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할 짓이 없어서 이거 하겠나?


검정고시를 치루고 부산의 한 신학교에 입학했다.

여전히 부모님이 농사지으며 살고 계시는 밀양.

창고를 개조해 교회로 사용하고 있던 곳에 ‘하나님이 계신가?’ 하며 확인하러 나가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신앙을 시작했던 교회.

그곳에서 신학교 2학년 때, 전도사로 교역자 인턴을 시작했다.

무늬만 전도사지 신학도 잘 모르는 시절.

그 해 여름, 매 주일 고향 교회에 내려갔었는데 영도에서 사상 터미널로, 그리고 밀양행 직행버스를 타고 다니곤 했다.


드문드문 우거진 강가 풀숲 사이로 낙동강 모래사장이 내려다보이는 둑을 따라 걷노라면, ‘농마’라고 불렀던 대원마을이 제일 먼저 지나다니는 이를 맞이한다.

마을 입구 왼편에는 어느 양식장에서 도망쳐 나와, 잘 살고 있다는 황소개구리 울음이 들리는 연못도 있다.

둑에서 가까운 도랑을 따라 계속 가다보면, 여름방학을 맞은 아이들이 빨래터에서 옷을 빨기도 하고, 자전거 타고 논에 물대러 가는 선후배라도 마주치면 쑥스럽게 인사하다 어느새 대평마을에 들어 서 있다.

우리 집으로 들어오는 길옆에 수양버들이 한 그루 있었다.

항상 버들가지가 축 늘어진 아래로 옆집 못생긴 황소가 되새김질을 하면서, 너저분한 짚을 방석으로 삼아 매여 있었는데, 길을 지나가던 개들이나 사람들도 그 휑한 큰 눈과 시선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거의 반사적으로 관심 없는 모습으로 털레털레 가는 길을 다시 가던, 그래서 더욱 그 황소의 입장이 참 묘한 분위기로 아스라이 남았다.

이 소는 늘(常) 그런 식으로 지나가는 모든 생물체를 맞이하곤 하였다.

7월의 더운 여름 한날, 여름성경학교 행사가 있어 교회로 가고 있었다.

둑 아래 교회를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도랑 위 다리를 건너야 했고, 당시 200여 가구의 문화생활을 가능하게 했던 한 가게가 나온다.

이 집 아들이 한 해 후배인데, 듣기로는 대구에서 대학교를 다닌다고 했다.

평소에는 얼굴을 볼 수 없었는데, 그 날 도랑을 건너다 같은 대학 친구들로 보이는 군상들과 평상 위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지나가던 나를 보더니, 선배라고 인사를 했다.

“아이고~ 형님, 안녕하십니꺼?”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그런데 그 다음 한 마디가 비위를 거슬렀다.

“아이고~ 형님 어쩌다가 그리 됐습니꺼?”

교회 가는 걸 시비 삼는 것이다.

‘이 녀석이 집에 팔려고 받아 둔 술을 마시더니 과했나!’

여러 사람 앞에서 선배 대우를 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발가벗기고 싶어 말을 건 것으로 여겨졌다.

순간 엄청 화가 났지만 참았다.

그래도 한마디는 해주어야 했다.

“내가 할 짓 없어 이거 하겠나?”

한 마디 뱉고 교회로 갔다.

교회에 들어서자마자 교회당 바닥에 무릎을 꿇고, 풀리지 않는 분을 삭이며 기도했다.

너무 분하여 무언가를 하나님께 쏘아대고 싶은데, 저주를 할 수도 없고,·······.

‘저게 아직 몰라서 그러니  오~ 하나님. 저 영혼을 불쌍히 여기소서.’

괘씸한 마음이 풀리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런 경우, 마땅히 할 수 있는 기도가 없어 억지로 그 기도를 했다.


몇 년이 지났다.

어느 날 아침,  오랜만에 고향에 가는 길이었다.

사상터미널. 고향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그 후배를 다시 만났다.

먼저 반갑게 인사를 하더니, 다짜고짜 “형님이 옳았습니더.” 그러면서 성경의 이곳저곳을 마구 말해대기 시작했다.

‘몇 년 전에 교회 가는 나를 거의 미친 사람으로 취급했던 분명한 기억이 있는데,·······.’

그래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너야 말로 어쩌다가 이래 됐노?”

“예, 그 때는 참으로 형님이 잘못 가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때 그런 말을 했는데, 뜻밖에도 형님이 ‘내가 할끼 없어서 이 짓 하겠나?’ 하는 그 말이 엄청 가슴에 박혔습니더. 그 말을 되새기다 보니, 결국 이렇게 됐습니더. 지금은 어느 침례교회 주일학교 아이들 부장 합니더.”

‘그럼 그렇지. 하나님께서 또 한 번 희한한 일을 하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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