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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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무해한 사람>(문학동네, 2018)은 소설가 최은영이 2016년부터 2년간 발표했던 단편을 묶은 소설집이다. 최은영은 2013년 중편소설 「쇼코의 미소」가 『작가세계』 신인상에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첫 소설집 <쇼코의 미소>(문학동네, 2016)로 대중 독자들 앞에 섰고 출간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네이버 책의 스테디셀러로 기록되고 있다. ‘인간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아야 한다’(여성신문, 2018.9)는 철학을 가진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을 통과해서 세계를 보고자 했던 소망을 여러 단편들을 통해 담아내었다. 최은영은 <내게 무해한 사람>에 실린 작가의 말에서 “이 책에 실린 일곱 편의 소설에는 내가 지나온 미성년의 시간이 스며 있다. 쉽게 다루어지고, 함부로 이용될 수 있는 어린 몸과 마음에 대해 나는 이 글들을 쓰며 오래 생각했다.”(p.323)라 밝힌다. 그녀의 작품들은 1984년생인 작가가 살아온 시간 안에 아로새겨진 아픔과 아물어가는 상처를 보여준다.

<내게 무해한 사람>은 ‘그 여름’, ‘601, 602’, ‘지나가는 밤’, ‘모래로 지은 집’, ‘고백’, ‘손길’, ‘아치디에서’의 일곱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른넷의 늦은 봄에 열여덟 살의 추억을 돌아보는 ‘그 여름’, 1988년으로 기억의 시계를 돌린 ‘601,602’, 일 년에서 오 년 반 그리고 더 과거로 거슬러가며 인물들의 갈등을 보여주는 ‘지나가는 밤’ 등 단편들은 모두 시간을 되돌아가 지나간 감정들을 회고하듯 바라본다. 주요 인물들은 작가와 동시대를 살아온 현재의 30대로 8,90년대의 시대적 배경 안에서 고뇌하던 자신과 타인을 보듬는다. 작가가 한 인터뷰에서 “1세계 백인 남성이 아니고 미국, 영국, 네덜란드 사람도 아닌, 21세기 한국의 1980년대생 여성임을 생각하며 소설을 쓴다”(여성신문, 2018.9)고 한 것 처럼 그녀가 창조해낸 인물들 역시 여성이 중심에 있다.

‘그 여름’에는 동성애 관계에 있던 고등학생 수이와 이경, ‘601, 602’에는 집안에서 여자라는 이유로 학대받는 효진, ‘지나가는 밤’에는 엄마의 죽음 후 남남처럼 소원해진 자매 주희와 윤희가 있다. ‘고백’에는 커밍아웃의 상처로 자살한 여고생 진희가, ‘손길’에는 친구처럼 사이좋은 아내였지만 윗세대에게 불경스럽게 보이는 숙모가, ‘아치디에서’에는 가족에게 양보하며 감정을 억눌러온 하민이 작가의 섬세한 터치로 그려진다. 인물들이 마주하게 되는 현실은 어떤 계기나 결정적 사건으로 인해 야기된 결과가 아니다. 그녀들은 자연이 만들어낸대로 태어났지만 세상은 기성 세대가 짜놓은 틀에 맞추라고 했다. 인물들은 시간이 흘려보내는 강물의 퇴적과 침식 사이에서 유수에 몸을 맡기기도 하고 때로는 버티기도 하며 어른의 삶으로 나아간다. “단 한 명이 필요했어요. 단 한 명, 내 편을 들어줄 단 한 사람.”(p.42)이라는 고백은 여린 잎이 단단해져 가는 과정 속에서 삼켜야 했을 아픔과 상처를 쓰다듬는다.

각각의 작품 속에는 외적으로는 세계화와 경제부흥의 흐름을 타기 시작했지만 가정과 개인의 면면에는 가부장적 사고가 짙게 깔려있던 80년대의 유년이 담겨있다. 거기에는 ‘셋이라는 숫자 안에서 모두가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p.193)던 외로움, ‘너에겐 아무 잘못이 없어. 넌 나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아니야, 라는 말조차 상처를 입힐 것 같아서’(p.49) 아무말 하지 못했던 소심함, ‘어떤 이유도 없이 무조건 부모를 좋아하는 마음’(p.219)의 순수함이 있었다. 친구의 ‘거짓말을 이해할 수밖에 없’(p.71)는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하고 때로는 ‘길가에 널브러진 비닐봉지 같은 존재’(p.248)와 같은 허무함이 찾아오기도 한다. 타인의 처지를 보며 ‘그런 집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기도 했고, 그애가 자기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모습에 반감을 느끼기도’(p.78)하는 내적갈등을 겪으며 어른이 되어간다.

작가는 감정을 억누른 채 유년을 지내야 했던 이들에게 마음껏 슬플 수 있는 시간을 선물한다. ‘때때로 타인의 얼굴 앞에서 거스를 수 없는 슬픔을 느끼’는 인간 본연의 감정에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독자는 작품을 읽으며 지나간 시간 속에 묻어둔 슬픔의 봉인을 해제하고 스펀지처럼 서서히 스며들었던 눈물을 단번에 쏟아내게 될 터이다. ‘너의 이야기에 내가 슬픔을 느낀다는 사실이 너에게 또다른 수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은 채로’(p.208), 아니 잊음을 허락받은 과거의 자신인 ‘너’ 앞에서. 그리고 마침내 ‘넌 내게 무해한 사람이구나.’(p.196)라는 독백과 함께 화해의 순간을 맞이할지도 모르겠다.

<내게 무해한 사람>은 전작 <쇼코의 미소>에 등장했던 어느 시간 어느 공간의 한 점에서 가만히 살아가는 풀잎같은 인물들을 다시 소환해내고 있다. 일기처럼 담담히 그려내는 삶의 풍경과 섬세하게 살려낸 8,90년대의 모습은 <내게 무해한 사람>에서 조금 더 클로즈업된다. 인물들의 내적 갈등을 빚어낸 배경은 인간이 자행한 비극적 사건과 거대한 시대적 조류에서 사회적 편견과 가정으로 보다 밀접하게 좁혀졌다. 최은영은 인간이 가진 고뇌와 생애를 관통하는 아픔을 거대 담론으로 꺼내들지 않는다. 그녀는 스쳐지나친 삶의 한 지점에서 과거를 돌아보며 상처의 근원을 찾아간다. 독자는 잔잔히 흘러가는 작품을 접하며 과거를 치유받고 타인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내게 무해한 사람>은 ‘나는 무해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처럼 ‘의도의 유무를 떠나 해를 끼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p.324) 모두에게 보내는 성찰의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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