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 (양장) 새움 세계문학
조지 오웰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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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시대'를 그 배경으로 삼는 소설들의 대부분이 그렇듯, 이 소설이 던지는 결론주의적인 질문은 바로, '과연 인간이 시대를 만들어 내는가, 아니면 시대가 인간 군상을 그리는가'이다. 조지 오웰이 살았던 시대의 배경, 냉전시기와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극에 달했던 2차 세계대전을 통해 작가가 상상한 1984년(혹은 그 어떤 미래)은 그저 상상이라기보다는 필자가 보기에 '예언'에 가깝다.

다만, 그 예언이 어긋난 점이라면, 거대 국가는 '정치'라는 걸림돌 때문에 만들어지지 못했고, 역시 '정치'라는 장난질 덕분에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는 버림받다시피하고 전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그려낸 사회 지배 구조적 방식과 틀은 크게 다르지 않은데, 그것은 '극에 달하면 결국은 만나게 되는' 원圓론적 말장난'이다. 사회주의이든, 자유민주주의이든 그것이 극에 달하게 되면 결국은 일맥상통하게 되는 것이다. 현 시대에도 그것의 방식이 조금은 다를지라도 작가가 상상(예언)했던 대중에 대한 지배방식은 이뤄지고 있다.

우리는 얼마나 시대에 지배를 받고 있는가. 혹은, 우리의 지배층은 얼마나 이 시대를 만들어가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이 시대에 과연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것이다.)

신어, 텔레스크린과 섹스, 그리고 경제

필자가 이 소설을 단순히 상상이 아닌 예언이라 지칭하고 싶은 것은, 소설 곳곳에 드러나는 현 시대의 상황들 때문이다. 일단, 크게 신어를 보자. 신어는 말 그대로 그저 '새로운 언어'에 가깝다. 처음 이 단어를 접했을 때는 역시나, 우상화를 통한 신격화에 다다라 우매한 대중을 세뇌하기 위해 만들어낸 신神어인가 오해했으나 그것과는 궤를 달리한다. '언어가 사상을 구축한다.'라는 말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있다. 작가의 신어는 기존의 언어를 훨씬 단순화하고 획일화하여 대중들의 사고방식 자체를 제한하기 위한 언어 혁명이다. 애초에 사랑, 자유 등에 관련된 단어 자체를 없애고, '이중사고'라고 지칭되는 사고방식 자체에 대한 제한을 위해 '좋은(good)'의 반대말을 '나쁜(bad)'이 아닌 '안 좋은(ungood)으로 단순화 시키는 것이다. 또한, 갖가지 부사어들 역시 없애고 단순히 단어를 배열하거나 이어붙여 단어를 만드는데, 예를 들어 '청년운동'이 원래대로라면 Movement of Youth인데, 이를 Youth Movement로 지칭한다. 

물론, 현 시대의 '줄임말'과는 그 궤를 달리하는 것은 사실이다. 발생 원인 역시 다르고 사용 목적 역시 다르다. 하지만 필자는 신어를 접하면서 현 시대의 줄임말과 인터넷 상에서의 반말과 예의없음, 그리고 '선비' 혹은 '진지충'이라 비하하는 세태를 겹쳐보았다. 현 세대를 무시하거나 비하하고 싶은 것은 아니나, 그들은 이러한 '자체적인 신어 개발'로 스스로의 사상 세계를 비하시키고 있진 않은가. 그들은 스스로를 높일 기회를 스스로 버리고 있고, 스스로 낮아짐을 주변 사람까지 같이 잡아 내리 끌음으로써 하향 평준화를 시키고 있다.

또한 텔레스키린에 의한 지배층의 감시 역시 현 시대 갖가지 매체와 인터넷, SNS 그리고 최첨단 기술을 이용한 도청, 감청, 불법 사찰 등을 그대로 반영한다. 모두가 모두에게 공개되어있는 시대. 스스로가 드러내는 자신의 모습 때문에 모두에게 감시당하는 시대가 지금인 것이다.

특히 소설에서 여러가지 통제의 목적을 위해 '사랑'을 억제한다. 그 부차적이자 원초적인 목적으로 '섹스'를 통제하는데, 이는 현 시대와 거울처럼 드러난다. 우리 사회는 유교를 바탕으로 현재까지도 '성'에 대해 감추고 가려야할 것으로 치부해왔고, 시대가 바뀌었음에도 여전히 그 움직임은 기저에 깔려있다. 게다가 그 이면에는 여성에 대한 차별이 전제되어있다. (하지만 유교이전의 고려시대 이전에 그랬듯, 소설 내 사회는 사회주의에 가깝기에 남녀차별의 기조는 없다.) 특히 자녀의 생산에 대해서는 소설과 현 시대 모두 동일한 입장을 지닌다. 소설과 현실 모두 성에 대해 감추고 부끄러운 것으로 가르치고 있으면서도, 사회적 노동력의 생산을 위해 자녀 '생산'은 강조하고 있다. 이는 경제적인 문제인데, 역시 소설과 현실 모두 마찬가지로 경제적 '빈곤'을 기본으로 한다. 경제적 빈곤을 바탕으로는 어떤 시민도 '이중사고'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1차원적인 욕구가 충족되지 않은 대중에게 고차원적인 '자유'에의 욕구는 없다는 것이 지배층의 논리이자 원동력인 것이다.

또한, 그것은 영원하다는 걸 기억하게

우리의 윈스턴은, 결국은 파괴되고 리빌드(re-build)되었다. 내면의 어디선가 계속 본인의 부당함을 느끼고는 있었으나 그 모든 예감을 조용히 묻어두고 기름냄새가 펄펄나는 진을 계속 들이부어 덮어둘 정도로 파괴되고 말았다. 그렇게 지배는 영원하다. 시대가 그 아무리 흐른다고 해도, 아마 사회의 지배층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임에 틀림이 없고, 기술의 발전으로 인간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데다가, 그냥 개별적 생존체로써 살아가기에는 인간은 매우 약하지만 위험하다. 그렇기에 누군가 혹은 어떤 집단인가는 이 거대한 조직체를 올바르거나 혹은 지속가능한 방향으로(그 방향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것은 주요한 문제는 아니다. 방향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이끌어가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대중은 우매해야하며, 단순해야한다.

그럼에도 대중들은 현명해야한다. 그 거대한 시대의 흐름에서 언제나 그것을 거스를 힘은 대중에서만 나왔다. 프랑스의 시민혁명이 그러했고, 영국의 자본혁명 역시 그러했으며 우리의 5. 18. 민주화 운동 역시 그러하다. 우매하면서 현명한 대중. 그래서 승리하는 것이다.

윈스턴은, 모든 그 마음의 자유와 혁명을 모두 파괴당했음에도 계속 진에 취해 텔레스크린의 '승리' 소식만을 기다린다. 오로지 본인이 사랑해 마지 않는 '빅브라더'가, 이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그 '당'이 승리하기를, 그 소식이 들리고 본인의 삶에 종지부를 찍기를 기다린다. 이 지독한 지배층은 우매한 대중이 현명함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철저히 파괴하고 세뇌시켜 대중에게 보인 뒤에야 윈스턴을 죽인다. 그럼에도 그는 그 자신에게 승리한다. 그 자신과의 투쟁. 그것은 이미 세뇌되어버린 자아와, 모든 진실을 깨달은 내면의 자아와의 투쟁이었고, 그것은 단순히 윈스턴만의 투쟁이 아닌, 모든 사회 구성원의 투쟁이었다. 그러므로, 윈스턴의 죽음은 미래 이 모든 이야기에 대해 누군가가 읽었을 때, 누구든 울분을 토하고 지배층을 타도하며 우매한 대중에 조금 더 현명해지기를 갈구하는 마음이 일어날 것이라는 점에서 바로 그의 승리이다. 그리고 그런 미래에는 인류가 분명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임을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 방향이 어느 쪽이든) 알기에 그 밑거름이 될 빅브라더를 사랑한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영원하다는 걸 기억해야한다. 우리는 비록 시대의 한 지점만을 살다 가겠지만, 우리가 지금 어떤 변곡점을 찍느냐에 따라 미래에는 큰 소용돌이가 치거나, 혹은 다른 흐름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 이 서평은 컬처블룸서평단으로부터 서평단 모집에 선정되어 제공받아 작성되었으나 읽고 싶어서 신청하였고 솔직히 작성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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