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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가, 나의 악마
조예 스테이지 지음, 이수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1월
평점 :
들어가는 말
모 기업의 물티슈에 이런 말이 적혀있다. '저도 처음이고, 엄마도 처음이지만 잘해낼거에요.'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기르느니만큼 위대하면서도 미스테리하고 우려스러운 일이 있을까. (필자는 2세 계획이 없으나, 이론적으로는 인정하는 편이다.) 소설은 엄마 수제트와 딸 헤나의 입장에서 각각 1인칭 시점으로 번갈아가며 사건을 서술하고 있다. 말을 의도적으로 하지 않는 딸과, 그런 딸을 보며 본인의 방임된 유년시절을 떠올리며 더 잘하려 노력하는 엄마의 입장. 하지만 그런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입장이 전혀 다른 관계로 헤나는 수제트를 해하려 든다. 흔히 '딸바보'라고 불리는 아빠 알렉스는 그런 관계에 대해 제대로 감을 잡지 못한다. 종말은 해피엔딩이 될 수 없다. 애초에,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찌 자식과의 불화가 해피엔딩이 될 수 있겠는가.
새로운 시도, 이중시점
물론, 주요인물의 시점에서 소설을 서술하는 기법은 어찌보면 흔하긴 하다. 어차피 소설은 독자에게 등장인물들의 내면을 알려줘야하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든 그를 표현해야하고, 그러다보면 각각의 인물의 시점에서 서술을 이어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 소설은 특히, 주요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수제트와 헤나의 두 시점만을 번갈아가며 그리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는 주요 등장인물인 둘의 심리를 아주 세세하게 표현함으로써 독자에게 조금 더 사건의 본질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는 하지만, 조금은 지루하다는 역효과를 주기도 한다.
실질적으로 각 묘사마다 상당히 형이상학적이고 지리한 비유법이 너무 많아 각 챕터마다 길이가 길었고, 어찌보면 그리 큰 사건이 아님에도 상당히 과도하게 확장된 면이 없지 않다. 애들이 커가는 과정에서 흔히 겪을만한 사고들과 그로 인해 부모가 겪는 고뇌, 번뇌 및 애증(자식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하지 못하는 본인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과 자식에 대한 미움과 사랑, 그 미움에 대한 죄책감 등)이 매우 디테일하게 묘사된 부분에서 소설의 중반까지도 필자는, 이것이 단순히 7살 짜리의 유아적 망상이 타고난 지능을 만나 조금은 과도하게 부각되고, 유년 시절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방임된 상처를 그대로 안고 자식을 낳게된 엄마가 그 영향으로 과도한 강박관념에 시달려 오해하게 되는, 약간은 훈훈하게 끝나버릴 양육소설이 아닌가 생각했다.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다?
최근에 읽은 다른 소설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사이코패스 혹은 그저 타고난 '악마'적인 인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어서 그렇게 호평이 나오지는 않는다. 게다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챕터마다 비유가 너무 과도한데다가 사건 역시 미미한 이유로 약간 지루한 면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면에서도 마지막까지 이 책을 읽게 만드는 원동력은, 바로 '부모의 자격'이자, '부모의 사랑'이라는 의미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이었다.
수제트는 항상 부모로써 최선을 다 한다고 생각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역시 이 교묘한 딸에 대한 알 수 없는 공포와 분노가 자리한다. 우리네 모든 부모들이 처음에는 비슷하지 않았을까. 그들도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자식의 행동과, 기대를 져버리는 수많은 일탈들에 분명 힘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버텨내는 것이 도저히 지금의 필자로써는 이해할 수 없는 '부모의 사랑'일 것이다. 하지만, 그 마음이 순수하게 아이에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인가. 수제트는 이미 그런 자신의 사랑을 불안과 공포로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헤나는 이미 눈치챈 것이 분명하다. 소설의 말미에 우리는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답을 알게 된 우리는 소설에는 나와있지 않은 비극적인 종말을 예상하며 본인이 바로 저런 헤나가 아닌 것에, 혹은 본인의 자녀가 헤나가 아닌 것에 감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 이 서평은 몽실서평단으로부터 서평단 모집에 선정되어 제공받아 작성되었으나 읽고 싶어서 신청하였고 솔직히 작성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