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림트는 유디트에게서 민족주의와 영웅주의를 거세하고 세기말적 관능만을 남겨두었다. P16

토요일 오후에 시계를 들여다보는 일도 없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림 보는 일에 열중하는 사람들을 나는 주시한다. 그들은 갈 데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만날 사람도 만나야 할 사람도 없다. 그리고 그들이 오랫동안 발길을 멈추게 되는 그림은 은연중에 그들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준다 p10

여행안내책자들은 복잡한 사실들을 간단하고 명쾌하게 축약해놓는다. 한 도시에는 수십만 개의 인생이 있고 수백 년의 역사가 있고, 인생과 역사가 교직하면서 만들어온 흔적이 있다. 그 모든 것을 여행안내책자들은 단 몇 줄로 줄여버린다 p8

여행을 떠난 후에도 여행책자를 읽는 사람은 지루한 사람일 것이다. 나는 여행을 떠난 후에는 소설을 읽는다. 대신 이 도시에서는 소설을 읽지 않는다. 소설은 삶의 잉여에 적합한 양식이다.p8

이런 게 인생일까. K는 생각한다. 어차피 패는 처음에 정해지는 것이다. 내 인생의 패는 아마도 세 끗쯤 되는 별볼일없는 것이었으리라. 세 끗이 광땡을 이길 가능성은 애당초 없다. 억세게 운이 좋아서 적당히 좋은 패를 가진 자들이 허세에 놀라 죽어주거나 아니면 두 끗이나 한 끗짜리만 있는 판에 끼게 되거나. 그 둘 중의 하나뿐이다. P22

사람들은 누구나 봄을 두려워한다. 겨울에는 우울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봄은 우울을 더이상 감출 수 없게 만든다. 자신만이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이 커지는 것이 당연하다. 겨울에는 누구나가 갇혀 있지만 봄에는 갇혀 있을 수밖에 없는 자들만이 갇혀 있는다. P43

그러나 비디오카메라는 블랙홀처럼 궁전을 삼키고 궁전 앞 연못을 빨아들인다. 그들 기억 속의 벨베데르는 흐릿하고 푸른 기 감도는 사각의 영상으로 수렴된다. 그들은 기억의 불멸을 꾀하느라 생생한 현재를 희생한다. 처량하지만 인간의 숙명이다.p51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을까. 인생이란. P107

비엔나는 매력적인 도시이다. 많은 곳이 이곳을 통해 다른 곳으로 삼투된다. 종교개혁, 표현주의, 나치즘과 같은 이념들이 이 도시를 통해 세상으로 번져나갔다. 지금은 이 도시를 흔히 동유럽과 서유럽을 잇는 관문이라고 부른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이 도시에서 비자를 받아 체코나 헝가리 등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한때 이 도시에서 화가가 되려고 했다고 한다. "운명이 나를 총통으로 선택하지 않았다면 나는 미켈란젤로가 되었을 것이다." 히틀러는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반면에 모차르트는 이 도시에서 음악을 공부했다. 히틀러는 파시즘과 대중심리 분야에서 천재가 되었고 모차르트는 작곡과 연주로 이름을 높였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대중을 미혹하는 데 천부적 재질을 타고났다는 점이었을 게다. 하기야 그 시대는 무엇으로든 사람의 마음을 울리기 쉬운 때였다. 안네 프랑크의 일기가 절절할 수었던 것이 유태인 대학살이라는 배경이 있기에 가능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지금 시대에는 그런 일이 도통 가능하지 않다. 이제 죽음은 TV로 생중계되는 일종의 포르노그래피가 되어 있다. 과거엔 풍문으로 전해지던 학살이 이제는 상세하고 신속하게 위성을 통해 중계된다. P4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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