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장을 읽고, 맨앞 단락을 다시 한 번 읽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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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과 표지가 아쉽다. 제목과 표지에서부터 흥미 유발을 했다면 좀 더 빨리 읽었을 텐데라는 아쉬움과 맥락을 같이 한다. SF는 장르는 모르겠지만 (내가 잘 몰라서) 사람을 지구를 관계를 보고 엮는 능력이 좋으신거 같다. 앞으로 계속 발전하며 영역을 넓혀가며 다작을 해주시면 좋겠다.

소방관이 놓지 않았던 보경의 3%에는 실로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보경은 언젠가, 한강 노을을 바라보며 바퀴를 열심히 굴리는 아이들이 멈추지 않고 달렸으면 좋겠다고 소방관에게 말했다. 삶이 이따금씩 의사도 묻지 않고 제멋대로 방향을 틀어버린다고 할지라도, 그래서 벽에 부딪혀 심한 상처가 난다고 하더라도 다시 일어나 방향을 잡으면 그만인 일이라고. 우리에게 희망이 1%라도 있는 한 그것은 충분히 판을 뒤집을 수 있는 에너지가 될 것이라고. - P22
빼앗긴 적 없는데 빼앗긴 기분이었고 버려진 적 없으나 버려진 기분이었다. 휴머노이드를 보면 그랬다. - P23
때때로 어떤 일들은, 만연해질수록 법이 강화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그 일에서 손을 놓아버리고는 했다. - P25
연재는 타인의 삶이 자신의 삶과 다르다는 걸 깨달아가는 것이, 그리고 그 상황을 수긍하고 몸을 맞추는 것이 성장이라고 믿었다. 때때로 타인의 삶을 인정하는 과정은 폭력적이었다. (그러니 연재에게 남은 방법은 딱 하나였다. 수업을 마치자마자 온 힘을 다해 뛰어가는 것.)
삶의 격차라는 것이 어느 틈을 비집고 생기는 것인지 한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똑같이 학교에 다니고 똑같은 옷을 입고 같은 공부를 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어떤 아이들에게는 다가갈 수조차 없을 만큼 차이가 났다. 우리 부모님도 돈을 벌고, 우리 부모님도 나를 사랑하는데 왜 우리는 같은 나이에 이만큼 차이가 나는 걸까. (그 의문이 연재의 생각을 좀먹기 시작한 후 연재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들을 손가락으로 헤아리는 습관이 생겼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것조차 포기했다. 손가락과 발가락을 전부 다 접어도 가지지 못한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 P29
사회는 개개인이 촘촘히 연결된 시스템이었고 그 선은 서로의 목을 감고 있었다. 살기 위해서는 끊어야 할 때 연결된 선을 과감하게 끊어야 하는 것이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죽이느냐 마느냐의 문제였다. - P56
보경이 은혜에게 괜찮다고 말할 때마다, 이 사소한 불편이 너를 규정할 수 없다고 말할 때마다 은혜는 도리어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정상적인 사람에게 너의 정상성은 괜찮은 것이고, 그것이 너를 규정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은혜도 그런 말을 들을 이유가 없다고. 보경이 건네는 따뜻한 위로가 가끔은 자신이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났음을 확인시키는 차갑고 날카로운 창살 같다는 것을. - P57
관심이 없어서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은 것이 아니라 무서워서 그랬다. 어느 생명체의 일생을 전부 책임질 용기가 나지 않았고 생을 마감한 동물을 오랫동안 가슴에 품고 있는 것도 겁났다 - P63
시간은 고여 있어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괜찮다고 생각했다가도 여지없이 그날로 빨려 들어갔다. 슬픔을 겪은 많은 사람들의 시간은 어떻게 흐르는 것일까. 사실은 모두 멈춰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지구에 고여버린 시간의 세계가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그 시간들을 흐르게 하기 위해서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까. - P74
콜리는 한 번 본 순간 장면에 등장하는 소품의 위치까지도 외웠지만 연재는 볼 때마다 새로운 부분을 발견했다. 인간의 눈이란 같은 것을 바라보고 있어도 각자가 다른 것을 볼 수 있었다. 콜리는 인간의 구조가 참으로 희한하다고 생각했다. 함께 있지만 시간이 같이 흐르지 않으며 같은 곳을 보지만 서로 다른 것을 기억하고, 말하지 않으면 속마음을 알 수 없다. 때때로 생각과 말을 다르게 할 수도 있었다. 끊임없이 자신을 숨기다가 모든 연료를 다 소진할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따금씩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아차렸고, 다른 것을 보고 있어도 같은 방향을 향해 있었으며 떨어져 있어도 함께 있는 것처럼 시간이 맞았다. 어렵고 복잡했다. 하지만 즐거울 것 같기도 했다. 콜리가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면 모든 상황이 즐거웠으리라. 삶 자체가 연속되는 퀴즈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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