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클 크리크
앤지 김 지음, 이동교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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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어렸을 때, 변호사가 꿈이었다. 멋진 논리와 상대의 허를 찌르는 변론, 사회 정의를 육체적 고생 없이(!) 실현해내는 멋진 슈트의 남자. 게다가 고소득은 덤이다.

하지만 그때 어느 영화에서였던가. '변호사는 하느님도 고개를 돌린다.'라는 말을 들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인가! 왜 변호사를 싫어한다는 거지? 심지어 교회를 다니지 않고, 신을 믿지 않으면서도 특정 직업에 대한 명시적 선언에 어린 마음은 상처를 받았다.

아. 하지만 모든 말에는 이유가 있다고 했던가. 이 소설의 주된 내용은 그것이 아니지만, 그 배경이 법정이기에 검사와 변호사는 등장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확실히 작가가 변호사 출신이라 그런지, 너무 적나라하다. 책을 읽으며 정말 걱정되었던 것이 앞으로 변호사를 꿈꾸는 청소년들이 비뚤어진 직업관을 갖게 될까 하는 부분일 정도였다.

게다가 (우리나라에는 없지만) 배심원 제도의 맹점과 사건에 대한 진실보다는 논리적으로 타당한 범인을 규정하고 판결하려는 상황이 조금 불편하기도 했다.

하지만 되려 그런 불편함이, 매우 인간적인 본연의 심리와 모성애를 더욱 부각시켜 주었다. 진실을 왜곡하는 법정과 그를 '자기 마음이 편한 대로' 판단하는 사람들. 세상 참, 쉽게 산다.

피고가 범인이 아닌 건 처음부터 알았다

- 그런데 대체 진범이 누구지?

미국으로 이민 온 박, 영, 매희 가족은 한적한 마을 미라클 크리크에서 고압 산소 치료요법 사업을 시작한다. 기러기 아빠로 지내던 박이 돌아오면서, 그렇지 않아도 고된 노동으로 소원해진 매희와의 관계가 극도로 느슨해짐을 느낀다. 모든 어머니가 그렇듯, 매희와 관계를 회복하고 싶지만 서운함은 분노로 표출되기 일쑤였다.

그렇게 투자금을 받아 '미라클 서브마린' 사업을 시작한 박은 나름 순조롭던 사업에 고압 산소 치료를 반대하는 집단이 나타나면서 소란이 일어나고, 뭔가 조치를 취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이 치료소를 사용하는 엘리자베스&헨리, 킷&TJ, 테리사&로사는 모두 장애(자폐, 뇌성마비)를 가진 자녀와 어머니다. 유일하게 맷은 정자 활력도 저하로 치료에 참여하지만, 아이들을 보면서 되려 2세 생산에 부정적이다.

엘리자베스는 온갖 치료에 모든 노력을 한다. 과도한 노력이었지만 어느 정도 호전을 보였고, 절친한 킷은 이제 치료를 중단할 것을 종용한다. 하지만 엘레자베스는 그런 킷의 권유를 '질투'로 받아들이고 크게 다투고 만다. 테리사는 그런 엘리자베스와 킷을 보며 모두의 마음을 이해하지만, 자신 역시 마음속에서 로사를 두고 싸우는 모성애와 자기욕에 힘겹다.

그러던 어느 날 고압 산소 폭발 사고가 일어나고, 모든 정황이 엘리자베스를 범인으로 몰아간다. 죽은 것이 절친한 친구였던 킷과, 바로 그녀의 아들 헨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사건 1년 후, 법정에서 재판이 시작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하지만 처음부터 피고인 엘리자베스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이 글로 쓰지만 않았을 뿐 너무 자명했다. 늘 반복하는 말이긴 하지만, 독자가 작가를 이겨먹기란 쉽지가 않다.

마치 변호인 섀넌이 유능한 것처럼 그려졌지만 작가는 섀넌을 통한 연작을 할 마음은 없는 듯하다. 실제 섀넌의 변호는 꽤 인상적이었지만, 사건의 재구성은 사건 당사자들의 심리와 사건에 대한 서술, 기억들을 정리하면서 진행된다. 모든 등장인물들이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과 내면, 심리상태를 서술하면서 서서히 진범에 대한 정보를 흘린다. 이런 구조의 추리소설을 매우 좋아한다. 하지만 예전의 필자는 꽤 정답률이 괜찮았건만, 요즘 작가분들의 실력이 좋아진 것인지 혹은 내 감이 죽은 것인지 진범을 깨닫는 것은 종막에 이르러서였다.

분명, 이 소설에서 범인이 드러나는 과정이 매우 치밀한 구조로 잘 써졌음에는 전혀 이의가 없다. 하지만 필자는 조금 아쉽다. 그런 치밀한 구조가 되려, 엘리자베스, 테리사, 영의 그 절절한 모성애와 번뇌에 대한 서술의 반짝임을 가려버린 듯했다.

솔직히, 울컥울컥한 어머니의(아. 필자의 눈물 버튼.) 심리들을 그대로 느끼지 못한 듯한 아쉬움이 조금 남는다. 그렇다고 소설에 흠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약간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느낌이다. 필자는 두 마리'나' 필요가 없었을 뿐이고.(애초에 에드거 상 수상작인데, 욕심이 이상한 쪽으로 작용했다.) 독자에 따라서는 엄청난 만족감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자신마저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없다

- 그래서 타인이 마치 아는 척하게 만들어 버린다.

어머니. 필자의 눈물 버튼이다. 지금도 전화가 오면 보통 시작은 '왜.' 라거나 '뭐.' 라거나 '말해.'지만. 평범한 세상의 모든 아들놈들이 그렇듯, '엄마'라고 부르다간 울어버릴 것 같아서 '엄니'라고 부르는 내게 매우 취약한 단어다.

그런 필자에게 이 소설에서 드러나는 어머니들의 모습은, 너무 사실적이라서 더욱 슬펐다. 극심하다. 마치 유전자에 새겨진 듯 피할 수 없는 모성애와 생명체인 인간으로서 본능적으로 추구할 수밖에 없는 자기 욕구. 그 사이에서 번뇌하는 어머니들의 모습. 그리고 최종적으로 선택은 늘 자식에게 가는 따뜻하게 슬픈 이야기.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아들을 죽이지 않았음에도 크게 분노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사고 직전 아동학대 혐의로 무고를 당해 조사를 받으면서 자신의 행위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죄의식에 시달린다. 헨리에게 화를 내고 혼을 내고 생채기를 낸 자신을 자책한다.

그런 것은 테리사 역시 같다. 어떻게든 버텨나가지만, 언제가 될지 모를 로사의 죽음. 자신이 죽고 나서 로사의 미래는 어찌 될 것인가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 영 역시도, 끊어져 버린 듯했던 매희와의 관계가 사고로 인해 혼수상태에 있던 두 달 동안 다시 이어진 듯한 기분에 조금 더 이대로 있기를 바란다.

'죽었으면 좋겠다. 자는 듯, 고통 없이.'

과연, 저 말이, 어머니의 진심이겠는가. 저 말이, 오로지 아픈 자녀가 없어져서 자신의 자유와 인생을 되찾고 싶어 하는 저열한 욕망에서 나오겠는가. 심지어 자식이 없는, 남자인 나마저도 알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소설 속에서 피고인 엘리자베스를 보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역시, 쉬이 반박하지 못한다.

자신이 자신의 마음을 어찌 알겠는가. 순간 꼴도 보기 싫고, 어금니가 부서져라 물고, 주먹에 핏기가 가실 정도로 꽉 쥐는 것이, 자신의 마음인지, 진심인지, 어찌 알겠는가. 그저, 사람이기에, 인간이기에, 자신의 의지가 아닌 것이 흘러나오는 것을, 어찌 다 통제하겠는가.

하지만, 자신이 자신의 마음에 확신을 갖지 못하면, 타인에게 확신을 주고 마는 것이다.

아무래도 작가는 모성애에 대해, 그 지고지순하게 아름다운 그 사랑을 이야기한 것 같지만, 필자는 그저 자신의 마음을, 진심을 의심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엘리자베스도, 테리사도, 킷, 영 역시도. 자신들의 그 사랑을, 스스로 의심했다. 그 결과 타인들이 그들의 진심을 의심하고 규정지어버렸다. 우리 역시 그렇지 않은가.

내 마음을 나도 모른다면,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선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내 진심에 확신을 갖지 못한다면 타인은 내 진심을 의심하고 왜곡해서 아는 척하고 평결할 것이다.

필치가 조금은 지루한 면이 없지 않다. 수식이 조금 많은 편이고, 부연 설명을 문장 내에 그대로 인용 처리하면서 문장이 길어졌다. 초반에는 살짝 집중이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들의 내면이 드러나기 시작하면 쉬이 이 책을 놓지는 못할 것이다.

-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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