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
마리코 타마키 지음, 심혜경 옮김, 질리안 타마키 그림 / 이숲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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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의 유아기와 소년기를 함께 보낸 친구가 있다. 옆집에 살고, 어머니끼리 친분이 두터우며, 우리는 서로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이모와 이모부라고 불렀다. 그 친구는 부유했고 우리집은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누가 뭐래도 가장 친한 친구였으며 함께 있으면 시간의 흐름을 자주 잊어버리곤 했다. 그 아이와 보낸 시간들은 부유하는 꽃잎처럼 기억 속 어딘가에 아주 아련하게 저장되어 있다. 그 잎새의 세밀한 결이나 바람에 날리는 모습 같은 것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 인생의 시작부근 어딘가에서 언제나 함께였다.

시간은 무한하지만 우리의 삶은 무한하지 않다. 시간은 연속적이지만 우리의 기억은 작은 점들의 듬성듬성한 집합과 같다. 우리의 기억을 이어 붙이면 삶이 될테지만, 그리고 우리가 기억하는 모든 것들을 꺼내어 본다면 그것들은 분명 무한할테지만, 그것은 칸토어가 정의한 무한의 크기로 본다면 우리의 삶보다는 언제나 적다. 때문에 우리는 아주 조밀한 점선이거나 아주 듬성듬성한 점선으로 삶을 기억할 수 밖에 없다.

내가 친구를 기억하는 방식 역시 마찬가지다. 많은 것들이 기억나지만 그 친구와 내가 놀았던 어느 순간의 기억들은 장면과 장면의 이어달리기다. 쓰레기장에서 놀다가 친구가 던진 큰 돌덩이가 단단한 티비 유리에 부딛혀 튕겨나와 내 관자놀이를 때렸던 기억, 성에 호기심 가득한 시절 남자아이끼리 같이 샤워하며 성 역할을 나누어 이것저것 상상하며 키득거리던 기억, 그 아이의 레고 시리즈 중 정말 갖고싶었던 피규어를 인생 처음으로 훔쳐본 기억같은 것들. 그것들은 참으로 사소하고 평범하지만 누구에게도 없는 우리들만의 특별한 기억이었다.

우리의 나날도 어느 순간 시간의 지나감 속에 단절되었다. 중학교 시절을 통틀어 한 번 그 친구를 만났다. 성년이 된 뒤로 또 한 번 만났다. 귀공가같던 그 친구의 모습은 그 작은 두 지점에서도 눈에 띄게 달라져있었다. 가장 최근에 만났을 때, 그 친구는 자신이 인생의 사건을 통해 어떻게 달라졌는지, 아주 덤덤한 목소리로 내게 이야기해줬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가족 사이에서 생겨난 작은 균열, 불화, 그리고 그 후 자신에게 생겨난 영문을 모를 도벽이라는 습관까지. 하지만 친구는 이제 그런 상처를 덤덤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곤 피디가 되고 싶다고, 지금은 집을 나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긴 시간의 공백을 넘어 그 친구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을 머릿속을 방황하며 황망하게 찾았다. 그 아이와의 마지막 기억은 그런 것이었다.


2.

마리코 타마키의 이 그래픽 노블에는 아주 순수한 두 소녀가 등장한다. 주인공 로즈는 매년 여름이면 부모와 함께 해변의 별장에서 휴가를 보낸다. 그리고 로즈와 같이 매년 그 해변에 오는 이웃집 소녀 윈디는 로즈와 십년 째 휴가를 함께하는 로즈의 절친이다. 매년 조금씩 자라는 그녀들의 휴가는 언제와 같이 평범할 줄 알았지만, 그해 여름은 달랐다. 소녀와 숙녀의 사이에 있는 아이들의 흔들림이 만화 전반에 걸쳐 그려진다. 아이들은 금관화의 아름다움에 감동하고, 그것을 먹으면 등에서 날개가 나오리라고 믿었던 소녀이기도 했지만, 자신들이 볼 수 없는 성인영화 DVD를 제대로 볼 수도 없으면서 억지로 빌려 보는 숙녀 지망생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해 여름, 로즈는 그동안 자신 주변에 늘상 존재했지만 그동안 보지 못했던 여러 모습들을 한번에 목도하게 된다.

부모의 불화는 로즈의 동생이 이 해변가에서 유산되며 시작되었다. 친구 윈디는 점점 여자가 되어간다. 윈디는 자기를 이성적으로 좋아하는 걸지도 모른다. 짝사랑하게 된 던크는 사실 나쁜놈이었다. 던크의 여자친구를 미워하게 된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녀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내년 여름에는, 나도 더 큰 가슴을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3.

누구에게나 어린시절이 있고, 그것을 기억하는 방식이 있다. 기억을 불러낼 때 우리 각자는 어떤 기분을 느낄까? 나는 내 친구를 생각하면 무언가 아련하다. 그리고 소년이 청년이 되어 내 앞에 등장해 자신의 상처를 이야기하는 모습이 겹쳐져서 기억 속에 부유한다. 기억속 사건들에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그리고 무질서한 기억에 조금씩 질서가 생겨난다.

소녀들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소녀가 청춘이 될 때 느껴지는 세계의 작은 이물감을 이 만화는 아주 섬세하게 그리고 있다. 그림은 감성적이고, 대사는 핍진하다. 소녀만이 할 수 있는 대사들, 생각들이 이 작은 책에 담겼다. 각자의 오래된 기억들을 소환하는 이 책은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에게 추천할만 하지만, 나와 같이 더께 쌓인 아지랑이의 기억들을 갖고 있는 어른들이 읽어도 좋다.

나도 내년에는 더 큰 가슴을 갖게 될지 모른다. 그러니 운동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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