 받아서 국력이 쇠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가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는 힘을 보여줌으로써 거란으로 하여금 고려가 만만한 나라가 아니라는 생각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여진의 금나라 시기에 내용은 좀 다른 생각이다. 윤관의 동북9성을 돌려준 것을 고려가 외교를 잘한 것처럼 포장했지만 실제로 남쪽에서 몇만호를 이주 시켰고 많은 투자가 있었을 것인데 결국 여진의 등쌀 못이겨 실패한 정책이었을 뿐이지만 그것을 마치 고려가 여진이 강해질걸 예측해서 돌려준 것처럼 말하는건 좀 아닌거 같았다. 단지 그 땅을 돌려주어 여진족이 고려에게 억하심정을 덜 드러낼 수는 있겠지만 결과론으로만 본 내용이다. 책봉되는 과정에 긴장감은 있었지만 별탈없이 형제관계, 군신관계로 넘어가는 과정이 보여진다. 사실 외왕내제의 고려가 번국으로 삼던 여진족인데 상국으로 모시는건 흑역사일 수도 있다. 고려의 외교가 정말 뛰어났다면 거란을 끌어들여 함께 강해지는 여진족을 치는게 좋았을 것이다.

몽골의 침입이 시작되면서 고려의 외교력이 보여진다. 공물의 양이나 인질요구, 국왕의 친조요구 등에서 몽골의 침입을 버티면서 조건들 하나하나를 분리하여 완화시키는 협상력을 보인 것이다. 결국 국왕의 친조는 태자가 가는 것으로 완화되었고 훗날 원종이 되는 태자는 몽골로 갔다가 몽골의 몽케 칸이 죽고 그 동생들인 아릭부케와 쿠빌라이가 대립하는 와중에 쿠빌라이와 만나게 된다. 태자가 쿠빌라이쪽에 붙는 것은 우연일 수도 있고 태자의 선택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쿠빌라이가 몽골의 칸이 되면서 대박을 터트리게 된다.

쿠빌라이칸은 고려에 풍속을 유지시켜주었으며 고려의 태자와 몽골의 공주를 결혼 시켜 고려가 몽골의 부마국이 되게 되었고 고려의 국왕은 몽골의 부마로써 몽골의 정치에도 개입이 가능하게 되었다. 쿠빌라이와의 합의는 '세조구제'라는 이름으로 고려의 국체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다루가치의 설치는 막아도 고려국왕 책봉을 막지는 못하여 이후에도 몽골에 의해 고려의 국왕이 폐위되거나 복위하는 일이 벌어진다. 특히 충선왕은 고려에 개혁정치를 하려하고 원나라에서도 권력자가 되었지만 세조구제의 고려의 제도를 원나라식으로 고치려하는 등의 일도하고 원나라 내에서의 권력다툼으로 고려국왕은 자주 폐위와 복위가 되거나 고려를 원나라에 넣으려는 입성책동 등의 일이 벌어지기도 하여 명암이 있었다고 하였다.

고려에 원나라와 가까운 자들이 생겨나면서 친원파라는 원나라의 위세를 업고 나라를 어지럽히는 세력이 나타났다. 고려 출신으로 원나라의 2황후가 된 기황후와 그 일족이 친원파로써 횡포를 부리고 있었는데 당시 원나라의 부마로 왕위에 오른 공민왕은 한족 농민반란 등의 소식을 접하고 친원파를 처단하여 원나라에 반기를 들게 된다. 이후 고려의 관제를 복구하고 세조구제를 폐기하여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러나 홍건적의 침입으로 고려는 다시 원에게 손을 내밀지만 원은 고려 국왕을 교체하고 기황후의 일족을 원자로 세우려 하는 위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고려는 이를 거부하고 원나라가 보낸 군대를 최영과 이성계가 격파하여 원나라 황제의 사과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명나라가 들어서면서 고려는 원과 단절하고 명나라와 책봉 조공 관계를 맺지만 이는 명나라가 고려를 얕잡아보고 무리한 요구를 하게 만들고 고려는 이에 끌려다니게 되었다고 한다. 공민왕이 피살되고 우왕 때 고려가 북원과 책봉 조공관계를 회복하려하자 명나라도 우화적인 모습을 보이고 다시 고려는 명과의 관계개선에만 매달리게 된다. 저자는 고려의 이런 외교를 신진사대부가 실리가 아닌 명분에 입각한 가치외교와 한족 사대주의로 이루어진 실패한 외교로 보았다. 공민왕이나 신진사대부가 원나라로부터 벗어나려고 한 것은 이해가 가지만 명나라에 너무 목맨 것은 확실히 명분이 실리를 잡아먹은 셈으로 보인다. 이게 고려 말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내내 이어졌다는게 더 문제같다. 책에 잠시 언급된 광해군시기와 호란시기에도 성리학자들이 명분가치만 생각하지 않았다면 적어도 호란을 두번이나 겪지는 않지않았을까 싶다.

이처럼 지금과 비슷한 다원적 세계에서 외교를 했던 고려 외교의 성공과 실패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현재 어떻게 외교관계를 이어가야하는지 생각할 수 있던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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