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한글판 + 영문판) - 합본 반석 영한대역 시리즈 1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이화승 옮김 / 반석출판사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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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고전이 몇 십년이 지난 후에도 계속 회자되고 사랑받는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까. 단순히 인류의 역사가 흘러갈수록 많은 창작물이 생겨나고, 그에 모방과 표절의 중간쯤되는 재창조의 단계를 거치지 않은 최초의 창작이라는 점이 큰 매력일수도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고전이 긴 세월의 흐름에도 바래지 않고 꾸준히 빛을 발하며 독자들을 불나방처럼 끌어들이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 본연의 내적인 문제에 대해 고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에 이르러, 특히 최근에는 더욱더 창작물들이 좀더 위트있고 직설적인 표현을 즐기면서 인간 본연의 철학적 문제보다는 표면적으로 느껴지는 개개인의 문제에 대해 더욱 근접해가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최근의 문학이 상스럽다거나 얕다는 것이 아니다. 지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핵이 아니라 지표면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핵은 지구가 그 기능을 하는데 매우 중요하며 한순간에 지표면의 아름다움을 증발시킬만한 파괴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고전은 오랜 풍파에도 삵지 않고 사랑받는 것 아니겠는가.

욕망, 욕망 그리고 욕망

개츠비의 인생은 욕망의 정점이다. 소작농의 아들에서 대저택 파티의 주인이 되기까지 그를 이끈 것은 단순히 욕망이다. 데이지에 대한 사랑 역시도 욕망일 뿐이다. 닉은 뉴욕에서의 성공을 꿈꾼다. 세계대전 직후 호황기의 증권가에서 닉이 본 것은 인간 욕망의 결정체였을테고, 월세 80불짜리 판자집 바로 옆에서 날마다 성대히 치뤄지는 파티는 그런 욕망의 열매로 보였을 것이다. 작중 파티에서 늘 닉은 초반에는 서먹해하다가도 결국은 샴페인 몇 잔에 즐거워지고만다. 단순히 화자로 등장한 닉은, 어느 순간 대변인이 되고 결국 톰은 '그래도 그 자식 편을 들거냐'라고 화를 내지만, 종국에 가서도 닉은 개츠비의 '친한 친구'로 본인을 소개한다. 닉 역시, '욕망'의 친구가 된 것이다. 톰은 어찌보면 가장 욕망과 거리가 먼 등장인물이다. 가진 자로 태어난 톰은 욕망이라기보다는 단순히 사치와 낭비, 허세의 아이콘일 뿐이다.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 여성에 대한 차별과 무시. 유일하게 그가 욕망을 드러낸 것은 성욕이다. 일차적으로 육체적 욕망을 위해 차지한 머틀과 대외적 과시용 성욕인 데이지. 하지만 그 역시 결국은 '허세'였을 뿐, 개츠비를 만난 뒤 머틀을 잃고, 이어 데이지마저 잃을 위기에 처하면서 톰은 자괴감을 느꼈을 것이다. 데이지 역시도 그 시절 여성의 표상으로, 부와 권력에 대한 욕망과 사랑에 대한 욕망 사이에 고뇌하다 현실의 욕망에 굴복한 수동적 욕망의 화신일 뿐이다. 개츠비가 거부가 되어 돌아오자 흔들리지만, 그 마저 톰이 캐온 개츠비의 과거를 듣고는 흔들리고 만다. 모두를 사랑했다는 말은,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영화와 함께 읽으면 좋은 책

개인적으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위대한 개츠비가 개봉했을 당시,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아마, 이 책을 읽었었는지에 대한 기억마저도 희미하다. 영화 자체도 역시, 왜 그리 찬사를 받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얼핏 본 영화 일부에서 느낀 것은, 말도 안되는 이상한 분위기와 몽환적 묘사, 앞뒤가 전혀 맞지않는 스토리 등 어디에서도 탄탄함이 없는 모래성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재차 읽고 난 뒤 본 영화에서 느낀 점은, 어쩜 영상화를 시키면서 저렇게도 원작에 충실할 수 있었을까 라는 점이었다. 원작에서 느껴지는 인간 내면의 욕망과, 1920년 대 급격한 산업화와 경제호황에 따른 인간들의 욕망을 영상화시켰다는 것이 아마 찬사의 원인이지 않았을까. 혹시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면, 한번쯤 꼭 책을 읽고나서 영화를 한번 보기를 추천한다. (다만, 고전인만큼, 중문이 많고, 미사여구 역시 과도하게 들어간만큼 요즘의 소설에 비해서 잘 읽히지는 않는다. 정 힘들다면 며칠 나눠 읽되, 그 만큼 영화를 나눠 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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