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목소리 이토 준지 스페셜 호러 1
이토 준지 지음 / 시공사(만화)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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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북코아를 통해 부산의 어느 헌책방에서 갖고 싶었던 만화책 애장판을 구매했다. 구매하면서 혹시 다른 책들은 뭐가 있을까 찾아보다가 이토 준지의 단편집 하나를 발견했다. 이토 준지라 하면, 내가 한창 만화책에 빠져 있을 초중딩 시절 나를 매료시킨 ‘소용돌이’의 작가가 아니던가? 그의 명성에 비해 나는 소용돌이밖에 읽은 바가 없었지만, 그 만화만으로도 그의 다른 작품들을 한 번 찾아 읽기에는 충분했다.

여섯일곱편의 단편이 이 책에 실려있다. 단편들이기에 당연히 세 권으로 구성된 소용돌이와는 다른 매력이 있었다. 그리고 이토 준지의 매력은 이런 단편을 통해 더욱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호러라는 것은(나는 그의 작품이 사실 공포라기보다는 호러라고 생각한다) 소재와 임팩트가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닳지 않은 날것일 때에 더욱 강렬한 것이다. 그러므로 장편으로 끌고 갈 때에 호러라는 장르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줄기 속에 다양한 장치를 모색해야하는 영리함을 작가에게 요구하는 것이다(그러므로 소용돌이라는 모티브 하나에서 그토록 많은 에피소드를 만들어 낸 그의 대표작이 더욱 대단한 것이겠지만).

이 작품집에는 그의 넘치는 아이디어와 강렬한 이야기의 매혹이 담겨있다. 흡혈박쥐의 생태에서 착안한 첫 번째 단편부터, 7척 장신의 기괴한 여인의 사생아를 데리고 다니는 가족 유랑단의 이야기 등 한 편 한 편 모두가 소름끼치게 기이하고 서늘한 이야기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속에서 빛나는 이토 준지의 그림들은, 그야말로 충격적이기 그지없다. 더없이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그의 그림들에는 어쩐지 계속해서 들여다보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기름에 관련된 단편에서의 여드름 짜는 소년의 장면이 단연 압도적이게 그렇다.

하지만 이 이야기들에서 내가 가장 좋게 생각한 부분은, 의외로 스토리에 있다. 하나하나의 이야기가 모두 미스테리한 사건들과 연관되어 있고, 하나같이 알 수 없는 기괴한 생명체, 혹은 환상을 중심으로 펼쳐지는데, 그 가운데 힘있게 버티는 이야기의 핵심은 슬픔이다. 실연당한 소녀와 그녀를 짝사랑하는 소년의 이야기, 수몰당한 마을의 실종된 전 부인을 매일같이 환상으로 마주치는 한 남자의 이야기, 불우한 가정 환경에서 지리멸렬한 인생을 회의하는 소녀의 이야기같은 것들. 모두 하나같이 슬픔이나 절망같은 감정들을 담지하고 있어 개인적인 호감을 끌었다. 그러니까, 마냥 끔찍한 그림이나 기괴한 아이디어로만 유명해진 작가라고 하기에는 이토 준지의 매력의 반도 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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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ent for me 石黑正數短編集 (ヤングキングコミックス) (コミック)
이시구로 마사카즈 / 少年畵報社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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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완전히 낯선 작가의 만화를 읽으면 으레 실패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이 단편집은 꽤 행운이었다고 말할 만하다. 이시구로 마사카즈의 단편집인 ‘Present for me‘에는 표제작인 ‘Present for me‘를 비롯해서 총 다섯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모든 단편이 매력적일 뿐더러 하나같이 재미있다. 작가의 위트와 상상력이 돋보인다.

이 작가가 독자의 흥미를 자극하는 방식은, 클리셰를 비트는 것이다. 클리셰를 비튼다는 점에서는 우리나라의 만화가 마사토끼와 영화감독 주성치가 가장 먼저 생각나는데, 이 작가의 작품 역시 키치한 매력이 보인다. 첫 번째 작품인 ‘나아가라! 사이킥 소년단‘에서는 시종일관 유머를 잃지 않은 채 폭파된 비밀의 초능력연구소라는 배경 속에서 무인도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이야기에서의 결말부분에서는 폭소할 수밖에 없다. 조난 스토리에서의 전형을 따라가지 않는데다가 예측불가능할 만큼 엉뚱하기까지 하다. 이런 식의 이야기가 연달아 이어진다.

다만 표제작인 Present for me의 경우에는 다른 작품들이 지닌 유머는 약간 뒤로한 채, 미래사회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이후의 서정적인 분위기를 담고 있다. 황폐한 종말세계 속에 소녀와 로봇이 만나 교감하는 이야기에는 어떤 전형이랄 것이 있어서 다른 작품들과는 결을 달리하지만, 그 결말에는 생각치 못한 신선함이 있고 일종의 감동이 있다. 근래 본 단편만화들 중 꽤나 수작들로 엮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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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 울음소리 그칠 무렵 : 바닷마을 다이어리 1 바닷마을 다이어리 1
요시다 아키미 지음, 조은하 옮김 / 애니북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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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좋아하는 영화인데 만화가 원작인 경우 종종 찾아서 읽곤 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바닷마을 다이어리‘가 만화 원작인 영화라는 이야기는 미디어를 통해 들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서 그와 김중혁이 이 원작 만화를 강하게 추천하는 것을 듣고는 책을 사기로 했다. 1권을 먼저 구매했다. 한 달에 한 권 씩 사서 읽을 생각이다.

1권의 부제는 ‘매미 울음소리 그칠 무렵‘인데, 그 무렵에 여동생 스즈가 우리에게로 왔기 때문에 그런 제목이 붙여졌다. 1권은 영화 초반부의 내용과 거의 동일하게 진행된다. 이 책이 거의 영화의 콘티처럼 느껴질 만큼 세부적인 사건의 진행 순서와 몇몇 인상적인 장면들, 캐릭터의 소개 방식 등이 모두 동일하다. 이 뒤로부터 영화에서는 묘사되지 않았던 각 캐릭터들 각각의 이야기가 등장한다는데, 그것이 기대되는 챕터가 몇 있었다. 차녀 요시노가 이별하는 이야기라던지, 축구단의 전 주장의 입원과 아이들의 이야기같은 것들. 앞으로도 기대하면서 읽어갈 생각이다.

꽤 늦게 접하게 되어 다행이다. 앞으로 7권이나 남았는데, 읽어가는 동안 신간이 더 나오겠지. 읽을 만화가 쌓여있다는 건 신나는 일이다.

+ 책을 보면 영화의 캐스팅이 얼마나 탁월했는지 알 수 있다. 거의 완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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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엔드 아파트
에스토 에무 지음 / 삼양출판사(만화)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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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토 에무의 만화를 잘 알지 못하는데, 전에 읽었던 책 하나가 꽤 마음에 들어서 이번 책 쇼핑 때 두 권을 더 사버렸다. 곧바로 읽어내려간 책이 ‘해피 엔드 아파트‘인데, 생각보다 좋았고, 그 전에 읽은 커피 시간과 형식상의 유사성이 있어서 편하고 재밌게 읽어내려갔다.

책은 에피소드 형식으로 여러 주인공들을 내세우지만 사실 이야기의 중심에 서는 인물은 이 이야기들을 써내려간 화자인 소설작가인 ‘나(루카)‘이다.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통보받고 쫓겨난 루카가 새로운 거처를 찾아 정착한 곳이 바로 행복의 거리 막다른 곳에 위치한 아파트, 그래서 ‘해피 엔드 아파트‘라고 불리는 이 곳이다. 이 곳에서 소설작가인 루카는 새로운 작품을 써서 재기할 계획을 갖게 되는데, 그 소설의 소재는 바로 이 아파트에 사는 매력적이고 독특한 입주자들의 사연이다.

여기까지 써놓고 보면 어떤 이야기로 흘러가는지 예상이 가능할 것이다.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갖고 있고, 그 이야기들은 소설가의 시점에서 결국 저마다의 사랑 이야기로 치환된다. 사랑은 모두 하나이되, 세상 모든 사람의 사랑은 저마다의 단 하나뿐인 서사다. 그러니까 이 아파트에는 아파트의 입주민 수만큼의 사랑 이야기가 존재할 것이고, 그 내용을 추적해 서사화하는 것이 주인공의 목적인 것이다. 과연 참으로 다양한 이야기들이 이 책 속에 있었다.

어느 특정한 사건을 계기로 집안에서 나체로 지내며 외출을 단 한번도 하지 않은지 3년이 되는 아티스트와 그의 남자친구, 쌍둥이를 동등하게 사랑하게 된 노에, 변성기를 맞아 말을 하지 않게 된 성가대의 소년과 과거를 간직한 인형깎이 장인, 그리고 모든 이야기를 돌아 결국 이야기는 루카와 루카의 새로운 동거인 하비에게로 향한다. 꽤 설득력 있는 근사한 메타포와 유려한 그림체, 그리고 새롭진 않지만 이런 길이의 이야기에 걸맞는 이야기의 형식까지, 모두가 어우러져 이렇게 괜찮은 작품을 만들었다. 다양한 사랑이야기에 대한 여러 시선은 꽤나 흥미롭기도 했다. 동시에 두 사람을 동등하게 사랑하는 일이 가능한가? 누군가를 상실하게 되는 두려움으로 생기는 극단적인 선택을 존중하거나 수용할 수 있을 것인가?

책장에 넣어두고 종종 꺼내 읽을 것 같다. 아, 혹시 사랑 이야기에 성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읽지 않는 편이 좋을지도. 이 소설 속 주인공들은 모두 남자니까, 그러니까 사랑의 주체가 되는 인물들에 여성이 없다는 뜻이다.

+ 나중에 알아보니 에스토 에무가 보이즈 러브 장르의 확고한 세계를 구축한 작가로 인정받는다고 한다.
++ 내가 처음 읽었던 책은 ‘우동 여자‘, 보이즈 러브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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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시간
토요다 테츠야 글 그림, 한나리 옮김 / 미우(대원씨아이)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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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다 테츠야의 만화를 좋아한다. 그의 만화에는 단단하게 구축된 캐릭터들이 일상의 소소한 사건들 속에서 자유롭게 움직인다. 그의 그림체나, 서사를 만들어가는 방식 역시 마음에 든다. 장편과 단편 모두 그러한 특징들이 두드러진다. 그의 빼어난 장편 중 하나인 언더커런트에는 야마자키라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나와 사건을 진행시킨다. 미스테리를 품은 주인공과 그것을 추적하는 탐정 야마자키, 그리고 층층이 쌓인 플롯의 옷깃을 들추고 나면 등장하는 매혹적인 이야기의 흡입력까지. 그의 만화를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래서 그의 단편집 ‘커피시간‘을 이번에 사서 읽었다. 그의 단편에는 그의 장편에서 두드러지는 구체적이고 치밀한 서사가 흐릿하다. 다만 사건의 뒷 이야기들을 궁금하게 하는 인상적인 씬들이 감각적인 연출로 덤덤하게 나열된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만을 떼어내서 만화로 재구성한 것 같은 이 단편집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개성있는 인물들의 독특한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최종에서는 그 드라마틱한 인물들이 거의 모두 모여 하나의 장소에서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방식으로 연결된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연작이나 옴니버스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데, 뒤이은 이야기들이 없다면 모두 별개의 이야기로 이해해도 좋다.

만화 속 인물들은 모두 저마다의 이야기들을 갖고 있다. 하지만 작가는 이것을 섬세하게 풀어놓기 보다는, 은근히 암시하거나 과감히 생략하는 쪽을 택한다. 이 단편들이 갖는 매력은 기묘하게도 이 지점에서 생겨난다. 한 소녀가 다리 위에서 뛰어내리는 장면부터 시작하는데도 구체적인 뒷 이야기는 짧은 대화를 통해 간단히 정리한다던지, 두 남자가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옛 이야기를 떠들어대면서도 그 흔한 플래시백을 사용하지 않는다던지, 정체불명의 로봇이 한 형사와 함께 동행하는데도 그 로봇에 대한 정체는 동료 형사들마저 ‘그것‘이라고 표현한다던지, 작가가 던져주는 의문들은 모두 흥미로움과 호기심으로 치환되어 관객들에게 이 독특한 사건들에 쉽게 빠져들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모든 이야기들은 커피를 마시는 시간과 연결된다. 총을 겨눈 옛 친구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한 손에는 총을 들고 한 손으로는 손대중으로 커피를 내려 마시고, 싱글맘의 집에서 예기치 않은 복잡한 밤을 보낸 한 남자는 ‘그러고보니 오늘 커피를 마시지 못했군‘ 하며 새벽 도로에서 한숨을 내쉰다. 가장 유쾌한 이야기는 ‘기린‘, 제일 좋아진 단편은 ‘겨울의 파도타기‘. ‘겨울의 파도타기‘를 비롯한 몇몇 작품에는 작가의 이전 장편인 ‘언더커런트‘의 그 매력적인 탐정 야마자키가 등장하기도 한다.

단편만화가 갖는 가장 완벽한 매력들이 이 단편집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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