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색이 십대 소녀들의 감성과 트렌드를 주도한다는 『세븐틴인데, 고독의 재발견이라니까 무슨 학술잡지의 공맹사상 특집 같은 소리처럼 들리네요?" 수석기자이자 편집부의 청일점인 정수가 말했다. "그건 네가 몰라서 하는 소리야. 디지털 기기가 발달하면서 다들 소통이니 연결이니, 이런 말들 이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 같지만 오히려 피로를 호소하는 사람들도 꽤 많다고." 편집장님이라면 또 모를까, 요즘 애들은 디지털 네이티브인데 과연 피로감을 느낄까요?" "그래도 유부남보다는 내 감각이 좀더 젊지 않을까? 내 말은 이런 뜻이야. 휴대폰이나 대형 마트나 DMB 따위를 없앤다면 뭐가 남을 것 같아?" 윤경의 목소리가 달라졌다는 걸 눈치챘는지, 기자들은 다들 대답이 없었다. - ‘"책 같은 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아니야. 원래 그 자리는 고독의 자리였 어. 혼자 존재하는 자리. 불과 이십여 년 전만 해도 고독은 흔했지만, 지금은 디지털 기기에 밀려일상에서 고독이 사라지면서 고독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졌어. 21세기에 우리에게 허용된 고독의공간이란 산티아고 순례길이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래킹 루트, 혹은 코타키나발루 고급 리조트의 모래사장 같은 곳이지. 관광산업이 정교하게 관리하는 이 고독을 경험하려면 몇 달 월급을 쏟아부어도 모자랄 판이야. 시간이 지날수록 고독의 가치는 점점 더 커질 거야." P72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겠지만, 요즘 세상에는 값싸게 즐길 수 있는 고독이란 게 없어. 돈을 지불하지 않은 고독은 사회 부적응의 표시일 뿐이지. 심지어는 범죄의 징후이기도 하고, 예를 들어선생들은 무리에서 떨어져 혼자서 지내는 학생에게서 자살이나 학교 폭력의 가능성을 읽고, 이웃들은 친구나 가족의 왕래가 없이 살아가는 1인 가구의 세대주가 잠재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사이코패스가 아닌지 늘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만 하잖아. 우리 시대의 고독이란 부유한 자들만이누릴 수 있는 럭셔리한 여유가 된 거야. 고독의 재발견이란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자는 거지. 고독이란 단어에 어울리는 요가나 명상 같은 프로그램이나 오가닉 상품들이 뭐가 있는지 한번 알아봐." 윤경이 말하는 동안에도 기자들은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고독을 다시 발견하기 위해서 그들은 지금 당장 인터넷을 검색할 기세였다. 하긴…… 회의를 끝내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면서윤경은 생각했다. 자신이 고립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해야만 하는 이런 사회에서스마트폰이란 얼마나 요긴한 도구인가. 스마트폰 덕분에 우리는 고립에서 벗어나 24시간 누구에게든 연결될 수 있다. 스마트폰을 들고 검지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몇 센티미터만 움직여도 놀라운 신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 지금 누가 어느 맛집에서 어떤 음식을 먹는지, 막 무슨 소설을 읽었으며 별점은 몇 개인지, 여행지에서 자신이 맞닥뜨린 놀라운 풍경은 무엇이었는지 실시간으로 알 수 있는 그 신세계에 고독을 위한 자리는 없다. 홍합돌솥밥 따위를 찍어서 친구들을 위해 트위터에 올릴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말하는 셈이다. 나는 혼자가 아닙니다. 당신들과 나는 이 사진으로 연결됩니다. 연결되므로 나는 무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친구입니다. 친분으로 연결되는 이 세계는, 그러므로 투명하다. 각자는 ‘우리’로 연결된다. ‘우리‘는 기억도 공유하며, 판단도 함께 내린다. ‘우리‘는고립되지 않는다. ‘우리‘는 절대로 자살하지도 않는다. P73
"나는 인생의 불행이 외로움을 타는 걸 본 적이 없어요. 불행은 불량한 십대들처럼 언제나 여럿이 몰려다니죠. 1987년 6월 이후,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노동환경이 크게 개선됐지요. 그건 어머니에게 좋은 일이어야만 하는데, 그렇지 않았어요. 중국과 베트남에 비해서 부산의 인건비는 크게 상승했기 때문에 OEM 방식으로 신발을 만들던 공장들은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했습니다. 그건 어머니의 공장도 마찬가지였어요. 어머니는 폐쇄된 공장 문 앞에서 부당 해고와 임금 체납에맞서 투쟁했지요. 노동부로, 노무법인으로, 복지공단으로…… 운동 가요도 부르고 전경들과 대치도 하고 사지를 붙들려가며 눈물도 흘렸지요. 그러던 어느 밤, 어머니는 남동생에게 가슴이 아프다고, 가슴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다고 말했다고 하더군요. 그러곤 내가 보고 싶다고 말한 뒤 돌아가셨어요. 그런 날에도 나는 불평과 비관과 읍소의 문장들만 담긴 국제우편을 쓰고 있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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