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를 낳는 것은 얼굴에 문신을 하는 것이다.”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속 대사이다. 아이를 낳은 후에는 출산 전의 삶으로 결코 돌아갈 수 없으며, 출산이 여성의 삶에 주는 변화는 너무나 확연하기에 그만큼 확신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말은 갓난아기를 키우고 있는 초보 엄마가 아기가 없는 여주인공에게 건넨 명언이다. 얼마 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자기 자신을 찾겠다며 이탈리아, 인도, 발리로 1년 동안 여행을 떠난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니, 그것도 1년씩이나! 그야말로 ‘얼굴에 문신하지 않은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지 않은가. 영화를 보는 동안 여행을 결심한 여자 주인공이 앞으로 무엇을 발견하고 알아가게 될까 하는 데에는 큰 관심이 가지 않았다. 영화 초반부터 ‘마음껏 여행 다녀서 좋겠다’라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딸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여행이라고 생각했던 친정아버지 덕분에 나는 어려서부터 이곳저곳 꽤 많은 곳을 다녔다. 그런데 슬프게도 임신하고부터는 여행을 통 할 수 없었다. 임신 초기와 중기에는 건강상의 이유로, 그리고 후기에는 논문을 마무리하느라 가까운 곳으로의 여행도 쉽지 않았다. 아기가 태어난 후로는 감히 떠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아기를 데리고 여행을 가자니 내가 너무 고생스러울 것 같았고, 그렇다고 부모님께 아기를 맡기고 가자니 죄송함과 걱정이 앞서서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요즘은 갓난아기를 데리고 여행을 떠나는 가족도 많이 있던데, 겁 많고 체력 약한 나 같은 엄마는 그저 그들을 부러워할 뿐이다.
대신 아기가 잠든 틈에 인슈전(尹秀珍, 1963~) 작가의 《휴대용 도시》 시리즈를 떠올리며 머릿속으로나마 이 나라 저 나라를 여행해본다.
어디로든 내 마음대로, 휴대용 도시
《휴대용 도시》 시리즈는 여러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입던 옷을 받아서 조각조각 자른 뒤, 바느질 작업을 통해 세계의 도시들로 만들어 여행가방 안에 설치한 작품이다. 도쿄의 후지산이나 상하이의 동방명주, 파리의 에펠탑,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싱가포르의 사자상과 같은 랜드마크들을 찾으며 도시 이름을 맞춰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휴대용 도시》 시리즈 작업 중인 작가 인슈전
인슈전, 《휴대용 도시》 시리즈 중 <뒤셀도르프>, 2012년
인슈전은 마오쩌둥이 중국을 이끌던 1963년에 태어났다. 그녀 세대에게 여행은, 특히 해외여행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다 덩샤오핑 집권 후 중국이 개방정책을 시작하고 중국현대미술이 국제적 관심을 받게 되면서, 인슈전 또한 작가로서 국제적 인지도가 점차 쌓여갔다.
1990년대 말부터 세계 여러 도시에서 열리는 전시에 초청을 받았던 그녀는, 그때부터 자신이 방문했던 도시들을 여행 가방에 담는 작업을 시작했다.
여행을 많이 하는 그녀는 자유로운 싱글의 몸일 것 같지만, 사실 딸아이를 키우는 엄마이기도 하다. 딸이 태어난 후로도 그녀는 쭉 세계를 돌아다니며 전시를 해왔는데, 생각해보면 작가로서 국제 미술무대에 지속적으로 참여한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지만, 어린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일 때문에 계속해서 세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엄마로서 집을 계속 비울 수밖에 없는 것은 분명 아이에게도, 엄마에게도 보통 일은 아니다.
딸의 세번째 젓가락
그래서일까. 인슈전은 2013년, 당시 열한 살이던 딸과 함께 여행하며 공동 작품을 만들었다. 동료 작가인 남편 송동(宋冬, 1966~)과 딸 송얼루이(2003~), 그리고 인슈전이 함께한 <세번째 젓가락>이다.

인슈전, 송동, 송얼루이, <세번째 젓가락>, 2013년
이 《젓가락》 시리즈는 인슈전과 송동 부부가 2002년부터 간헐적으로 선보여 온 공동 작업으로, 크기와 형태만 합의한 채 각자의 스튜디오에서 젓가락 한 짝을 만들어 함께 전시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작품이 완성될 때까지는 서로의 작업을 볼 수 없다. 그래서 개별적이면서도 통일감 있는 작품이 완성되는데, 이는 서로 다른 개인이 만나 짝을 이루는 부부의 속성을 대변한다.
<세번째 젓가락> 역시 같은 원칙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이번에는 작가가 세 명이라 젓가락이 세 개가 되었다. 딸 송얼루이가 자신도 작업에 참여하게 해달라고 부모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두 개가 한 쌍을 이루는 젓가락이기에 부부는 처음에 고민하다가, 고심 끝에 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아빠 송동은 GPS를 부착한 커다란 리모콘 모양의 젓가락을, 엄마 인슈전은 자동차에 장착하는 플루트에서 고안한 젓가락을, 그리고 딸 송얼루이는 반려견의 털을 이용하여 늑대를 형상화한 젓가락을 만들었다. 그렇게 세 개의 막대기로 이루어진 그들만의 젓가락이 완성되었다. 이들의 작품은 미국 필라델피아의 옛 저택을 개조한 체임버스 아트 갤러리에 전시되었다.
작품과 그 전시를 위해 인슈전의 가족은 함께 여행을 했다. 어디에 전시되는가, 하는 장소적 특성이 중요한 전시였기 때문에 함께 사전답사를 한 뒤, 베이징으로 돌아가 작품 준비기간을 가졌다. 그리고 또 함께 필라델피아로 건너가 작품을 설치했다.
본래 《젓가락》 시리즈가 부부 콜라보레이션에서 출발했고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는 점에서, 딸 송얼루이가 세번째 젓가락을 추가한 것은 이 시리즈의 완성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여행은 기억이 아니다
요즘 나는 인슈전처럼 딸과 함께 여행하는 꿈을 꾼다. 일곱 살 딸아이와 유럽 여행을 다녀왔다는 여행기, 초등학생 아이와 우리나라 방방곡곡을 돌아다닌 이야기, 남매와 함께 제주도에서 한 달을 체류했던 체험기 등등의 책을 읽으며 남편과 딸과 함께 갈 여행 후보지를 하나둘 꼽아본다. 이제 겨우 걸음마를 연습하는 아기이지만 조금만 더 크면 여기저기 열심히 돌아다니고 싶다. 멀리가지 않아도, 새로운 곳이 아니어도 괜찮다. 딸과 함께라면 어디든 처음인 듯 설레고 흥미진진할 것 같다.
딸의 초등학교 입학 선물로, 함께 80일 동안 유럽을 여행했던 『일곱 살 여행』의 저자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종종 아이는 기억도 못할 텐데 뭘 그렇게 열심히 데리고 다니느냐는 핀잔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저자는 아이가 무엇을 보았고 어디를 갔는지를 기억하는 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정말 중요한 것은 아이의 머리가 아닌, 마음에 차곡차곡 쌓여간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도 동의한다. 아이가 나중에 어디를 갔고 무엇을 봤는지 기억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여행의 목적은 아이와 함께 특별한 날들을 보내는 것, 손잡고 새로운 곳을 탐험하는 것, 그리고 추억을 공유하는 것이다. 그 자체로 큰 축복이다. 혹시라도 아이가 여행을 통해 평소 자신을 둘러싼 세상보다 조금 더 큰 세계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다름과 새로움에 대한 두려움을 덜어낼 수 있게 된다면, 그걸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