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생의 4분의 1을 공부하면서 보냈어. 그 후 인생의 절반은 열심히 일만 했지. 그러고는 아무 하는 일도 없이 쓸모없는 사람이 돼서 나머지 25년을 보내는 거야. 쓸데없이밥만 축내는 거지. 난 사회가 나서서 노인이 할 일을 찾아줘야 한다고 생각해." 어쩌면 어르신들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때가 이미 와 있는지도 몰랐다. 온 사방에 배울 것이 널려 있고, 지금 우리 주변에는 6백만 명에 달하는 스승들이 있다.
. "어렸을 때는 아무리 찢어지게 가난해도 부모님이 계시고, 부모님이 나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신다면 행복해. 왜냐하면 아는 건 그게 전부니까." 프레드가 말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나는 열일곱인가 열여덟 살 때까지도 우리가 가난한지 몰랐어. 록펠러가나케네디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들이 나오는 책을 읽기 전까지는 말이야. 크리스마스에 장난감도 받았고 입을 옷도 있었으니까. 그땐 가게에서 전날 만든 도넛 여섯 개들이 한 상자를 10센트에 살 수 있었지. 난 그걸 점심으로 먹었어." 그 경험들 덕분에 그는 어렸을 적부터 자신이 무언가를 문제라고 생각하면 그때부터 진짜 문제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러지 않으면 그것은 그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일 뿐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스스로가 삶을 통제하고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인생을 스스로 통제하고 있고, 선택한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노년에 닥쳐 모 멸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당신이 선택하지 않은 목적지이기 때문이다.
지난 1년간 초고령자들 중 아무도 자신이 직업적으로 성취한 것들을 언급하지 않았다. 우리가 살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일하느라 보내고, 일에 집착하는지를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이다.
대부분 일과 관련해 그리워하는 것은 일터에서느꼈던 동료애가 전부였고, 은퇴했다는 사실에는 크게 기뻐했다.
과연 그는 오래 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오래 죽어가는 것일까?
서로 의지하려면 균형을 잡아야 한다. 자녀들은 본인의 삶을 희생하지 않으면서 어머니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동시에 그들은 어머니가 안전하게, 최대한 원하는 대로 삶을 살아갈 수있기를 바랐다. 루스는 홀로서기를 주장하면서도 여전히 자녀들의 도움을 받고 싶었다. 그녀는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뭔가를 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극구 만류하는데도 불구하고 자녀들이 엄마를 위해 기꺼이 나서는 모습을 보면 흐뭇하기도 했다. 지나친것과 충분한 것 사이의 경계는 미묘했고 늘 변화무쌍했다.
그는 오래 살아 나쁜 점은 매년 그가 살아온 시대를 기억하는 사람이 적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요나스는 자신은 생각이 많은 사람이 아니며, 이 세상에서 생각이 제일 나쁘다고 말했다.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생각에 따라서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는 소련에 점령당한 리투아니아와 나치하의 독일에서 똑똑히 보았다. 그래서 그는 온전히 본능에 따라서 움직이려고 애썼다. 아침이면 아무 계획 없이 일어나서 눈에 띄는 것들을 카메라에 담고 그저 자연스럽게 장면이 나오도록 내 버려뒀다. "나는 사색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야. 농장에서 자라서 시골 생활을 해본 사람들은 자신을 분석하지 않아. 그냥 사는 거지. 단체 생활에 가까워. 그냥 있는 그대로 친구들이나 이웃들과 함께 사는 거야. 물론 그 후에 커서 시골을 떠나면서 자기 분석이나 자아 성찰도 하게 됐지만 여전히 천성적으로 나는 나를 뜯어보지 않아. 영상이나 글에서 일기를 쓰다시피 하지만 말이 야. 자기중심적이지. 하지만 아나이스 닌(Anais Nin)과 헨리 밀러(Henry Miller)의 일기를 읽어보면 정말 사색적이고 난해해. 난 그런 사람이 아니야. 그래서 내 일기는 그렇게 개인적이지가 않아." 이런 식의 삶은 오히려 유난히 확고한 목표 의식과 방향감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행동이 하찮은 잡음이 되어버리고 만다. 요나스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은 단순했고, 한결같았다. 그는 음악과 자연 그리고 친구들과 떠들고 노는 것을 좋아했다. 예술과 아름다움을 추함과 실존적 절망보다 사랑했다.
야 했으니까. 노동자라는 개념은 소련이 들어와서 노동자들을 조직하면서 같이 들어왔어. 하루아침에 모든 사람이 노동자가 됐어. 하지만 그 전까지 우리는 노동자들이 아니었지. 그래서 나는 자라면서 하던 것들을 계속하는 거야. 그냥 해야 할 일을 하는 거지." 또 어떤 날은 이렇게 말했다. "농부들은 여러 가지를 길러. 나는 시와 성자들, 역사, 아름다움, 예술을 길러. 나는 그것들을 고른 거야."
그가 지루한 늙은이들과 같이 다니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지루해서이지 늙어서가 아니었 .
요나스처럼 사람들을 계속해서 움직이게 해주는 생명력을 ‘목적‘이라고 불렀다. 연구원들은 삶에서 목적의식을 느끼는 노인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오래, 더 충실하고 보다 건강하게 사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이미 오래전부터 확인해왔다. 그다지 놀라운 결과는 아니었다
"인생이 얼마나 놀랍고 놀라운지 생각해본 적 있나요?"
아마도 노인처럼 생각한다는 것이 이런 걸까. 나는 온전히그 순간만을 살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미래를 생각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미래에 끝이있는 것처럼 산다면 현재가 훨씬 더 경이로워진다는 사실을 배웠다.
세상이 점점 작아지고 있는데도, 그들은 계속해서 감탄했다. 소소한 기쁨은 더 이상 소소하지 않았고, 감탄하는 것 역시 마음먹기에 달려있었다. 핑은 사람들과 마작을 하며 감탄했고 프레드는- 매일 아침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헬렌은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는 방법을 찾아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존은 아름다운 음악을 발견했다. 루스는 천사와 같은 자신의 자녀들을 믿는 법을 배웠다. 한 해 동안, 나는 고령자들 모두에게 죽음을 생각해보았는지, 두렵지는 않은지 물어보았다. 하지만 프레드 존스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가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했다. 오히려 너무 오래 살까 봐두렵다고 했다. 그러니 죽음은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죽음과 노화를 인생의 한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도 고령자들에게서 배운 것 중 하나다. 오직 젊은이들만 죽음이나 노화를 마치 남의 일처럼 생각한다. 요나스의 소설 『수동 타자기를 위한 진혼곡』은 주인공이 소설가 윌리엄 버로스(William Burroughs)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끝이 났다. "그래서 그도 사라졌구나." 요나스가 마지막 문장을읽었다. 나중에 그에게 죽음에 대해 생각해봤냐고 묻자 그는 죽음에 대해 묻는 건 잘못된 질문이라고 했다. 문제는 삶이었다. "죽음은 올 때가 되면 올 거야. 하지만 나는 절대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으니까." 그가 말했다. 그는 주변에서 주어진 삶에서 도망치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나는 라디오, 전기, 텔레비전, 음악 심지어는 사진도 없이 자랐어. 영화는 열네 살에 처음으로 봤고, 어쩌면 200살까지 사는 사람도 있을 거야. 하지만 스무 살이 된 젊은이들중에 벌써부터 삶을 지겨워하는 사람들이 있어. 결국 못 버티는 사람들도 있고, 그건 또 다른 얘기야."
. "나는 내 하루하루에 ‘나비 효과‘ 가있다고 믿어. 일종의 도덕적인 격언 같은 거지. 내가 지금 하는 일이 다음 순간에 영향을 미친다. 는 것을 명심하기 위한 도덕적 책임 말이야. 그래서 나는 나쁜 짓은 뭐든 안 하려고 해. 다음 순간에 이 세상은 더 좋아질 거라고, 적어도 나빠지지는 않을 거라고 제일 든든한 보험을 드는 거야. 하지만 물론 내가 좋은 일을 해도 다른 사람들의 백 가지 나쁜 짓 때문에 아무 의미가 없을 수도있어.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 격언을 따르지. 그러니까 낙천적이라고 할 수 있을 거야."
어느 시점이 되면 여행도 실망스러워진다. 행복, 목적, 만족, 우정, 아름다움, 사랑과 같이 인생의 좋은 것들은 내내 그 자리에 있다. 우리는 그것들을 얻기 위해 특별히 뭔가를 해야 할 필요가 없다. 좋은 음식, 친구, 예술, 따뜻함, 가치와 같은 것들을 우리는 이미 가지고 있으니, 그저 그렇게 살기로 결심하기만 하면 된다. 분명 지금까지 배운 것들 중에서 가장 쉬운 것인데도, 나는 아직 거기에 닿지 못했다. 때로는쉬운 일들도 정작 하려고 하면 쉽지 않을 때가 있다. 나는 오랫동안 삶의 의미는 전력을 다해 싸우는 데 있으며 편안한 삶은 책임을 피하는 거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제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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