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올드보이 Oldboy 1
츠치야 가론 외 지음 / 아선미디어 / 2003년 11월
평점 :
절판
1.
원작이 있는 영화들을 원작과 영화 모두 찾아보는 것은 아니다. 흥미가 있어서 찾아보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우연적인 인과에 의해서다. 이 만화는 전자의 경우다. 영화가 워낙 강력한 탓도 있고, 종종 논쟁이 벌어지는 자리에서 가만히 들어보면 원작도 나름대로의 성과가 크다는 주장이 들려오기도 해서 찾아 읽었다.
총 8권으로, 분량상 방대한 코믹스는 아니다. 내가 딱 좋아하는 분량의, 적당한 서사구조를 가진 만화들에 속한다. 해귀선, 언더커런트, 초속 5000km같은 단편 그래픽노블을 제외하면 몬스터나 플루토, 기생수, 터치, 러프같은 만화들이 이정도 분량이다.(하지만 이정도 분량을 선호한다 뿐, 상관 없이 좋은 작품은 다 좋아한다) 아무튼.
2.
평범한 삶을 살아온 평범한 청년 고토가 어느 날 갑자기 눈을 떠 보니 어딘지 알 수 없는 독방에 갇힌다. 그는 자신을 가둔 자의 정체도, 목적도, 자신이 구금될 기한도 알지 못한 채 무기한의 감금생활을 시작한다. 그 생활이 10년을 지나가며, 고토는 독방에서 정신세계의 아득한 한계를 느낀다. 미쳐버렸어도 당연한 상황이었지만, 그는 사실 앞서 말한 ‘평범한‘이라는 수사와는 동떨어진 사람이었다. 티브이와 침대만이 있는 작은 방 속에서 매일 중국음식만을 먹으며(만화 속에서는 군만두만 먹진 않는다) 십 년을 버틴다는 사실은, 게다가 그 기한조차 알 수 없고 자신이 구금된 목적조차 알 수 없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범인에게는 절대 가능한 사실이 아니다. 보통은 진작 광인이나 폐인이 되어버렸겠지. 하지만 고토는 어느날 출소를 명받고, 약간의 몸싸움 끝에 기절하지만 캐리어에 담겨 독방에서 꺼내어진다. 주머니속엔 천엔, 옷은 정장 단벌뿐이지만 해방된 고토가 자유를 맞는 장면은 한 페이지를 할애하여 빛나는 달과 함께 묘사되어 있다.
고토는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고 있다. 자신에겐 돌아갈 가족이 있고, 연락할 친구가 있고, 되찾을 자신의 삶이 있다. 하지만 고토는 그 길을 택하지 않는다. 10년 간 수 없이 생각하고 고치고 시뮬레이션한 싸움을 시작한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여기까지 보고는 영화랑 다를 바 없군 할 것이다. 실제로 그렇다. 여기서부터 고토가 역으로 자신을 구금시킨 적을 찾아가기까지의 과정이나, 상대가 어떤 기억으로 인해 악의를 갖고 고토를 가두었다는 설정 등은 영화와 상당히 유사하다. 고토는 처음 찾은 초밥집에서 한 젊은 여성을 만나고, 그 여성은 왠지 모르게 고토를 집까지 데려와 잠자리를 한다. 고토는 그에게 사랑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되고, 그 뒤로 자신의 적과 싸우며 동시에 여성을 지켜나간다. 그리고 자신이 10년 간 먹어온 중국집의 맛을 추적하여 자신이 구금당한 장소를 찾아내고, 그곳에 대한 정보를 전초기지로하여 차근차근 자신의 적을 쫓는다.
3.
원작과 영화가 다른 부분은 사실 작은 설정들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들이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었다. 먼저 적이 품게된 악의의 동기가 된 사건이 아예 다르다. 영화에서는 알다시피 굉장히 충격적인 사건이 적의 악의를 만들어내어 관객의 공감을 샀다. 10년 간의 구금과 그것에 수반되는 엄청난 비용을 지불했다는 거대한 일에 대한 동기로서 충분한 설명이 된 것이다. 하지만 원작에서는 적(카키누마)이 품게 된 악의의 동기는 아주 사소한 사건에 불과했다. 자신의 은밀하고 추악한 내면을 바라본 주인공이 자신을 비웃었다는, 그 순간의 사건으로 카키누마는 고토를 10년간 구금한 것이다. 이건 약간 의아하다. 카키누마의 병적인 캐릭터를 이해한다 치더라도, 엄청난 기회비용을 요구하는 이 거대한 사건의 시발점으로는 독자의 입장에서 납득이 잘 되지 않는다.
동기 자체가 달라지니 복수의 방법도 달라진다. 영화에서 오대수가 겪게 되는 그 엄청나고 충격적인 비극과는 달리, 고토는 10년 간 구금된 것 외에 잃은 것이 없다. 사실 10년의 시간 동안에도 고토가 제정신을 잃지 않은 채 자신에게 도전해온다는 것 자체로도 카키누마의 복수는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목적은 폐인된 고토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 뿐이었으므로. 그러므로 만화 후반부에 전개되는 양측의 줄다리기는 굉장히 우습게 진행된다. 정작 기억의 열쇠는 카키누마가 지니고 있으나, 그것을 알아주길 바라고 안달하는 쪽 역시 카키누마인 것이다. ‘너 나에게 상처를 줬어, 기억하지 못한다고? 제발 알아줘, 제발...‘ 카키누마는 고토가 사건의 결정적 지점에서 자꾸 엇나갈 때마다 등장해 엄청난 힌트들을 직간접적으로 내어준다. 이럴거면 이 게임 왜 시작했어? 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다보니 카키누마가 카리스마있고 명석한 악당처럼 그려지기 보다는 열등감에 찌들어있는 하찮은 10대 소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영화에서의 이우진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
이는 만화 속 이해할 수 없는 연출들에서 기인하기도 한다. 내가 약간 의아했던 것은, 영화에서 캐릭터들이 종종 이상한 상황에서 긴장한 듯 땀을 흘린다는 것이었다. 카키누마의 첫 등장 씬에서, 그는 사설 감옥의 연락책을 만나는 자리에서 초조한 듯 식은땀을 흘리며 거래 조건을 묻는다. 그리고 연락책이 조건을 제시하자 선듯 거액의 액수를 언급하며 거만한 표정으로 바뀐다. 이러니 캐릭터가 모래성처럼 위태한 것이다. 그의 재력과 비정상적인 인격 수준을 생각하면 마치 복수를 꿈꾸는 소시민처럼 땀을 뻘뻘 흘리며 소심하게 거래조건을 물을 수는 없다. 이런 뜬금없는 식은땀 설정이 작품 내내 나타나 긴장감을 어이없게 무너뜨린다.
4.
말해놓은 두 가지 어설픈 점(납득하기 힘든 동기설정과 엉뚱한 연출)만을 두고 보면 딱히 재미있는 작품은 아니었을 듯 싶지만, 사실 재미는 있었다. 난 재미없는 만화는 끝까지 잘 읽질 못하는 성격이라.. 일단은 재미를 보장한 만화들만이 나에게 읽힌다. 10년의 감금과 그 목적에 대한 미스테리를 둘러싸고 손에 쥔 것 없는 한 남자가 끈질기게 자신의 적을 향해 전진하는 모습은 설정 자체만으로도 흥미롭기 그지없다. 종종 영화에 비교하여 이 만화의 아쉬운 점을 이야기했지만,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나름 납득했을 설정이기도 하다. 사실 나는 이런 사소한 지점에서 인간 내면의 본질이 드러난다고 생각하니, 카키누마의 열등감과 관련된 그의 내밀한 동기는 이해 가능하다. 다만 그 동기로 인해 벌어지게 된 사건이 너무나 어설펐기 때문에 그의 악당으로서의 역할이 우스꽝스럽게 흔들렸다는 점을 이야기했을 뿐.
여러 조력자들을 통해(가장 큰 조력자는 단연 카키누마 본인이다) 진실에 다가선 두 인물, 마지막에 벌어진 사건은 결국 영화와 같다. 카키누마의 마지막 대사는 그의 본질을 무엇보다 잘 드러낸다. 나는 대사만으로 자신을 설명하는 캐릭터를 진부하다고 생각하는 타입이지만, 카키누마의 마지막 대사는 그의 마지막 선택에 동반했기 때문에 더욱 진실되었다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뒤틀린 인물의 내면세계와 그로인해 비롯된 엄청난 사건이라는 플롯은 나비효과를 연상케 하는 심리물로서 꽤나 인상적이다. 그 인물이 벌이는 사건의 설정 자체도 굉장히 흥미로와서, 그것 자체만으로도 만화를 즐겁게 읽어나가게 하는 구심점이 된다. 하지만 뒤틀린 인간이 가진 매력과 치밀하게 설계된 작전의 부재가 어쩔 수 없이 영화와 비교하게 만든다. 상당한 수작이지만 영화에 비견될 수 없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박찬욱의 올드보이가 워낙 뛰어나고 강렬한 탓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