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에 끼지 않는것이 열등함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다수에 끼지 않는것이 열등함을 의미하는 단체 생활 분위기에서, 소수의 개인은 일방적인 평가와 그것의 부산물인 오해의 대상이었다.P108
그렇다고 멀리 떠나온 것 같지도 않았다. 여전히 나는 무력하고 방어적인 회색 지대에 갇혀 있었다. 나 자신이 실망스럽고 그러다 보니 의욕이 없어 방치하게 되고, 결국 해야할 것을 제대로 못 해 무력감에 빠지고, 무력감은 쫓김과 불안을 낳고 그래서 자신감을 잃은 끝에 제풀에 외로워지고,그 외로움 위에 생존 의지인 자존심이 더해지니 남들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하고, 그러자 곧바로 소외감이 찾아오고,그것이 또 부당하게 느껴지고, 이 모든 감정이 시간 낭비인것 같아 회의와 비관에 빠지는 것, 그 궤도를 통과하지 않을수는 없었다. 이른바 청춘의 방황만이 아니었다.지난 두 달 동안 나는 내 앞의 문을 열지 못하고 번번이과거의 나로 굴러떨어지곤 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세계의 부당한 규율에 복종했던 미성년 그대로였다.P86
어떤 청춘도 기성이 됩니다 162
가장 친한 친구가 아닌 것과는 상관없이 그녀는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이다.P9
그 시절의 자신은 떠올리고 싶지 않다는 거였다. 그것은 내가 동창회 같은 데에 나가지 않는 이유와 비슷했다. 남들에 의해 소환되는 그 시절의 나도 싫었고, 그들이 알고 있는 그 시절의나인 척하고 있을 게 분명한 현재의 나도 싫었다.여러 사람과 공유한 시간이므로 누구도 과거의 자신을 폐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편집하거나 유기할 권리 정도는 있지 않을까. P18
그러나 내가 그 시절 겪었던 것은 다름이라기보다 수직적인 위계와 시비是非였다. 그때그때 적용되는 일관성 없는규율이 있었고, 없으면 교사나 반장이나 힘센 애들이 만들었다. 남과 다른 것이 그대로 결격사유가 되는 단체 생활에서 내가 누군지 따위를 고민할 기회는 아무에게도 주어지지않았다.P27
퀴즈의 세계는 순수한 정신의 세계, 언어의 구조물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미래의 인간들이 경험할 사랑의 모습, 연애의 양상일지도 몰랐다. 육체를 옷 사입듯 구매하는 시대가 올 때, 성형수술에서 더 나아가 아예 육체를 디자인하는 시대가 될 때, 어쩌면 연애란 인간의 육체가 배제된, 정신과 정신 사이에서 벌어지는 신비로운 게임으로 변해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P35
그리스 수사학자들은 이렇게 가르쳤다고 한다. 연설을 할 때는 감동을 주든가 아니면 지식을 줘라. 그것도 안 되면 즐겁게라도 해줘라. P54
형광등아, 조명의 세계에서 다른 모든 조명들을 이기고 살아남은 국민조명 형광등아. 별로 분위기도 안 나고 켜는 데도 오래 걸리고 툭하면 스타터가 나가는, 그러나 전기료가 싸게 먹히고 수명이 긴, 그래서 살아남은 조명계의 우세종아. 내가 이 세계에서 과연 살아남을 수 있겠니? 사람다운 사람을 만나, 말 같은 말을 하고, 집 같은 집에서 잠들고, 밥 같은 밥을 먹으며 사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냐? P94
수족관에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많은 게 함께 따라오는 것 같다. 장소도 그중 하나다.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그가 살아온 장소와 만나는 경험이기도 하다. P204
그렇다. 사람들은 남에게 별 관심이 없다. 그냥 할말이 없으니 그런 뻔한 질문들을 던질 뿐이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이, 취직했냐, 결혼 안 하느냐 묻는 것도, 사실은 아무 관심도 없기 때문이다.어렸을 때의 나는 누가 나에 대해서 물으면 정말 궁금해서 묻는 줄 알고 온 힘을 다해서 대답을 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사람들은 그저 떠오르는 대로 지껄이는 거였다. 적당한 대꾸만 해주면 그들은 즉시 다른 질문으로 넘어간다. 뻔한 질문만 입력된 사이보그와 대화하는 기분이었다. 그런 사이보그들은 젊고 만만한 사람들을 만나면 단 몇 개의 질문으로 버틴다. 넌 취직은 안 하냐, 국수는 언제 먹냐 등등. 그럴 때는 그냥 딴생각을 하면 되는 것인데, 나는 언제나 "취직이 꼭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직은 저 자신에 대해 좀더 알아보려고 합니다. 그게 우선인 것 같아서요. 그럼 취업도 자연히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같은 말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런 사이보그들이 원하는 것은 대화가 아니라 그냥 그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었는데. P259
왜 아름다운 것들은 자신의 아름다움에 무심할 때 더 아름다워 보이는 걸까 p263
고요가 이렇게 무겁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질량을 가진 고요가 우리 두 사람을 짓누르고 있었다 p267
나는 사람이 두 종류라고 생각해. 자기만의 벽장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모든 게 얇아.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지. 그 너머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걸 절대로 믿지 않아. 현실만이 그들의 신앙이고 종교야. 한번 판단이 내려지면 그들은 가차없고 냉혹해. 물론 그런 사람들이 편할 때도 있지. 자기보다 강하고 부유한 사람에게 약하니까.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친교를 쌓는 건 너무 지루하고 피곤한 일이야.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라든가, 그게 도대체 나한테 무슨 득이 되나, 같은 질문만 던지는 사람들이잖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바로 너 같은 사람이야. 너는 무용한 걸 좋아하잖아. 지식, 퀴즈, 소설 같은 것들 말야." P273
세계는 혹시 무수한 방으로 이루어진 게 아닐까? 신생아실에서 태어나 교실에서 배우고 소주방에서 술 먹다가 노래방에서 노래하고 찜질방에서 목욕하고 채팅방에서 채팅하다 고시원의 쪽방에서 잠드는, 그리고 끝내는 대형 병원의 영안실에서 마감하는 삶. P306
한 인간의 진심을 온전히 전달하기에 문자메시지나 음성통화 모두 여전히 태부족이었다 p310
말을 안 한다는 거지. 시선도 마주쳐서는 안 돼. 시선도 대화야 p335
역시 승자의 기쁨은 패자의 굴욕 위에서 더욱 달콤해지는 것 같았다. P380
나보다 키가 이십 센티미터는 작은 유리의 경고를 심각하게 듣지 않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나처럼 키가 큰 남자들은 방심이 생활화돼 있다. 어떤 나쁜 일도 자기에게는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런 일은 여자나 힘이 약한 남자들에게나 일어난다고 믿는다. 실제로는 팔굽혀펴기 열 번도 제대로 못 하는 주제에 말이다. 그들은 열등감에 사로잡힌 약한 존재들의 집요함을 자주 간과하기 때문에 끝내 낭패를 당한다. P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