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동서가 아기를 가졌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축하와 함께 내가 가장 먼저 건넨 말은 지금 많이 자두라는, 조언 같지 않은 조언이었다.

 

그 말은 나 또한 친구들에게 임신 소식을 전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들었던 것이다. “그깟 잠 좀 못 자는 게 뭐 대수야라며 코웃음 치며 귓등으로 흘려들었던 그 말.

 

임신 기간이었을 때만 해도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다는 건 별로 걱정되지 않았다. 신생아는 두 시간에 한 번씩 먹어야 한다는 것, 밤낮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 따라서 엄마는 하루종일 잠을 제대로 푹 자지 못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다만 이 지식이 되었을 때의 힘겨움은 미처 알지 못했다.

 

잠을 제때 잘 수 없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 그저 힘들다, 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야속할 만큼. 이론적으로는 아기가 잠이 들었을 때 엄마도 같이 잔다면 성인의 적정 수면 양은 채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론일 뿐이었다. 나는 아기가 자는 동안이 작은 생명체가 신기해서 쳐다보느라, 또 숨은 잘 쉬고 있는지 살피느라 도통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더구나 같은 양을 자더라도 한 번에 쭉 이어서 자는 것과 몇 번에 걸쳐 끊어 자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달랐다. 하루에 서너 시간의 잠으로도 충분하다는 숏 슬리퍼short sleeper’라는 부류의 사람이 있다는데 나는 그런 종족은 아니었다. 낮과 밤의 구분 없이 아기를 먹이고 돌보는 생활은 한동안 쭉 이어졌고 피로는 매일매일 누적되었다.

 

더불어 내 일과를 내가 통제하거나 계획할 수 없다는 상실감도 육체적 피로만큼 괴로웠다. 자고 일어나는 시간을 스스로 정할 수 없다는 것은 삶의 전반에 대한 결정권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았다. 계획적인 삶의 방식을 유난히 좋아하던 나는 이를 받아들이기가, 아기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는 것이 너무나 어려웠다. 아기를 안고 밤낮으로 집안을 서성거리며 내 인생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하는 생각도 여러 번 했다. 화장실에 쪼그려 앉아 울기도 많이 울었다.

 

전공이 그림을 보는 일이라 마음을 기댈 곳을 찾고 싶어 머릿속으로 잠자는 아기와 엄마를 그린 작품을 열심히 떠올려보았지만 어느 것 하나 마땅치 않았다. 평온히 자고 있는 아기 옆에 예쁜 엄마를 그린 그림들이 몇 점 떠올랐지만 나의 상황과는 너무도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아기들은 새근새근 잘도 자고, 엄마들은 너무 행복해 보이기만 했다. 그런 그림들은 위안이 되기는커녕 내 현실을 더 보잘것없이 보이게 했다. 오히려 나는 아름다운 모자상보다 쓸쓸하고 적막한 빌헬름 함메르쇠이(Vilhelm Hammershøi, 1864~1916)의 그림 <휴식>을 보고 위로를 받았다.

  

 

빌헬름 함메르쇠이, <휴식>, 1905

 

작품 속 여인은 고개를 숙인 채 의자에 비스듬하게 몸을 기대어 앉아 있다. 휴식을 취하고 있으면서도 휴식이 필요해 보이는 여인의 두 어깨가 낯설지 않다. 겨우 아기를 재운 후 지쳐 앉아 있던 내 모습이 그녀의 뒷모습에 겹쳐 보였다. 그녀도 나처럼 나지막하게 깊은 숨을 내쉬고 있을 것만 같았다.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숨막히는 적막감은 함메르쇠이 그림의 특징이다. 차분하고 정갈한 실내 풍경 속에 인물들이 종종 등장하지만, 그 어떤 인물도 그림 속의 정적을 깨려고 하지 않는다. 함메르쇠이는 굉장히 내향적이고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작품이 화가를 꼭 닮았다. 그의 작품에서는 침묵이 만져질 것만 같다.

 

그 침묵 덕분일까.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처럼, 함메르쇠이 작품 앞에서만큼은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게 된다고 고백을 하는 관람자가 많다. 조용히 이야기를 들어주는 누군가가 있으면 쉬이 내 속마음을 이야기하게 되는 법이다.

 

 

엄마의 밤과 뭉크의 밤

 

아기가 잠든 후 모든 게 멈춘 것 같이 고요한 밤. 아기를 간신히 재운 후 몰려오는 안도감과 아기가 언제 다시 깰지 모르는 긴장감이 뒤섞인 그 밤의 무거운 공기를 기억한다. 홀로 깨 있는 적막한 어둠 속 느껴지던 왠지 모를 막막함과 쓸쓸함도 선명하다.

 

언젠가 나와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낳은 한 친구는 이런 말을 했다. 남편마저 잠든 한밤중, 혼자 아기를 재우던 중에 건너편 아파트의 어떤 창에서 새어나오는 희미한 불빛을 보았다고. 그녀는 혹시 저 집도 자신처럼 엄마 혼자서 갓난아기를 어르고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괜스레 눈물까지 났다고 회상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건너편 집의 그 빛이 그녀에게 적잖은 위로가 되었단다. 힘든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니라는 그런 종류의 위로였다. 다른 누군가도 이 밤을 그렇게 보내고 있다는 위로.

노르웨이의 화가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의 그림에도 어두운 밤의 창밖을 보는 사람이 등장한다.

 

에드바르 뭉크, <생클루의 밤>, 1890

    

 

뭉크는 자신의 아버지를 그렸다고 했지만 학자들은 이 형상이 실은 뭉크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 해석하곤 한다. 그림이 그려진 1890년은 뭉크가 유학 중이던 파리에 콜레라가 창궐해 생클루로 몸을 피한 때였다. 모든 것이 낯설었고 마음을 나눌 친구도 없었다. 그리고 이로부터 불과 몇 달 전, 뭉크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들었다. 다섯 살 때 사망한 어머니, 열네 살 때 죽은 누나에 이어 스물여섯에 또 한번 맞은 가족의 죽음이었다. 유학중이었기에 그는 고향 노르웨이에 가서 아버지의 임종을 지킬 수도 없었다. 어둠 속의 창밖을 바라보는 실루엣에는 이런 상황 속에서 뭉크가 느꼈을 고독이 투영되어 있다. 당시 그를 매료시켰던 인상주의의 짧은 붓터치를 사용하면서도, 태양의 빛 아래 시시각각 변하는 외부 세계의 인상을 포착한 인상주의자들과 달리, 달빛 아래 침체된 마음의 인상을 담은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고독한 이 남자, 아니 뭉크의 마음은 깜깜한 바다 위를 떠다니는 불빛을 쳐다보고 있다. 자신과 비슷한 이유로 불을 켜놓은 누군가에게서 위로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밤이 알려준 것들

 

수면 부족은 초보 엄마라면 모두가 치러야 할 신고식 같은 거라고들 한다. 언젠가, 신은 왜 엄마에게 이런 통과의례를 주었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 아기들이 잠투정 없이 수월하게 잠든다면, 밤에도 중간에 깨지 않고 오래 잔다면, 엄마라는 역할에 적응하기가 훨씬 수월할 텐데

 

그 시간을 통과하면서 어렴풋이 들었던 생각은, 잠과의 사투를 벌였던 날들이 나를 서서히 엄마로 빚어낸 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수면욕을 온전히 내려놓아야만 하는 그 시간을 보내면서, 엄마가 된다는 것은 나의 욕구보다 아기의 필요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임을 몸으로 처절하게 익혔던 것 같다. 한 생명을 돌본다는 것의 무게만큼 혹독한 이 훈련은 어쩌면 엄마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몸으로 배운 것, 특히 고통을 동반하며 깨우친 것은 쉽게 잊히지 않으니 말이다.

 

아빠도 더 적극적으로 이 훈련에 동참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만은 여전하지만, 어차피 받아야 할 훈련이었다면 기꺼이 맞이할 것을, 하는 후회가 밀려든다. 행복한 훈련이려니 하면서 말이다. 그랬다면 밤을 지새울 때 몸은 피곤할지언정 마음은 조금 편안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아기 때문에 잠 못 자는 날들은 긴 인생 중에 아주 짧은 시간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더라면 짜증도 덜 내고, 더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도 든다.

 

머지않아 우리 아기는 잠들 때 나의 품도, 나의 자장가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밤에 벌떡 일어나 두리번거리며 엄마를 찾는 일도, 엉금엉금 기어와 내게 코를 박고 잠드는 일도 없을 거다. 그때가 되면 아기를 뉘여놓고 잠깐 숨을 돌리던 찰나의 순간들, 작은 아기를 안고 먹색의 창밖을 바라보던 밤들마저 많이 그리울 것 같다. 그렇게 길게 느껴지던 시간들이 이제와 돌아보니 참 짧았구나 하고 그리워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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