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이란 다른 누군가로 채울 수 없는 마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사람은 죽는 순간까지 자기 말만 한다.
그런데 살아서 하나님 음성을 듣지 못하면, 영원히 듣지 못한다.
(누가복음16장19절~31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늦은 대화

 

고등학교 1학년 때 소크라테스 변명 향연을 대충 읽고 제출한 독후감이 떠올랐다. 소크라테스에게 친구 크리톤이 감금되어 있는 그를 찾아왔다. 능력 있는 크리톤은 탈옥을 돕겠다고 하였으나 소크라테스는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무엇이 소크라테스에게 악법도 법이게 했나! 그 정도 글이었던 것 같은데, 인생의 마지막에 다다랐으나 아직도 준비하지 않은 인생, 불안하고 안타깝기 그지없는 이들이 있어 그 느낌으로 이 글을 써본다. 그 옛날 그랬듯이 대화임에도 만연체라 지루할 수 있겠지만, 길지 않으니 대충 읽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는 그 이후 쇼펜하우어의 비극적 인생, 까뮈의 이방인, 톨스토이 인생독본을 매일 읽으며 출가하러 합천 해인사 문 앞까지 간 적 있다. 나이 열일곱 살이었다. 그럴 수밖에 더 있겠는가? 톨스토이 인생독본은 매일 읽었던 것으로 다양한 사상과 명언들로 가득 차 있지만 쇼펜하우어는 허무주의, 까뮈는 곧 실존에 대한 이유와 의미, 가치로 연결되니 당연한 것 아닌가? 발로는 절간으로 향하고 머리는 혼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실은 주변에 아는 사람은 다 아는데, 더 나이 들기 전에 다시 출가하기로 결심하고서 나는 마지막으로 교회를 나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갔다. 누가 나오라고 한 적이 없다. 스스로 나갔다. 물론 믿으려고 나간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절대적인 신이 있을 것 같은데, 그 신이 아마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아닐까 하는 마음으로 확인하러 나간 것이다.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성서 계시를 통해 만났다. 설교 내용 중에 성서의 말씀이 내 인생을 다시 태어나게 했다.

 

책 속 대화에 나오는 사람 중 파이돈이 있다. 경상도에서는 싫다’, ‘좋지 않다라는 뜻으로 파이다란 말을 쓴다. 말장난이지만 아, 나는 이런 사람이 파이다. 대책이 없어 너무 불쌍하다.

 

파이다: “인생이 다 이런 거지 뭐....... 다 죽고 끝나는 것이지....... 병들거나, 늙어 가면서 기운 빠지는 거지.”

숨 쉬는 것도 힘들고, 이제 정신도 몽롱하네.” “기운도 없어. 너무 무기력해.......”

지금 내 모습이.......할 수 있는 것이 없고....... 도무지 이제는 힘에 부치고 그냥 이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거지.......”

지나온 날들이나 생각하며, 죽을 날만 기다리는 것이지.......”

-이런 저런 말이 많으나, 중략-

 

증인: “파이다여~ 부모님의 은혜는 인정하실 것입니다.” “또 평생을 사시며 세상에서 알게 모르게 많은 사람들을 통해 도움을 받았다는 것도 이제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뿐만 아니라 그대가 고맙게 여기고 있는 부모님과 주변인들도 다 이 세상에서는 그 부모나 어떤 사람으로부터 또 자연으로부터 은혜를 입었다는 것은 인정하실 것입니다.”

인생은 누구나 스스로 창조되지 않았듯이 시작과 과정, 마지막까지 이렇게 흘러 왔습니다.” “그렇게 인생은 흘러온 것이고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그 흐름을 운영하신 분이 계십니다.”

 

파이다: “그게 누구요?”

증인: “태어나 평생을 숨 쉴 수 있도록 인생에게 호흡을 주시고, 또 공기와 비를 주신 분이십니다.” “그 비로 사람들은 땅에 농사를 짓기도 하고 물을 모아 전기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사람이 디뎌 밟을 수 있는 땅을 주시고 새처럼 날아다닐 수 있게 지혜도 주셨습니다. 철을 만들 수 있게, 또 힘을 효과적으로 발생시키는 방식까지도 알게 하셨습니다.”

사실 모든 것이 그 분께로 시작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과 지혜를 자기의 노력이나 부모로부터 주어진 것으로 여기지만, 족보를 보더라도 인류는 한 혈통, 첫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지요

이렇게 사람이 지혜를 갖고 영원히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하나님은 사람을 원래 죽지 않도록 창조하셨으나,

죽지 않고 영원할 수 있는 이 육체가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배반한 결과로 죽게 된 것입니다.“ “너희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이제 먼지가 되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게 끝일까요? 육체는 먼지가 되지만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인생은 결국 서야 합니다.”

그렇게 많은 은혜를 입고도 한 번도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았고, 기쁘시게 해드리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불순종한 첫 사람의 기원을 중단하도록 창조주 하나님과 관계회복의 기회를 주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난 인생은 저주와 공포, 질병, 고통, 두려움, 죽음 등을 겪게 됨)

 

파이다: “나 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오.”

 

증인: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보이는 하나님으로 우리 인간과 똑같이 육신을 입으시고 오셨는데 특별히 누구만을 위해 오셨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파이다: “난 그 분을 본 적이 없소.”

 

증인: “내게 보이지 않는다고 없다할 수 있습니까? 아주 오래 전에 일어났다고 역사와 사실을 부정할 수 있나요?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도록 오신 것입니다.”

단지 제한된 이 땅에 오시되 이미 계시하신대로 아시아의 작은 나라 이스라엘(원래 이름, 야곱)에 오신 것뿐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어떤 노력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기준과 공의를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오직 인생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 밖에요. 그 사랑이 인류에게 나타난바 되었습니다.”

깜짝 놀랄 일이지요.

하나님이 이 세상에 직접 오셨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위엄과 화려함이 아니었습니다.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죄 있는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분이 죄 있는 인간의 모습으로요.

물론 남녀 관계를 통해 낳은 아이는 아닙니다.

사내를 알지 못하는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 하나님의 거룩한 영으로 임신할 것이라고 미리 알려주었지요. 왜 그랬을까요?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기이한 일이요 놀라지 않을 수 없어요.“

신이 사람의 몸을 빌리다니요. 마리아는 인간 대리모가 아니라, 신이 선택한 대리모가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주의 뜻에 따르겠다고 순종했습니다.“



*성서 히브리서 2장 

인간은 평생동안 죽음의 공포 곧 생존의 위협 속에 두려움으로 살아간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살과 피로 인간의 모습을 취한 것은 이것 때문이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실 뿐만 아니라, 이 불안에서 해방시키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임마누엘)"는 계시를 성취하신 것이다. 보이지 않던 하나님께서 보이는 하나님으로 인류의 종말에 이스라엘 땅에 오셨다.!!!

십자가에서 모든 인류의 죄를 위해 대신 형벌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다. 

인생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의인은 없으나,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 의로운 행위로 우리는 하나님께 자녀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피와 살을 취하셔서 인간이 되신 이유이다. 우리와 같이 되셔서 인류의 새 대표가 되어 주신 것이다. 죄인이 아니라 자녀로, 하나님의 가족으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선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자에게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해 주시고 황송하게도 '의롭다'라고 칭해 주신다. 오직 사람의 모습을 취하신 예수님이 그 십자가에서 이루신 의로우신 행위가 우리를 의롭게 했다. 

그 증거로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죽음에서 부활했다는 것은 죽음의 권세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받아들인 자들은 현재의 육체가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처럼 변화하여 죽어도 살아난다. 정하신 그 날에 있을 영광의 부활체다. 죽을 육신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처럼 인류도 부활하여 하나님의 심판대에 선다. 

어떤 이는 영원한 형벌의 심판대에, 어떤 이는 영원한 생명의 심판대에서 서게 된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모든 인류는 겸손히 하나님 앞에 나아 오라.


(진리를 찾아 헤매던 소년의 흔적)

84년 독후감 1등 페넌트 수상(소크라테스 변명 향연), 85년 경향신문 논술학습실 입선(아리스토텔레스 행복론에 대하여), 86년 밀양문화원 글짓기 입상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biblebae 2024-12-04 1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5103000329209009&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5-10-30&officeId=00032&pageNo=9&printNo=12337&publishType=00020
 

 내가 할 짓이 없어서 이거 하겠나?


검정고시를 치루고 부산의 한 신학교에 입학했다.

여전히 부모님이 농사지으며 살고 계시는 밀양.

창고를 개조해 교회로 사용하고 있던 곳에 ‘하나님이 계신가?’ 하며 확인하러 나가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신앙을 시작했던 교회.

그곳에서 신학교 2학년 때, 전도사로 교역자 인턴을 시작했다.

무늬만 전도사지 신학도 잘 모르는 시절.

그 해 여름, 매 주일 고향 교회에 내려갔었는데 영도에서 사상 터미널로, 그리고 밀양행 직행버스를 타고 다니곤 했다.


드문드문 우거진 강가 풀숲 사이로 낙동강 모래사장이 내려다보이는 둑을 따라 걷노라면, ‘농마’라고 불렀던 대원마을이 제일 먼저 지나다니는 이를 맞이한다.

마을 입구 왼편에는 어느 양식장에서 도망쳐 나와, 잘 살고 있다는 황소개구리 울음이 들리는 연못도 있다.

둑에서 가까운 도랑을 따라 계속 가다보면, 여름방학을 맞은 아이들이 빨래터에서 옷을 빨기도 하고, 자전거 타고 논에 물대러 가는 선후배라도 마주치면 쑥스럽게 인사하다 어느새 대평마을에 들어 서 있다.

우리 집으로 들어오는 길옆에 수양버들이 한 그루 있었다.

항상 버들가지가 축 늘어진 아래로 옆집 못생긴 황소가 되새김질을 하면서, 너저분한 짚을 방석으로 삼아 매여 있었는데, 길을 지나가던 개들이나 사람들도 그 휑한 큰 눈과 시선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거의 반사적으로 관심 없는 모습으로 털레털레 가는 길을 다시 가던, 그래서 더욱 그 황소의 입장이 참 묘한 분위기로 아스라이 남았다.

이 소는 늘(常) 그런 식으로 지나가는 모든 생물체를 맞이하곤 하였다.

7월의 더운 여름 한날, 여름성경학교 행사가 있어 교회로 가고 있었다.

둑 아래 교회를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도랑 위 다리를 건너야 했고, 당시 200여 가구의 문화생활을 가능하게 했던 한 가게가 나온다.

이 집 아들이 한 해 후배인데, 듣기로는 대구에서 대학교를 다닌다고 했다.

평소에는 얼굴을 볼 수 없었는데, 그 날 도랑을 건너다 같은 대학 친구들로 보이는 군상들과 평상 위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지나가던 나를 보더니, 선배라고 인사를 했다.

“아이고~ 형님, 안녕하십니꺼?”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그런데 그 다음 한 마디가 비위를 거슬렀다.

“아이고~ 형님 어쩌다가 그리 됐습니꺼?”

교회 가는 걸 시비 삼는 것이다.

‘이 녀석이 집에 팔려고 받아 둔 술을 마시더니 과했나!’

여러 사람 앞에서 선배 대우를 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발가벗기고 싶어 말을 건 것으로 여겨졌다.

순간 엄청 화가 났지만 참았다.

그래도 한마디는 해주어야 했다.

“내가 할 짓 없어 이거 하겠나?”

한 마디 뱉고 교회로 갔다.

교회에 들어서자마자 교회당 바닥에 무릎을 꿇고, 풀리지 않는 분을 삭이며 기도했다.

너무 분하여 무언가를 하나님께 쏘아대고 싶은데, 저주를 할 수도 없고,·······.

‘저게 아직 몰라서 그러니  오~ 하나님. 저 영혼을 불쌍히 여기소서.’

괘씸한 마음이 풀리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런 경우, 마땅히 할 수 있는 기도가 없어 억지로 그 기도를 했다.


몇 년이 지났다.

어느 날 아침,  오랜만에 고향에 가는 길이었다.

사상터미널. 고향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그 후배를 다시 만났다.

먼저 반갑게 인사를 하더니, 다짜고짜 “형님이 옳았습니더.” 그러면서 성경의 이곳저곳을 마구 말해대기 시작했다.

‘몇 년 전에 교회 가는 나를 거의 미친 사람으로 취급했던 분명한 기억이 있는데,·······.’

그래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너야 말로 어쩌다가 이래 됐노?”

“예, 그 때는 참으로 형님이 잘못 가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때 그런 말을 했는데, 뜻밖에도 형님이 ‘내가 할끼 없어서 이 짓 하겠나?’ 하는 그 말이 엄청 가슴에 박혔습니더. 그 말을 되새기다 보니, 결국 이렇게 됐습니더. 지금은 어느 침례교회 주일학교 아이들 부장 합니더.”

‘그럼 그렇지. 하나님께서 또 한 번 희한한 일을 하셨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대리시험 보신 하나님의 영(성령)


1991년. 신학교를 가려면 먼저 세례를 받아야만 했다.

그래서 부산 3영도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교회에서 세례를 받기 전 성경을 한 번 꼭 읽어야한다고 했지만, 교회 나온 지 일년도 되지 않아 영 부담스러웠다.

신약은 여러 차례 정독하였지만 구약성경을 포함한 전체 통독은 너무 진도가 나가지 않았고, 고어체라 무슨 말인지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세례를 받기 전에 통독을 한 번 했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서울 어디에서 5일 동안 성경 전체를 읽는다는 한 선교 단체의 광고를 보게 되었다.

마침, 검정고시를 준비하기 위해 직장을 그만 두어 시간이 되었다.

서울역에 도착하여 집회장소를 찾아 갔다.

개회 예배를 드리고 성경 창세기 1장부터 읽기 시작하는데, 성경 66권 각 성경에 대한 개요의 언급 외에 본문을 읽는 동안 설명도 없었다.

구약 성경을 읽는 며칠 동안 이해도 되지 않는데, 내리 읽기만 하니 답답한 시간이 대부분이었고, 너무 지쳤다. 허리도 아프고, 눈도 피곤하고.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읽기만 하니 너무 힘들고 답답했지만, 다시 읽으려고 시도하기를 여러 차례, 낭독하시는 분이 예레미야 31장을 읽어가던 도중 내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어? 왜 이러지?  읽는 내용도 모르는데 눈물이 왜 나는 거지?’

(이후 성령님의 눈물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한 선교사님의 어린 아들과 어머니를 고향 방문차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 또 흘렀는데, 그 사건이 있은 후 며칠 뒤에 두 사람은 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어 몸의 감각이라 할 수 없는·······, 또 다른 감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데, 그 말씀을 듣고 읽는 가운데 가슴에서 신비한 뜨거움이 느껴졌다.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성령님이 계신다고 하더니만 말씀을 읽는 도중에 그걸 확인시켜 주시는 거구나!’

그 날 저녁 식사를 마치고 다시 집회를 시작하였다.

성경을 읽기 전에 사회자가 “혹시 말씀을 읽다 은혜 받은 것이 있으면, 대중 앞에서 말해도 좋습니다.” 라고 하였다.

어떤 분은 성경을 읽으려고 애쓰다보니 계속 안경을 바꿔가며 읽을 수밖에 없었는데, 어느 순간에 안경을 쓰지 않고 글자가 크게 보여 안경을 벗고 성경을 읽는다고 하였다.

너무 놀랍고 그 말을 듣고서도 믿을 수 없었다.

또 집회에 참석한 어떤 여선생님은 여자에게만 있는 병이 자기에게 있는데, 성경을 너무 읽고 싶어 집회에 참석했다가 그 병이 다 나았다는 말을 하였다.

더군다나 참으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어느 연세가 지극하신 할아버지 한 분이 성경 말씀을 사모하다 이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예레미야 31장을 읽던 중 가슴 속에 불같은 기운을 느꼈다는 것이다.

‘너무도 정확히 나와 똑같은 일을 할아버지도 그 순간 똑같이 느꼈다니!’

‘아! 성령님이 동시에 임하셨구나!’

신약성경의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의 이름으로 죄 용서함을 받는다.”고 말씀을 전하자 그 말씀을 듣던 고넬료와 그 함께한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했다는 성경 내용이 기억났다.

‘아! 바로 그 성령님이 말씀을 듣던 저 할아버지와 나에게 동시에 임하셨구나!’ 라는 확신이 밀려왔다.

나도 저 할아버지와 동일한 체험을 했다고 외치고 싶었지만, 다시 성경을 읽는 상황이라 그럴 수 없었다.


집회에 다녀온 이후, ‘성경이 단순한 책이 아니구나!’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더니 정말 소중하게 다루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으니, ‘누군들 보이지도 않고 들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음성을 보고 들을 수 있단 말인가!’

특별한 선물이요, 특권이라 여겨졌다.


돌아와 계속해서 말씀을 읽고 외우고 다녔다.

그 즈음 검정고시를 준비해야 했다.

4월 시험은 주일이라 피했고, 평일에 보는 8월 시험을 준비해야 했다.

3~4 개월 남았는데 평균 60점만 되면 합격선이니 별 일은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당시에는 과목별 과락이 적용되었기에 40점을 넘기지 못하면 아무리 평균이 높아도, 전체 합격이 되지 못해 고등학교 졸업 자격이 주어지지 못하는 것이다.

다른 과목은 문제없는데 수학이 골칫거리였다.

중학교 2학년 때 수학 선생님이 여선생님이라, 할 수 없이 창피해서 벼락치기로 공부하여 중간고사 문제를 푼 기억 외에, 수학에 흥미를 느낀 적이 없다.

그나마 그 선생님이 전근 가시자 별 재미도 없던 수학, 아예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풀면 풀리는데 그걸 왜 붙잡고 있어야하는지, 답답한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라 여겨 늘 달갑지 않던 차였다.

1년 가까이 돈 한 푼 내지 않고, 장학금으로 부산 연산로터리 근처의 학원(영광고시학원)을 다녔지만, 몇 년이 지났고 여전히 흥미가 없는 과목이었다. 

거기다 그 즈음 하나님만 아시는 심적 고통이 찾아왔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시작된 정신적 고통은 다 사람이 원인이었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몇 달을 허비하다, 마음을 가다듬어 보려했으나 시험 준비를 전혀 할 수 없었고, 억지로 책을 폈으나 무기력하게 지쳐버리는 스스로를 발견하곤 했다.

시험 당일.

서면의 한 중학교.

전혀 시험 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지만,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서 43장 말씀을 통해 “내가 너와 반드시 함께 할 것이며 물 가운데로 지나가더라도 엄몰치 못하며 불 가운데로 네가 지날지라도 태우지 못할 것이라. “는 말씀을 상기시키셨다.

그래서 다시 용기를 내어, ‘그래 수학만 과락을 넘기면 다른 과목쯤이야 해 볼만하지‘라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런데 실력과 의지는 구분됨을 이후 절감했다.


수학 시험지를 받았다.

첫 번째 문항을 풀어나가다 막히자, 스스로도 ‘그럼 그렇지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았으니 당연한거야.’

스트레스 받지 말고 그냥 두 번째 문항을 풀기 시작했다.

역시 막혔다. 깜깜했다.

세 번째 문항은 아예 무슨 뜻인지?·······.

다른 문제를 훑어보다 적당히 풀릴 것 같은 문제를 붙잡고 매달렸다.

눈물이 흘렀다.

‘자식이 신학대학교 간다고 아버지 어머니는 철석같이 믿고 계시는데, 하나님. 하나~

니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

한 문제도 풀지 못했다.

수학적으로 불합격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상황이었다.

‘아~ 이제 끝이구나!·······.’

비참했다.

하지만 그 때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시면 혹시라도·······.’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뚱딴지같지만 수험표 뒤에 적당히 찍은 답안을 메모하였다.

울면서·······.

시험장을 어떻게 걸어 나왔는지 그 날의 답답한 무게는 아직도 느껴진다.


으레 검정고시를 치루고 나면 학원마다 문제지와 모범 답안을 게시판에 공고한다.

시험을 본지 3일 뒤, 집에서 가까운 검정고시 학원에 갔다.

1991년 8월 대입검정고시 문제와 정답을 게시하였다.

한 문제라도 제대로 풀어 답을 적어내지 못했던 터라,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너무 떨렸다.

‘혹시라도 합격할 수 있다면·······.’

너무 염치없는 기대이지만 하나님께서, 하나님께서 하신다면·······.


수학 문제 1번답을 확인했다.

맞았다. “우 와~” 하나라도 맞추었다니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내 인생에 처음부터 풀린 날이 있었던가!’

2번 문제의 답과 수험표에 적어 두었던 답과 대조해 보았다.

‘이럴 수가!’

또 맞았다. 심장에서 엄청난 힘이 목으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

즉시로 3번답을 확인했다.

동일한 답이었다.

온몸이 마비되는 듯 했다.

‘이러다가 혹시 합격되는 것 아닌가!’

동시에 형언할 수 없는 어떤 엄청난 무게가 함께 하는 것 같았다.

4번답을 살펴보았다.

정답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다 맞아버리는 것 아닌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두려움이 나를 감싸는 듯 했다.

5번도 맞고,

6번도,

7번 맞고,

8번도 정확하게 수험표 뒤에 메모했던 답과 문제지의 답은 일치했다.

(수학은 총 20문항이고 8개만 맞추면 40점 과락을 면하는 것이다!)

일이 이 정도 되니 9번은 혹시 틀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9번은 메모와 일치하지 않았다.

그리고 9번 문제 이후 ‘적당히 몇 개 맞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대강 훑어보았는데, 역시 대충 몇 개 더 맞았다.

신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1991년 8월에 실시된 대한민국 대입검정고시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거룩한 하나님의 영이 대리시험을 본 것이다.


이 사건의 사실 유무와 진위는 1991년 8월 부산시교육위원회에서 시골집으로 통지한 성적표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그 초록색 통지문은 아직도 잘 보관하고 있다.



 * 하나님의 섭리에는 일반섭리와 특별섭리가 있다. 

 준비 없이 어떤 결과를 얻고자 하는 것은 그릇된 욕망이고 맹신이다. 일반섭리는 과학적이며 준비된 자를 사용하신다. 다만 인간이 그 과학을 다 알지 못하는 것이 한계다.

 특별섭리는 일반적으로 불완전한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며 하나님의 특별한 일이다. 기적이나 특별한 능력 등을 말한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계획은 인간의 사정과 관계없이 반드시 성취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