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카인드 - 감춰진 인간 본성에서 찾은 희망의 연대기
뤼트허르 브레흐만 지음, 조현욱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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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인간이 위기의 순간에 선한본성에 의한 연대와 협력을 통해서 이기적인 유전자가 아닌 이타적인 부분을 통해서 역사를 이루어 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저자는 인간은 본래 선하다는 설교자의 입장이 아니고 인간은 좋은 점과 좋지 않은 점을 모두 갖고 있는 복잡한 존재이지만 어느 쪽을 보여주고 싶어하는가에서는 좋은 면을 강하게 선호하며 인간본성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현실적이라는 가설을 증명하려 한다. 

하지만 저자의 예들은 그다지 좋은 선택같지 않았다. 그가 든 첫번째 예는 영국과 독일에 2차대전 폭격에 대한 것인데 먼저 상대를 죽이기 위해 폭격을 한다는 점부터 생각해보자. 물론 인간들이 패닉과 우울에 빠져 사기저하가 올 것이라는 예상은 빗나갔지만 서로 돕고 빠른 회복을 하는게 과연 선한 본성때문인지, 전체주의적인 생각에 의한 서로돕기나 복수를 위한 회복은 아닌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저자는 파리대왕이나 이기적 유전자가 당시의 시대적 사조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의견을 내었다. 이는 매우 흥미롭다. 하지만 파리대왕의 실제를 찾기전에 15소년표류기같은 작품도 있다는 걸 생각하자. 15소년표류기는 파리대왕보다는 더 나이든 애들이 나오고 배의 기구와 총들을 갖고 있었지만 그렇다해도 청소년들이 문명세계에서 벗어나 섬에서 그런대로 괜찮은 공화적 사회를 이루고 산다는 점에서 파리대왕과는 다르다. 

은여우를 가축화하는 부분은 흥미롭다. 그리고 가축화되면서 외형의 변화와 친화성으로 사회적 학습능력이 높아졌다는 부분도 흥미롭다. 그러나 여전히 네안데르탈인이 단지 빙하기의 온도변화로 얼어죽었다는 가정은 부실하다. 네안데르탈인은 불도 사용할줄 알았다. 친화성을 가진 인간이 반드시 온세상에 선하진 않았을거다. 네안데르탈인을 죽인 용의자로써의 호모 사피엔스는 여전히 1순위로 보인다. 

저자는 다시 옥시토신을 언급하면서 낯선사람에게는 더 혐오감을 가지는 효과가 있다고 말한다. 이런 주장은 일면 네안데르탈인을 멸망시킨 이유로 은근슬쩍 넣은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저자는 다시 킬러유인원설을 논박한다. 하지만 이것도 비슷하게 논박이 가능한거같다. 지금 알 수 있는 유목이나 수렵채집 종족들이 문화인류학자나 다른 문명과의 접촉을 통해 오염되었다는 주장은 물론 괜찮다. 그런데 사실은 그 수렵채집종족은 오염되지 않았다면 과연 완벽하게 원시인류를 대신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여태까지 수렵채집을 존속하고 있다면 그들은 적어도 주류는 아닌 아웃사이더라고 봐야한다. 인적이 드문 곳으로 도망친 겁쟁이거나 패배자들의 후손일 수도 있다. 그들의 풍속이 물론 원시인류와 비슷할수도 있지만 완벽히 같다고 보기도 힘들지 않을까?

어쩔 수 없는 망나니를 부족 전체가 살해하는 것은 공공의 선이니 선한 본성일까? 꽤나 궁금하다. 여기서도 재밌는건 망나니를 살해하는 일부와 죽은 후 그에게 창을 꼿는 나머지다. 망나니와 전사라고 할만한 살해자들만이 문제일까? 이쯤에서 전에 본 책에 나온 사이코패스가 생각났다. 사이코패스의 성향은 사실 원시사회에서 조직을 이끄는 전사나 리더의 그것이라고 해석한 부분이 있다. 그들은 좀 더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잔혹한 손속을 지녀야할 때가 있어야했고 그래서 그러한 성향의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사이코패스의 본성은 악인가?

저자는 이스터섬의 잔인한 전설들을 반박해낸다. 그것은 모두 섬을 방문한 학자들이 지어낸 것일뿐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하지만 이스터섬의 주민들이 줄어드는 이야기는 선한 본성과는 차이가 있다. 뭐지? 이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듯한 느낌...

저자는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여러 심리실험들,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 밀그램의 전기충격실험, 캐서린 제노비스 사건의 방관자 효과 등이 사실은 조작되거나, 강요, 왜곡에 의한 것임을 밝혀준다. 그럼 이걸 왜곡하는 심리학자와 언론은 어떻게 봐야할까? 생각되었다.

저자는 전쟁에서 병사들이 싸우는 것은 이데올로기나 사상보다는 용기와 충성심, 연대의식, 전우애 등으로 벌어진다고 한다. 사실 이전에서 저자는 2차대전에서 총을 거의 쏘지 않아 총으로 인한 사상자는 적고 폭탄으로 사망자가 많았다고 하고 이를 그들의 선한 본성이 싸움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저술했다. 내가 듣기로는 세계대전이 참호전이었기때문에 총을 마구 갈겼고 어쩌다가 맞은 자들만 사상자가 된 것으로 들었는데 어느쪽이 맞는진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동양에서는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은 거의 확실하다. 그런데 역시나 저자가 바로 직전에 아돌프 아히이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사실은 그가 나치의 신봉자가 맞았고 재판에서 거짓연기를 한것이라고 했는데 아히이만이 나치를 신봉해서 전쟁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면 독일병사들에게 그것이 적용불가능했을까? 하는 의심이 든다.

저자는 권력자의 뇌가 뇌를 다친 사람과 유사하다며 후천적 소시오패스로 명명한다. 권력자가 되는 길에서 그들은 누구보다 용감하고 친절하지만 권력자가 되고나면 바뀌는 것에 어떤 이유를 부여해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성군과 훌륭한 정치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까? 왜 그들은 변하지 않았을까?

이제 저자는 인간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얼마나 성공적인지를 보여준다. 요스 드 블록의 가정건강돌보미 조직인 뷔르트조르흐, 자동차 부품회사인 프랑스의 파비, 네덜란드의 대안학교 아고라, 베네수엘라 토레스 등에서 실시된 시민 참여 예산, 알래스카의 공동재산 운영, 노르웨이의 교도소, 남아공 만델라의 선거, 1차대전 크리스마스의 기적과 콜롬비아 게릴라반군을 막은 광고이야기 등이다. 

독특하게 느꼈던 점은 저자는 공감이 세상을 비추는 선한 태양이 아니며 제한적인 스포트라이트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공감은 우리 주위의 것, 내가 느낀 것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지만 그외의 부분에서는 알 수 없게 때문에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공장식 축산 농장에서 학대당한 동물을 먹으면서 기르는 귀여운 강아지에게 공감하는 모습은 내가 생각했던 부분이라서 매우 동감했다. 그러므로 공감보다는 연민을 느끼는 편이 낫다고 저자는 말한다. 

여러가지 성악설적인 이야기나 심리학적 실험을 논박하는 것도 필요했겠지만 인간의 본성이 악하냐 선하냐를 논할 때 이쪽과 저쪽 모두가 공격당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나는 오히려 인간의 선하고 긍긍적인 부분을 강조한 여러가지 예를 더 많이 싣는게 훨씬 더 좋았을거라고 생각되었다. 사실 아직도 인간이 선한지 악한지에 대해서는 한쪽으로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선하고 긍정적으로 보는게 매번 좋은 결과를 가져오리라 생각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인간의 본성이 선과악, 이타와 이기를 모두 가진 복합적인 존재라고 본다면 지금의 여러 현상들을 더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은가 싶다. 그러나 한가지 저자의 말이 옳은 것은 인간이 선한 것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호모퍼피라며 인간이 은빛여우와 같이 스스로에게 친화적이 되어 친절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사실 나는 그냥 이것이 사회성으로 그런게 아닌가 생각한다. 뭐 결말은 비슷하지만 퍼피는 아니란거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성이 꼭 본성과 연결이 되는가에는 깊은 의문이 있다. 우리는 위선이라는 개념을 알기때문이다. 인간은 자연상태에서 다른 포식동물들에 비해 약한 편이기에 서로 도와야했다. 설령 서로 마음에 안드는 부분이 있더라도 말이다. 그렇더라도 돕지않으면 모두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친절을 가장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고 본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어떤 마음으로 친화적이고 선했던지 간에 선한 마음을 유지하고 선하기를 원한다면 인간의 사회에서 그것은 사회유지를 위해 필요한 것이고 인류 전체적으로 긍정적인 부분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인간의 선한본성을 추구는 하되 완전히 믿지 않기에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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