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의 마음
김금희 지음 / 창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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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의 마음>(창비, 2018)은 2016년 <너무 한낮의 연애>로 젊은작가상 대상을 수상한 등단 10년차 작가 김금희의 소설이다. 그녀에게는 1년간 계간지에 <경애의 마음>을 연재했지만 소설의 끝을 맺지 못하고 연재 마감을 한 이력이 있다. 이 후 ‘못하겠다는 생각과 몇 년을 더 묵힐까’(채널 예스 인터뷰 중)라는 고민 끝에 반 년간 힘들게 이어 써 완성한 작품이다. 시공간적 배경은 현재의 서울과 베트남이지만 작가가 평생을 자란 인천과 20대 초반이었던 1999년이 교차하며 등장한다. 작품의 중심에는 작가 자신이 ‘인천에서 성장한 아이가 봤던 비극적인 사건’(채널 예스)이라 밝히는 1999년 ‘인천 호프집 화재 사건’이 중요한 소재로 자리잡고 있다.

작가는 ‘그의 차로 말할 것 같으면 그의 인생을 모두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데’(p.8)라며 소설의 첫 문장을 시작한다. 그의 오래된 소형차에는 ‘자질구레한 소지품들’과 ‘수많은 카탈로그’, 영업처 사장들에게 실물의 세계를 환기하는 ‘기계가 감아올릴 실’(p.10)이 실려 있고 ‘혼자 끼니를 때울 때 애용하는 편의점 도시락 냄새’가 배여 있다. 이 차의 주인 ‘그’는 ‘1953년’(p.11) 설립된 반도‘미싱’에 10년째 다니고 있는 영업 ‘팀장대리’ 공상수이다. 차 안의 분위기, 사회적 위치를 정확히 짚어주는 수식어들에서 그의 이미지가 그려지기 시작한다. 사양산업의 인식을 가진 섬유제조업체 거래처인 미싱회사, 팀원이라곤 자신 뿐인 명목상 팀장이라는 지위는 위태로운 현실을 보여주는 장치로 작용한다. 상수의 불완전하던 팀은 ‘프랑켄슈타인프리징’이라는 이메일 아이디를 쓰는 경애가 팀원으로 들어오며 구색을 갖추게 된다.

상수는 불안한 실물의 세계를 살고 있지만 확고한 듯 보이는 가상의 세계 또한 병존한다. 그는 ‘언니는 죄가 없다(언죄다)’(p.33)라는 페이스북을 팔년 째 운영중이다. 상수는 ‘팔로워가 이만명에 이르는’ 그곳에서 사랑의 소멸에 아파하는 여성들을 위로하는 ‘언니’가 된다. 반도미싱은 그를 언니도 오빠도 형도 아닌 ‘그것’(p.37)으로 느끼게 하지만 ‘언죄다’는 ‘언니라는 존재 전이’를 가능하게 한다. 반도미싱 영업팀이라는 실물세계에서 ‘경애의 면제 상황’(p.55)을 유도하고 ‘마음에 관한 죄 없음을 보장해주는’(p.226) 한 ‘언니’와 ‘프랑켄슈타인프리징’으로서의 경애를 이어주는 곳이기도 하다. ‘언죄다’는 상수에게는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동시에 경애에게는 ‘잃어버린 사랑의 온도’(p.327)를 안전하게 식혀주는 공간이다.

상수와 경애에게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있는’, ‘아주 많은 행운’(p.62)은 반도미싱의 팀과 ‘언죄다’에서 찾아왔지만 그 ‘행운’의 힘은 이미 과거의 어느 시공간에서도 작동하고 있었다. 1999년 상수의 ‘유일한 친구’(p.42)였고 같은 시기 경애가 영화동호회에서 만나 처음 사랑의 온도를 느낀 은총은 둘 사이에 놓인 교차점이었다. 화재 사건으로 인해 열 아홉살 순수한 소년으로 영원히 둘의 가슴에 묻힌 은총은 상수에게는 ‘죄책감’(p.42)으로, 경애에게는 ‘어떤 손상에 대한 걱정’(p.222)으로 남아있다. 그는 이별의 고통에 ‘마음을 어떻게 폐기하느냐’(p.176)고 묻는 경애의 마음을 순수했던 시절 속으로 데려가고 ‘저는 파괴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p.202)라는 그녀의 말에 상수에게 ‘부끄러움과 슬픔’의 감정을 안긴다. 순수함, 부끄러움, 슬픔과 같은 원초적 감정들은 불안한 시절을 넘기고 있는 두 남녀에게 있어 안식처이기도 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되돌아보고 단단하게 만드는 동력이기도 했다.

20년이 흐르는 사이 ‘이제 마흔에 가까워진, 어느정도 포기와 축적으로 '삶'이라고 할 만한 것의 얼개를 완성해가는’(p.94) 나이가 된 인물들은 불안의 시기를 살아내는 3040세대를 대변한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고등학생은 어른들의 비리와 부정의 희생양이었지만 오히려 비난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재수, 삼수를 겪고 들어간 대학생활의 결말은 좁은 취업문 앞에서의 좌절로 표출되었다. 사랑은 조건 앞에서 포기되었으며, 정직한 회사생활은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나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었다. 소설은 현재의 마흔이 겪어 온 지난 20년의 아픔, 그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해온 포기와 포기의 축적을 담아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의 의미를 찾아가는 주인공들의 분투를 담담하고 섬세하게 그리고 있다.

작가는 1999년에 발생한 인천 호프집 방화사건이라는 팩트를 그대로 가져와 소설의 배경으로 삼았다. 사실 안에 허구를 그려넣음으로써 현실감과 긴장감을 적절히 배치한 작가의 센스가 돋보이는 지점이다. 국내에서는 저물어가는 분야인 섬유산업을 배경으로 하고 작은 생존의 희망을 찾아 ‘과떼말라나 사이판같이 옛날 미국 기업들의 하청공장이 있던 지역이나 중국, 말레이시아 같은 아시아 전역에서 몰려오는 곳’(p.205) 베트남이라는 지역까지 작품 속에 끌어온 치밀함은 비애감을 더한다. 영화 ‘타이타닉’, 가수 ‘델리스파이스’ 등 20세 전후에 세기말을 살았던 독자들에게 추억을 불러오는 소재들을 차용하여 공감을 끌어내는 기술 또한 인상적이다. 한 장면을 포착하여 세밀하게 그려내는 생생한 묘사는 마치 영화를 보고 있는 듯 하다.

작가는 <경애의 마음>이라는 제목과 달리 처음부터 상수를 먼저 소개하고 조연처럼 경애를 등장시킨다. “상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p.352)라 시작하는 마지막 단락의 첫 문장까지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은 의도를 궁금하게 만든다. 그러나 작가는 곧 친절하게도 “자기 자신에 관한 이야기. 서로가 서로를 인식하지 못했지만 돌아보니 어디엔가 분명히 있었던 어떤 마음에 관한 이야기였다”고 전하며 소설의 문을 닫는다. 청춘의 절정에서 밀레니엄을 맞은 세대, 혼돈과 불안이 뒤섞인 기대 속에서 젊음을 보낸 세대라면 상수와 경애의 마음을 따라가고 들여다보며 자신의 마음을 발견하게 될 터이다. 그 안에서 위로와 희망, 끝나지 않을 그들의 이야기 그리고 독자 자신의 이야기를 그려나갈 용기를 선물받을 것이다. 다만 중심 인물이 특정 세대에 한정되어 있어 다양한 연령층의 독자층을 끌어들이기에 한계가 보인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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