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출애굽


애굽(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시내산에서 늦게 내려오자, 모세의 형 아론에게 우상을 만들어 줄 것을 요청한다.

마침내 아론은 그들의 불만을 잠재울 수 없음을 알고, 집요한 요구에 응하게 된다.

금붙이를 모아 황금송아지를 만든 그들은 이 형상이 자기들을 이집트에서 구원해 낸, 하나님이라고 의미를 부여하며 즐겁게 뛰어 논다.

불투명한 앞날에 불안을 느낀 이스라엘 사람들이 취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여정까지 동행했던 하나님에 대한 기억보다, 이집트에서 보고 들은 것을 적당히 혼용하며 그들의 생각과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 고작 취할 수 있었던 전부였다.

몸은 이집트에서 빠져 나왔지만 영혼은 출애굽을 하지 못한 것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함에도, 채워지지 않는 욕구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과거에 의존하며, 손쉬운 수습을 취하는 인간의 전형이다.

새롭게 맞이한 현실에 대해 정직한 해석이나 노력을 기울이기보다, 자신들의 불만이나 불안 요소를 해소하는 것이 우선 가치이다.

신(新)정신분석학파 에릭슨이 말했던, 현재의 인간발달 단계에서 채워지지 않는 문제점에 대해, 과거의 회귀를 통해 안정감을 찾는 인간 심리의 단면이다.

인간은 과거로 돌아갈 수 없고, 과거에 살 수 없다.

오직 과거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 오늘을 살게 하고 내일을 변화시킬 수 있다.

하지만 과거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판단, 대처 능력이 있었다면 지금의 불만족은 있을 수 없다는 명제가 도출됨으로,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은 새로운 믿음의 대상과 신뢰, 갈등에 대한 재해석을 필요로 한다.

새로운 방식은 익숙하지 않다.

몸에 맡지 않고 불편하다.

이 때 감내할 만한 믿음과 용기가 필요한데 사실, 그 대상이 과거와 바꿀만한 매력이 없다면 그 능력은 발생할 수 없다.

여기에서 그 대상의 매력을 발견하거나 찾을 수 없는 이유는 무지, 무기력, 무관심, 탐욕, 싫증, 선입관, 편견, 불신 등이 작용한다.

그리고 자신의 주제나 분수를 파악하지 못할 때 그 가치를 모른다.

배우자를 선택하는 기준이 성장기 때 좋은 감정을 느꼈던 사람들(부모, 선생님, 친구, 다정한 이웃 등)과 닮거나 비슷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사람들이란 점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인간은 기본적으로 안정감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하나님의 신부라 불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각종 기적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체험하였으나, 이 불편함과 불안을 고수하면서 까지 그들이 따라 나선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눈에 보이는 영도자 모세까지 없는 판국에 술렁이기 시작했다.

비유하자면, 첫사랑과 지금의 남편이 비교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이집트는 첫사랑이라 부를 수 없는 괴로움의 땅이었는데도 기분과 상황에 따라 ‘차라리 그놈이 좋았지 않았을까?’라고 여기며 현재의 아쉬움을 대신하고 싶은 것이다.

새로운 관계에 들어와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음에도 사고가 왜곡되어 가고 있는 모습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감각적이다.

오감에 의존하며 경험에 바탕을 두고, 미래를 선택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얻고자 하는 앞날의 결과는 과거와 현재의 해석과 판단에 기초하지만, 창의적인 선택과 결정으로 의미 있는 과거와 현재를 재생산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삶의 목적과 방향에 대해, 하나님과 그 분의 말씀을 믿음으로 홍해를 건넜다면, 거기까지 이르러 겪는 불편한 상황에 대해 전혀 다른 해석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들은 종래의 습관대로 불평과 불만으로 일관했고, 그 결과 공동체에 혼란을 야기했을 뿐만 아니라 정체성마저 왜곡시켰다.

문명의 편리함과 물질만능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시대에, 사랑으로 시작하였으나 경제적인 이유로 서로를 원망하며 결국 돌아서는 사람들을 본다.

사랑을 돈으로 사려고 했으니, 그 돈으로 사랑의 가치와 품위를 유지하려 했으니 실패했다.

이유는 댈 수 있다.

“사람이 돈 없이 살 수 있냐고?”

사람들은 극단적인 말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 돈으로 사랑을 살 수 있는가?(Can we buy love by money?)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주린 상태임을 알고 마귀가 “떡 없이 사냐고?” 묻자 이 말씀을 하셨다.

사람이 밥 먹지 않고 살 수 있다는 말씀이 아니라 절대적인 가치와 상대적인 가치가 공존할 수 없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굶으신 가운데서도 양보할 수 없는 그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사랑은 절대적인 것이며 책임과 희생을 수반한다.

그 사랑이 진짜인지는 광풍을 만나봐야 안다.

사랑은 조건이 없어야 한다.

사랑에는 타산이 없어야 한다.

물질은 인간을 편리하게 하지만 관계보다 우위에 둘 수 없으며, 필요한 것임에도 선택을 요하는 상황에서 순위에 낄 것이 못된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 그들이 사랑을 논한다면 소중한 그들만의 관계에서 그 사랑을 세파의 소용돌이 속에 함께 견디며 증명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는 이를 알 수 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

불순종한 인간의 자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영광, 명예, 권좌를 버리고 낮아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정죄하고 즉심에 넘겨 형벌하시면 될 것을 하나님의 사랑은 감히 인간이 헤아릴 수 없이 높고 깊어 대신 친히 온갖 창피와 모욕, 고난, 고통을 다 겪으셨다.

인간 편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에 사람은 아예 무능하여, 인류의 죄 값을 대신 치러주시고 하나님과 화해의 제물이 되신 것이다.

인간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희생과 책임의 모범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인류는 발견하였다.

사랑을 시작하는 젊은이, 결혼을 꿈꾸는 사람들은 사랑에 대한 첫 강의를 성경에서 들어야 한다.

아울러 성서를 주신 하나님께서 그 결혼의 주례를 보셔야 한다.

인간적인 사랑은 한계가 있다. 완전하지 못하다. 자질구레한 조건을 붙이기도 한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좋은 조건에서 하는 사랑, 누군들 못하랴!

외모, 학벌, 경제력, 성격,·······.

과거를 잘 해석해야 한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을 부르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기억했다면, 또 베풀어주신 은총의 과거를 기억했다면 하나님을 황금송아지(당시, 이집트 멤피스에서 유행한 아피스 신: 힘과 풍요의 상징) 정도로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걸어서 한 달이면 목적지까지 갈 수 있는 광야 노정에서 이집트산(made in Egypt)음식 타령이나 하며 지도자를 원망하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나그네가 하루 묵을 여인숙에다 최고급 인테리어를 설계하는 것과 같고, 일회용 종이컵에 각종 보석을 박아 넣는 것과 다름없다.

노예 생활을 청산하고 급하게 이집트를 빠져 나온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부르신 이를 신뢰하며 절대 순종하는 가운데 고난을 끝까지 견뎌, 그 여정을 빨리 단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선택한 것은 당장에 편리한 불신앙과 불평, 불순종이었으며 동시에 주제와 분수를 잊어버리고 다시 걷는 걸음에서 하나님을 배제했다.

한 달이 40년으로 늘어도 목적지까지 들어가지 못한 그들의 불순종의 역사는 이후 후손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매 번 반복되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 이스라엘 역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떠나왔던 우상의 도시 바벨론으로, 430년 노예의 땅인 이집트로 원점회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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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는 없다.


사람들은 오늘이 고통과 좌절 속에 있다할지라도 내일에 대한 희망을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때로는 이런 생각이 신념으로 자리하고 그것이 신앙으로 발전한다.

그 대상이 가깝게는 자식이 되기도 하고, 재물을 얻는 것이기도 하며, 개인적인 명예, 권력이기도 하다.

그 신념은 이루지 못한 자아실현일 수 있다. 

아울러 사람들은 현세가 고통스럽더라도 내세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것이고, 앞이 보이지 않는 세상을 살며 그나마 그것을 유일한 버팀목으로 삼아 위로를 얻기도 한다.

윤회라는 것이 더 나은 삶을 위한 바람이 반영된 것이라면-그것이 국가나 세계 공동체, 인류공영을 포함한다할지라도-구도적(求道的)이라기 보다 기복(祈福)지향적인 현상이다.

세속적으로 표현하자면 계급투쟁이 될 수도 있고, 권력투쟁의 관점에서도 볼 수 있다.

인도는 힌두교의 윤회와 업 사상을 차용하여 카스트 제도를 확립했는데, 이것은 현재 철폐되었지만 여전히 민간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그들에게 있어 불행한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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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는 없다.



윤회는 필연적으로 전생을 전제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전생에 대한 총체적 이해와 기억이 없다.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았는지, 몇 번 윤회를 했는지.

내가 ‘나’를 모르는 윤회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자신에 대하여 모르는 자가 어떤 궁극적 목적을 이룰 수 있단 말인가?

혹자는 알아가는 과정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수행 중.


인간은 누구나 제한된 시간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죽음마저 자신이 의미를 부여하면서 여전히 삶처럼 계속 이용할 수 있는 과정으로 삼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러고 싶을 뿐,

죽음을 이기거나 초월, 극복하지 못한다.


자기 자신이 존재의 근원 또는 주체라는 아집을 정직하고 겸손히 내려놓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거듭 불필요한 윤회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윤회의 목적을 아는 사람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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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윤회를 한 적이 없다.’ 삶의 주체로서 윤회를 믿는다면, 그에 대한 기억과 경험이 없다는 것처럼 불안한 것은 없다.

  수십 억 인류 중 몇 명의 주장 외에 자신의 윤회 자체를 모르고, 지나온 세대 역시 마찬가지다.

  죽음은 정한 이치인데, 확신할 수 없는 이치도 존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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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는 없다.



윤회 [輪廻]

 

극단적으로 말해서, 전생이 있다면 돌아가신 아버지가 개가 될 수 있고 모기가 나의 아들이 되고 나는 나가 아니고 나는 너고 너는 나고 그리고 갑자기 나는 신(神)이 된다.

이따위 소리 더 들어주기 위해서는 목석이 되든지 소가 되든지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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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없으니 실재는 없는 것이다?

스스로 존재하든 의존해서 존재하든 관계 속에 공동으로 존재하든 존재하는 것 자체는 사실이다. 인간의 고유성은 진리다. 판단의 근거가 되는 개념을 부정하면 논리적 사고가 불가하여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 사고의 내용과 흐름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 인생을 번뇌로만 볼 것이 아니라, 기쁨과 행복, 사랑 자체를 부정할 수 없다. 구도자가 불행하다고 하여 남에게 그것을 느끼게 강요할 수 없다. 존재 자체에 의미를 두며 개인의 것이든 공동의 것이 든 목표- 진리-로 나아가야 한다. 구도자의 태도를 갖되 몰입과 폐쇄적 태도는 구분해야 한다. 오히려 구도자는 개방적이어야 하고 겸손해야 한다. 원소*를 쪼개면 사라진다고 하여 원자설을 부정했던 아리스토텔레스도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하지 않았던가!  한 두 가지 안다고 일반화하면 후대에 아리스토텔레스에 반감을 갖는 화학자가 생겨나듯 때가 되면 진리는 밝혀진다. 죽으면 끝이 아니다. 책임질 것이 있으면 영원히 그것을 져야 할 날이 다가오고 있다.


*현대의 원소 개념이 아님. 형상, 질료, unmoved move, 목적론적 개념 등 맥락에서 이해되는 바가 있으나 이 말은 어떤 글에서 화학자가 비판한 글을 그대로 재인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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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란 한 판에도 족보는 있다.

 

사람들은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하는 흔한 명제로 인간과 세계의 근원에 대해 불확실함 또는 무의미를 부여하여 불가지론으로 몰고 간다.

이는 삶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존재의 회의감마저 들게 한다.

덩달아 사람들은 이러한 사고의 흐름에 편승하여 확신할 수 없는 윤회사관을 은근히 지지하기도 한다.

윤회는 인생을 고통과 번뇌로 볼 수 있는 배경에서 나온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지만, 성경은 인간의 고통과 죽음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비롯되었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성경은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에 대해서 분명히 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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