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푸른숲 / 199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푸른숲, 2018)은 전기작가 슈테판 츠바이크가 프랑스 작가 오노레 드 발자크의 일생을 추적하여 서술한 평전이다. 그는 로맹롤랑, 횔덜린, 톨스토이, 니체, 디킨스, 마리앙투와네트, 메리 스튜어트 등의 평전과 전기작품을 남겼다. 한 인물을 집중적으로 탐구한 전기와 더불어 여러 작가들을 유사한 기준으로 분류하여 집필한 ‘정신세계의 건축가들’시리즈를 발간하기도 했다. 1부 <3인의 거장-발자크, 디킨스, 도스토옙스키>(1920), 2부 <데몬과의 싸움-횔덜린, 클라이스트, 니체>(1929), 3부<3인 시인의 생애 –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1928)을 출간했고, 이어 <정신에 의한 치료-메스머, 메리 베이커 에디, 프로이트>(1931)도 출간했다. 츠바이크는 여러 인물들 중에서도 발자크에게 각별한 관심을 가져 최후의 작품으로 상당한 규모의 <발자크 평전>을 쓰게 된다. 1939년 로맹 롤랑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30년 전부터 발자크를 읽고 또 읽고 있으며, 언제나 거듭 경탄하게 된다’(서문 중)라 고백한 바 있다. 그는 방대한 양의 발자크 관련 자료를 토대로 책의 골격을 세워놓았으나 미완의 상태로 1942년 생을 마감한다.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은 츠바이크 사후 3년 동료인 리하르트 프리덴탈이 정밀한 검토보완을 거쳐 발간한 작품이다.
    
유럽 3대 전기작가로 불리는 츠바이크는 1881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장서가였으며 제네바 국제연맹 지적협력위원회가 공인한 ‘세계에서 가장 많이 번역소개된 작가’(<어제의 세계>(지식공작소, 2014))였다. 그는 <로맹롤랑-인간과 작품>(1921), <조각가 프랑 마즈렐>(1923), <마리 앙투와네트>(1932), <메리 스튜어트>(1935) 등의 전기작품을 비롯하여 희곡 <예레미아>(1917), 소설 <체스이야기>(1941)를 남겼다. 거장들이 지닌 창조의 비밀을 파악하기 위해 30~40년간 4천가지가 넘는 필적을 수집하기도 했다. 츠바이크는 자서전인 <어제의 세계>에서 ‘수집활동의 마지막 10년 동안 기획한 것은 그것을 체계적으로 정련시켜 가는 일’이라 밝혔다. 그는 특히 발자크의 소설 교정지에 대해 ‘어느 페이지나 그야말로 하나의 전쟁터였으며, 수없이 많은 수정과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명료함을 가지고 교정에 교정을 거듭하고 있는 거인적인 투쟁을 표현하고 있었다’라 언급한다. <발자크 평전>은 평생에 걸쳐 수집한 예술혼의 비밀문서에서 창조의 과정을 밝혀내고 있는 츠바이크식 치밀함의 결정체이다.
    
책은 발자크의 탄생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인생행로를 650여 페이지에 걸쳐 담고 있다. 허풍과 허영이 뒤섞인 ‘훌륭한 이야기꾼’(p.26)이었던 아버지에게서 ‘생명력과 이야기에 대한 애착’(p.28)을, 냉정하고 질책만 가하던 어머니에게서 애정의 결핍을 물려받은 발자크가 생을 엮어가는 과정이 생생하게 묘사된다. 냉담한 어머니에게서 쫓겨나온 감옥 같은 기숙학교에서 발자크를 구원해준 것은 도서관의 책들이었다. 글을 쓰겠다는 발자크의 의지와 열망은 가족들의 반대에 저항하며 ‘가장 형편없고 비참하고 불쾌한 방’(p.58)에서 꽃피기 시작한다. 츠바이크는 수도승 같은 생활을 하며 ‘자유롭기를, 유명해지기를’(p.74) 간절히 바랐던 발자크의 창작열을 ‘갈레 선(船)의 노예’(p.89)에 비유한다. 발자크는 자유롭기 위해 부모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없고 빈궁한 형편을 지속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 남몰래 글을 끄적거리는 노예’(p.88)가 되기를 자처하며 쉼없이 글을 썼다. ‘어떤 장르, 어떤 주문, 어떤 공저(共著)도 상관하지 않’(p.93)고 기계처럼 써내려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글과 자유에 대한 갈망이 ‘가족의 노예상태에서 해방시켜줄 수 있는 어떤 여자하고도 결합할 각오’(p.105)를 실현시켜 나가는 과정 또한 흥미롭다.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서 얻지 못한 ‘거친 내면을 섬세하게 만들어주고 매끄럽게 해줄 손길’(p.114)을 가진 연상의 여인 베르니 부인, ‘헌신과 정직성의 능력’(p.208)을 갖춘 쥘마 카로, ‘생애의 중심점이자 진정한 심장’(p.222)이 되는 한스카 부인, 경제적 자유를 기대하며 만났던 여러 귀족 부인은 발자크의 인생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동반자였다. 삶의 중심축이 창작에 있었다면 이를 굴러가게 할 보조바퀴는 여인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발자크는 쓰고 또 쓰고 또 쓴다. 휴식 없이 중단 없이. 그의 상상력은 한 번 불붙으면 한없이 불붙어 타오른다”(p.242) 츠바이크는 발자크의 하루를 시간대별로 기록함으로써 한스카 부인과의 밀회조차도 한정된 시간만을 내어줄 만큼 엄격한 창작 노동자였음을 증언한다.
    
책은 가난한 노예처럼 글을 쓰는 일면에 사치스러운 지출을 통한 망상이 자리잡고 있는 발자크의 아이러니한 면모를 기술하기도 한다. 글로써 유명해지고자 했던 욕망은 여러 사업에의 도전과 실패, 귀족같은 화려한 생활로 점철되었다. 부지런히 글을 팔았지만 대차대조표의 마이너스를 지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의 내부에 있는 어떤 것은 -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그의 존재의 가장 내면적인 본질일 것이다 – 그의 외적인 삶의 온갖 파국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고, 이 태풍을, 안전한 육지에서 미쳐 날뛰는 바다를 쳐다볼 때와 같은 긴장된 호기심으로 바라만 보았다.”(p.426) 그러나 압류, 소송, 파산, 난국, 감옥에서 보낸 시간들조차 발자크의 창작열을 식히기에는 역부족이었으며, 오히려 동력이 된 듯 보여진다. 이에 대해 츠바이크는 “상황이 그를 무겁게 짓누를수록 수은기압계처럼 그의 생명욕구는 위로 올라갔다”(p.427)라 해석한다.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은 츠바이크의 생동감 넘치는 묘사와 위트있는 문체를 통해 건조할 수 있는 평전을 다이내믹한 인생드라마로 바꾸어 놓았다. 발자크의 족적을 따라다니며 밀착취재하듯 써내려간 원고는 친구인 프리덴탈에게 전해져 수정작업을 거쳐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프리덴탈은 츠바이크의 발자크에 대한 표상을 “전쟁이 터지기 직전에 그가 이사했던, 바스(Bath)에 있는 집의 작은 서재는 발자크 박물관, 발자크 문서고, 발자크 사무소가 되었다“(p.684)로 술회한다. 츠바이크가 10년을 기울여 치밀하게 재구성해나간 발자크의 생애는 천재적 창작기질, 노예노동과 같은 부단한 집필작업에 자신의 모든 시간을 쏟아부은 위대한 인간을 확인시킨다. 결핍된 모성애와 성공을 향한 열망에서 발현된 귀족 여인들과의 교제에서는 범인(凡人) 발자크를 만나기도 한다. 평소 발자크의 작품에 관심이 있던 독자에게는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이 작가와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단초를 제공해 줄 수 있다. 반면 발자크를 처음 접하는 이에게는 상당한 분량의 연애와 사업실패 스토리가 작가로서의 위대성을 희석시키는 요인이 될 우려도 존재한다. 담백한 서술보다 은유와 묘사를 택한 츠바이크의 문장은 평전이 가져야 할 신뢰성에 의문을 줄 수도 있다. 츠바이크의 모든 평전 작품들 중에서 양으로나 질로나 가장 큰 공을 들인 작품이라 평가되는 <발자크 평전>. 발자크라는 작가를 보다 자세히 알고 싶은 이들에게는 풍부한 기록물이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