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책 실비 제르맹 소설
실비 제르맹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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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껴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몇 십페이지가 넘어가 있을 만큼 놀라운 전개. 도입부터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는 흥미로운 서사. 발췌가 무의미할 정도로 빼곡히 들어찬 탄탄하고 아름다운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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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푸른숲 / 199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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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푸른숲, 2018)은 전기작가 슈테판 츠바이크가 프랑스 작가 오노레 드 발자크의 일생을 추적하여 서술한 평전이다. 그는 로맹롤랑, 횔덜린, 톨스토이, 니체, 디킨스, 마리앙투와네트, 메리 스튜어트 등의 평전과 전기작품을 남겼다. 한 인물을 집중적으로 탐구한 전기와 더불어 여러 작가들을 유사한 기준으로 분류하여 집필한 ‘정신세계의 건축가들’시리즈를 발간하기도 했다. 1부 <3인의 거장-발자크, 디킨스, 도스토옙스키>(1920), 2부 <데몬과의 싸움-횔덜린, 클라이스트, 니체>(1929), 3부<3인 시인의 생애 –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1928)을 출간했고, 이어 <정신에 의한 치료-메스머, 메리 베이커 에디, 프로이트>(1931)도 출간했다. 츠바이크는 여러 인물들 중에서도 발자크에게 각별한 관심을 가져 최후의 작품으로 상당한 규모의 <발자크 평전>을 쓰게 된다. 1939년 로맹 롤랑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30년 전부터 발자크를 읽고 또 읽고 있으며, 언제나 거듭 경탄하게 된다’(서문 중)라 고백한 바 있다. 그는 방대한 양의 발자크 관련 자료를 토대로 책의 골격을 세워놓았으나 미완의 상태로 1942년 생을 마감한다.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은 츠바이크 사후 3년 동료인 리하르트 프리덴탈이 정밀한 검토보완을 거쳐 발간한 작품이다.
    
유럽 3대 전기작가로 불리는 츠바이크는 1881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장서가였으며 제네바 국제연맹 지적협력위원회가 공인한 ‘세계에서 가장 많이 번역소개된 작가’(<어제의 세계>(지식공작소, 2014))였다. 그는 <로맹롤랑-인간과 작품>(1921), <조각가 프랑 마즈렐>(1923), <마리 앙투와네트>(1932), <메리 스튜어트>(1935) 등의 전기작품을 비롯하여 희곡 <예레미아>(1917), 소설 <체스이야기>(1941)를 남겼다. 거장들이 지닌 창조의 비밀을 파악하기 위해 30~40년간 4천가지가 넘는 필적을 수집하기도 했다. 츠바이크는 자서전인 <어제의 세계>에서 ‘수집활동의 마지막 10년 동안 기획한 것은 그것을 체계적으로 정련시켜 가는 일’이라 밝혔다. 그는 특히 발자크의 소설 교정지에 대해 ‘어느 페이지나 그야말로 하나의 전쟁터였으며, 수없이 많은 수정과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명료함을 가지고 교정에 교정을 거듭하고 있는 거인적인 투쟁을 표현하고 있었다’라 언급한다. <발자크 평전>은 평생에 걸쳐 수집한 예술혼의 비밀문서에서 창조의 과정을 밝혀내고 있는 츠바이크식 치밀함의 결정체이다.
    
책은 발자크의 탄생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인생행로를 650여 페이지에 걸쳐 담고 있다. 허풍과 허영이 뒤섞인 ‘훌륭한 이야기꾼’(p.26)이었던 아버지에게서 ‘생명력과 이야기에 대한 애착’(p.28)을, 냉정하고 질책만 가하던 어머니에게서 애정의 결핍을 물려받은 발자크가 생을 엮어가는 과정이 생생하게 묘사된다. 냉담한 어머니에게서 쫓겨나온 감옥 같은 기숙학교에서 발자크를 구원해준 것은 도서관의 책들이었다. 글을 쓰겠다는 발자크의 의지와 열망은 가족들의 반대에 저항하며 ‘가장 형편없고 비참하고 불쾌한 방’(p.58)에서 꽃피기 시작한다. 츠바이크는 수도승 같은 생활을 하며 ‘자유롭기를, 유명해지기를’(p.74) 간절히 바랐던 발자크의 창작열을 ‘갈레 선(船)의 노예’(p.89)에 비유한다. 발자크는 자유롭기 위해 부모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없고 빈궁한 형편을 지속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 남몰래 글을 끄적거리는 노예’(p.88)가 되기를 자처하며 쉼없이 글을 썼다. ‘어떤 장르, 어떤 주문, 어떤 공저(共著)도 상관하지 않’(p.93)고 기계처럼 써내려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글과 자유에 대한 갈망이 ‘가족의 노예상태에서 해방시켜줄 수 있는 어떤 여자하고도 결합할 각오’(p.105)를 실현시켜 나가는 과정 또한 흥미롭다.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서 얻지 못한 ‘거친 내면을 섬세하게 만들어주고 매끄럽게 해줄 손길’(p.114)을 가진 연상의 여인 베르니 부인, ‘헌신과 정직성의 능력’(p.208)을 갖춘 쥘마 카로, ‘생애의 중심점이자 진정한 심장’(p.222)이 되는 한스카 부인, 경제적 자유를 기대하며 만났던 여러 귀족 부인은 발자크의 인생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동반자였다. 삶의 중심축이 창작에 있었다면 이를 굴러가게 할 보조바퀴는 여인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발자크는 쓰고 또 쓰고 또 쓴다. 휴식 없이 중단 없이. 그의 상상력은 한 번 불붙으면 한없이 불붙어 타오른다”(p.242) 츠바이크는 발자크의 하루를 시간대별로 기록함으로써 한스카 부인과의 밀회조차도 한정된 시간만을 내어줄 만큼 엄격한 창작 노동자였음을 증언한다.
    
책은 가난한 노예처럼 글을 쓰는 일면에 사치스러운 지출을 통한 망상이 자리잡고 있는 발자크의 아이러니한 면모를 기술하기도 한다. 글로써 유명해지고자 했던 욕망은 여러 사업에의 도전과 실패, 귀족같은 화려한 생활로 점철되었다. 부지런히 글을 팔았지만 대차대조표의 마이너스를 지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의 내부에 있는 어떤 것은 -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그의 존재의 가장 내면적인 본질일 것이다 – 그의 외적인 삶의 온갖 파국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고, 이 태풍을, 안전한 육지에서 미쳐 날뛰는 바다를 쳐다볼 때와 같은 긴장된 호기심으로 바라만 보았다.”(p.426) 그러나 압류, 소송, 파산, 난국, 감옥에서 보낸 시간들조차 발자크의 창작열을 식히기에는 역부족이었으며, 오히려 동력이 된 듯 보여진다. 이에 대해 츠바이크는 “상황이 그를 무겁게 짓누를수록 수은기압계처럼 그의 생명욕구는 위로 올라갔다”(p.427)라 해석한다.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은 츠바이크의 생동감 넘치는 묘사와 위트있는 문체를 통해 건조할 수 있는 평전을 다이내믹한 인생드라마로 바꾸어 놓았다. 발자크의 족적을 따라다니며 밀착취재하듯 써내려간 원고는 친구인 프리덴탈에게 전해져 수정작업을 거쳐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프리덴탈은 츠바이크의 발자크에 대한 표상을 “전쟁이 터지기 직전에 그가 이사했던, 바스(Bath)에 있는 집의 작은 서재는 발자크 박물관, 발자크 문서고, 발자크 사무소가 되었다“(p.684)로 술회한다. 츠바이크가 10년을 기울여 치밀하게 재구성해나간 발자크의 생애는 천재적 창작기질, 노예노동과 같은 부단한 집필작업에 자신의 모든 시간을 쏟아부은 위대한 인간을 확인시킨다. 결핍된 모성애와 성공을 향한 열망에서 발현된 귀족 여인들과의 교제에서는 범인(凡人) 발자크를 만나기도 한다. 평소 발자크의 작품에 관심이 있던 독자에게는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이 작가와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단초를 제공해 줄 수 있다. 반면 발자크를 처음 접하는 이에게는 상당한 분량의 연애와 사업실패 스토리가 작가로서의 위대성을 희석시키는 요인이 될 우려도 존재한다. 담백한 서술보다 은유와 묘사를 택한 츠바이크의 문장은 평전이 가져야 할 신뢰성에 의문을 줄 수도 있다. 츠바이크의 모든 평전 작품들 중에서 양으로나 질로나 가장 큰 공을 들인 작품이라 평가되는 <발자크 평전>. 발자크라는 작가를 보다 자세히 알고 싶은 이들에게는 풍부한 기록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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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의 마음
김금희 지음 / 창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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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의 마음>(창비, 2018)은 2016년 <너무 한낮의 연애>로 젊은작가상 대상을 수상한 등단 10년차 작가 김금희의 소설이다. 그녀에게는 1년간 계간지에 <경애의 마음>을 연재했지만 소설의 끝을 맺지 못하고 연재 마감을 한 이력이 있다. 이 후 ‘못하겠다는 생각과 몇 년을 더 묵힐까’(채널 예스 인터뷰 중)라는 고민 끝에 반 년간 힘들게 이어 써 완성한 작품이다. 시공간적 배경은 현재의 서울과 베트남이지만 작가가 평생을 자란 인천과 20대 초반이었던 1999년이 교차하며 등장한다. 작품의 중심에는 작가 자신이 ‘인천에서 성장한 아이가 봤던 비극적인 사건’(채널 예스)이라 밝히는 1999년 ‘인천 호프집 화재 사건’이 중요한 소재로 자리잡고 있다.

작가는 ‘그의 차로 말할 것 같으면 그의 인생을 모두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데’(p.8)라며 소설의 첫 문장을 시작한다. 그의 오래된 소형차에는 ‘자질구레한 소지품들’과 ‘수많은 카탈로그’, 영업처 사장들에게 실물의 세계를 환기하는 ‘기계가 감아올릴 실’(p.10)이 실려 있고 ‘혼자 끼니를 때울 때 애용하는 편의점 도시락 냄새’가 배여 있다. 이 차의 주인 ‘그’는 ‘1953년’(p.11) 설립된 반도‘미싱’에 10년째 다니고 있는 영업 ‘팀장대리’ 공상수이다. 차 안의 분위기, 사회적 위치를 정확히 짚어주는 수식어들에서 그의 이미지가 그려지기 시작한다. 사양산업의 인식을 가진 섬유제조업체 거래처인 미싱회사, 팀원이라곤 자신 뿐인 명목상 팀장이라는 지위는 위태로운 현실을 보여주는 장치로 작용한다. 상수의 불완전하던 팀은 ‘프랑켄슈타인프리징’이라는 이메일 아이디를 쓰는 경애가 팀원으로 들어오며 구색을 갖추게 된다.

상수는 불안한 실물의 세계를 살고 있지만 확고한 듯 보이는 가상의 세계 또한 병존한다. 그는 ‘언니는 죄가 없다(언죄다)’(p.33)라는 페이스북을 팔년 째 운영중이다. 상수는 ‘팔로워가 이만명에 이르는’ 그곳에서 사랑의 소멸에 아파하는 여성들을 위로하는 ‘언니’가 된다. 반도미싱은 그를 언니도 오빠도 형도 아닌 ‘그것’(p.37)으로 느끼게 하지만 ‘언죄다’는 ‘언니라는 존재 전이’를 가능하게 한다. 반도미싱 영업팀이라는 실물세계에서 ‘경애의 면제 상황’(p.55)을 유도하고 ‘마음에 관한 죄 없음을 보장해주는’(p.226) 한 ‘언니’와 ‘프랑켄슈타인프리징’으로서의 경애를 이어주는 곳이기도 하다. ‘언죄다’는 상수에게는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동시에 경애에게는 ‘잃어버린 사랑의 온도’(p.327)를 안전하게 식혀주는 공간이다.

상수와 경애에게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있는’, ‘아주 많은 행운’(p.62)은 반도미싱의 팀과 ‘언죄다’에서 찾아왔지만 그 ‘행운’의 힘은 이미 과거의 어느 시공간에서도 작동하고 있었다. 1999년 상수의 ‘유일한 친구’(p.42)였고 같은 시기 경애가 영화동호회에서 만나 처음 사랑의 온도를 느낀 은총은 둘 사이에 놓인 교차점이었다. 화재 사건으로 인해 열 아홉살 순수한 소년으로 영원히 둘의 가슴에 묻힌 은총은 상수에게는 ‘죄책감’(p.42)으로, 경애에게는 ‘어떤 손상에 대한 걱정’(p.222)으로 남아있다. 그는 이별의 고통에 ‘마음을 어떻게 폐기하느냐’(p.176)고 묻는 경애의 마음을 순수했던 시절 속으로 데려가고 ‘저는 파괴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p.202)라는 그녀의 말에 상수에게 ‘부끄러움과 슬픔’의 감정을 안긴다. 순수함, 부끄러움, 슬픔과 같은 원초적 감정들은 불안한 시절을 넘기고 있는 두 남녀에게 있어 안식처이기도 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되돌아보고 단단하게 만드는 동력이기도 했다.

20년이 흐르는 사이 ‘이제 마흔에 가까워진, 어느정도 포기와 축적으로 '삶'이라고 할 만한 것의 얼개를 완성해가는’(p.94) 나이가 된 인물들은 불안의 시기를 살아내는 3040세대를 대변한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고등학생은 어른들의 비리와 부정의 희생양이었지만 오히려 비난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재수, 삼수를 겪고 들어간 대학생활의 결말은 좁은 취업문 앞에서의 좌절로 표출되었다. 사랑은 조건 앞에서 포기되었으며, 정직한 회사생활은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나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었다. 소설은 현재의 마흔이 겪어 온 지난 20년의 아픔, 그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해온 포기와 포기의 축적을 담아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의 의미를 찾아가는 주인공들의 분투를 담담하고 섬세하게 그리고 있다.

작가는 1999년에 발생한 인천 호프집 방화사건이라는 팩트를 그대로 가져와 소설의 배경으로 삼았다. 사실 안에 허구를 그려넣음으로써 현실감과 긴장감을 적절히 배치한 작가의 센스가 돋보이는 지점이다. 국내에서는 저물어가는 분야인 섬유산업을 배경으로 하고 작은 생존의 희망을 찾아 ‘과떼말라나 사이판같이 옛날 미국 기업들의 하청공장이 있던 지역이나 중국, 말레이시아 같은 아시아 전역에서 몰려오는 곳’(p.205) 베트남이라는 지역까지 작품 속에 끌어온 치밀함은 비애감을 더한다. 영화 ‘타이타닉’, 가수 ‘델리스파이스’ 등 20세 전후에 세기말을 살았던 독자들에게 추억을 불러오는 소재들을 차용하여 공감을 끌어내는 기술 또한 인상적이다. 한 장면을 포착하여 세밀하게 그려내는 생생한 묘사는 마치 영화를 보고 있는 듯 하다.

작가는 <경애의 마음>이라는 제목과 달리 처음부터 상수를 먼저 소개하고 조연처럼 경애를 등장시킨다. “상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p.352)라 시작하는 마지막 단락의 첫 문장까지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은 의도를 궁금하게 만든다. 그러나 작가는 곧 친절하게도 “자기 자신에 관한 이야기. 서로가 서로를 인식하지 못했지만 돌아보니 어디엔가 분명히 있었던 어떤 마음에 관한 이야기였다”고 전하며 소설의 문을 닫는다. 청춘의 절정에서 밀레니엄을 맞은 세대, 혼돈과 불안이 뒤섞인 기대 속에서 젊음을 보낸 세대라면 상수와 경애의 마음을 따라가고 들여다보며 자신의 마음을 발견하게 될 터이다. 그 안에서 위로와 희망, 끝나지 않을 그들의 이야기 그리고 독자 자신의 이야기를 그려나갈 용기를 선물받을 것이다. 다만 중심 인물이 특정 세대에 한정되어 있어 다양한 연령층의 독자층을 끌어들이기에 한계가 보인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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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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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무해한 사람>(문학동네, 2018)은 소설가 최은영이 2016년부터 2년간 발표했던 단편을 묶은 소설집이다. 최은영은 2013년 중편소설 「쇼코의 미소」가 『작가세계』 신인상에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첫 소설집 <쇼코의 미소>(문학동네, 2016)로 대중 독자들 앞에 섰고 출간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네이버 책의 스테디셀러로 기록되고 있다. ‘인간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아야 한다’(여성신문, 2018.9)는 철학을 가진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을 통과해서 세계를 보고자 했던 소망을 여러 단편들을 통해 담아내었다. 최은영은 <내게 무해한 사람>에 실린 작가의 말에서 “이 책에 실린 일곱 편의 소설에는 내가 지나온 미성년의 시간이 스며 있다. 쉽게 다루어지고, 함부로 이용될 수 있는 어린 몸과 마음에 대해 나는 이 글들을 쓰며 오래 생각했다.”(p.323)라 밝힌다. 그녀의 작품들은 1984년생인 작가가 살아온 시간 안에 아로새겨진 아픔과 아물어가는 상처를 보여준다.

<내게 무해한 사람>은 ‘그 여름’, ‘601, 602’, ‘지나가는 밤’, ‘모래로 지은 집’, ‘고백’, ‘손길’, ‘아치디에서’의 일곱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른넷의 늦은 봄에 열여덟 살의 추억을 돌아보는 ‘그 여름’, 1988년으로 기억의 시계를 돌린 ‘601,602’, 일 년에서 오 년 반 그리고 더 과거로 거슬러가며 인물들의 갈등을 보여주는 ‘지나가는 밤’ 등 단편들은 모두 시간을 되돌아가 지나간 감정들을 회고하듯 바라본다. 주요 인물들은 작가와 동시대를 살아온 현재의 30대로 8,90년대의 시대적 배경 안에서 고뇌하던 자신과 타인을 보듬는다. 작가가 한 인터뷰에서 “1세계 백인 남성이 아니고 미국, 영국, 네덜란드 사람도 아닌, 21세기 한국의 1980년대생 여성임을 생각하며 소설을 쓴다”(여성신문, 2018.9)고 한 것 처럼 그녀가 창조해낸 인물들 역시 여성이 중심에 있다.

‘그 여름’에는 동성애 관계에 있던 고등학생 수이와 이경, ‘601, 602’에는 집안에서 여자라는 이유로 학대받는 효진, ‘지나가는 밤’에는 엄마의 죽음 후 남남처럼 소원해진 자매 주희와 윤희가 있다. ‘고백’에는 커밍아웃의 상처로 자살한 여고생 진희가, ‘손길’에는 친구처럼 사이좋은 아내였지만 윗세대에게 불경스럽게 보이는 숙모가, ‘아치디에서’에는 가족에게 양보하며 감정을 억눌러온 하민이 작가의 섬세한 터치로 그려진다. 인물들이 마주하게 되는 현실은 어떤 계기나 결정적 사건으로 인해 야기된 결과가 아니다. 그녀들은 자연이 만들어낸대로 태어났지만 세상은 기성 세대가 짜놓은 틀에 맞추라고 했다. 인물들은 시간이 흘려보내는 강물의 퇴적과 침식 사이에서 유수에 몸을 맡기기도 하고 때로는 버티기도 하며 어른의 삶으로 나아간다. “단 한 명이 필요했어요. 단 한 명, 내 편을 들어줄 단 한 사람.”(p.42)이라는 고백은 여린 잎이 단단해져 가는 과정 속에서 삼켜야 했을 아픔과 상처를 쓰다듬는다.

각각의 작품 속에는 외적으로는 세계화와 경제부흥의 흐름을 타기 시작했지만 가정과 개인의 면면에는 가부장적 사고가 짙게 깔려있던 80년대의 유년이 담겨있다. 거기에는 ‘셋이라는 숫자 안에서 모두가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p.193)던 외로움, ‘너에겐 아무 잘못이 없어. 넌 나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아니야, 라는 말조차 상처를 입힐 것 같아서’(p.49) 아무말 하지 못했던 소심함, ‘어떤 이유도 없이 무조건 부모를 좋아하는 마음’(p.219)의 순수함이 있었다. 친구의 ‘거짓말을 이해할 수밖에 없’(p.71)는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하고 때로는 ‘길가에 널브러진 비닐봉지 같은 존재’(p.248)와 같은 허무함이 찾아오기도 한다. 타인의 처지를 보며 ‘그런 집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기도 했고, 그애가 자기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모습에 반감을 느끼기도’(p.78)하는 내적갈등을 겪으며 어른이 되어간다.

작가는 감정을 억누른 채 유년을 지내야 했던 이들에게 마음껏 슬플 수 있는 시간을 선물한다. ‘때때로 타인의 얼굴 앞에서 거스를 수 없는 슬픔을 느끼’는 인간 본연의 감정에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독자는 작품을 읽으며 지나간 시간 속에 묻어둔 슬픔의 봉인을 해제하고 스펀지처럼 서서히 스며들었던 눈물을 단번에 쏟아내게 될 터이다. ‘너의 이야기에 내가 슬픔을 느낀다는 사실이 너에게 또다른 수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은 채로’(p.208), 아니 잊음을 허락받은 과거의 자신인 ‘너’ 앞에서. 그리고 마침내 ‘넌 내게 무해한 사람이구나.’(p.196)라는 독백과 함께 화해의 순간을 맞이할지도 모르겠다.

<내게 무해한 사람>은 전작 <쇼코의 미소>에 등장했던 어느 시간 어느 공간의 한 점에서 가만히 살아가는 풀잎같은 인물들을 다시 소환해내고 있다. 일기처럼 담담히 그려내는 삶의 풍경과 섬세하게 살려낸 8,90년대의 모습은 <내게 무해한 사람>에서 조금 더 클로즈업된다. 인물들의 내적 갈등을 빚어낸 배경은 인간이 자행한 비극적 사건과 거대한 시대적 조류에서 사회적 편견과 가정으로 보다 밀접하게 좁혀졌다. 최은영은 인간이 가진 고뇌와 생애를 관통하는 아픔을 거대 담론으로 꺼내들지 않는다. 그녀는 스쳐지나친 삶의 한 지점에서 과거를 돌아보며 상처의 근원을 찾아간다. 독자는 잔잔히 흘러가는 작품을 접하며 과거를 치유받고 타인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내게 무해한 사람>은 ‘나는 무해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처럼 ‘의도의 유무를 떠나 해를 끼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p.324) 모두에게 보내는 성찰의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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