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벤 존슨
이찬란 지음 / 시원북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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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북유럽 카페 서평단을 통해 <나의 벤 존슨>이 손에 들어왔는데, 책을 꺼내자마자 표지에 시선이 머물렀습니다. 옅은 민트빛 바탕에 창문 너머로 비껴드는 하얀 햇살, 그림자처럼 드리운 나뭇잎의 실루엣. 제목의 무게에 비해 표지는 한낮의 늦은 빛처럼 따스해서, 어쩐지 다정한 이야기가 들어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먼저 들었어요. 책은 핸드북 사이즈로 아담해서 가방 안에 쏙 들어가는 크기인데, 도톰한 두께가 손에 잡히는 감이 좋더라고요.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점심 먹고 들른 공원 벤치에서, 그렇게 일상의 틈마다 펼쳐 읽기 좋은 책이었습니다.


저는 1988년의 그 경기를 어렴풋이 기억하는 세대예요. 어린 시절 뉴스에서 칼 루이스와 벤 존슨이라는 이름을 들었고, 9초 79라는 숫자와 며칠 뒤의 추락까지 어른들 어깨너머로 듣고 자랐습니다. 그 이름이 한국 소설의 제목으로 다시 돌아온다고 했을 때, 지금 이 나이에 읽으면 어떤 감각으로 다가올지 궁금했어요. 영광과 추락 사이의 그 짧은 시간을, 사십 대 후반이 된 직장인의 눈으로 다시 마주하는 일이 어떤 결일지요.

이찬란 작가의 첫 장편소설인 <나의 벤 존슨>은 1988년 서울올림픽 100미터 결승의 풍경으로 문을 엽니다. 한낮의 뜨거운 햇볕에 달궈진 트랙, 7만 5천여 명의 시선과 외신 기자들의 카메라가 한 점으로 모이던 그 순간. 작가는 이 장면을 단순한 회상으로 두지 않아요. ‘굳건한 강자의 세계와 약하고 가난한 이의 세계가 뒤섞이고 전복될 수 있음을 알리는 사건’이라는 한 줄로, 9초 79라는 숫자에 작은 사람들의 자리를 마련합니다. 자메이카에서 캐나다로 이주한 가난한 배달부가 ‘체계적 교육을 받으며 자란 미국의 자타공인 최강자’를 꺾는 그림 자체가, 이 소설이 앞으로 무엇을 이야기할지를 미리 알려주더라고요.


작가의 시선이 가장 따뜻해지는 자리는 그다음입니다. 영광의 9초 79가 잠실 주경기장 안에서만 끝나지 않고, 동네의 작은 중국집 텔레비전 앞으로, 자장면 배달 소년의 오토바이 위로 옮겨붙는 장면이요. 사장에게 머리를 얻어맞으며 일하던 소년이 ‘와 씨, 캡이야, 벤 존슨!’ 한마디를 혼잣말처럼 흘리고, 자기도 그처럼 빠르게 상가동 13호에 자장면을 배달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가슴이 벅차오르는 그 순간. 누군가에게는 세계신기록이었던 시간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내년엔 학교로 돌아가야지’ 하는 다짐으로 옮겨붙던 풍경이 쉽게 지워지지 않았어요. 영웅의 이야기가 가장 낮은 자리까지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작가가 아주 구체적인 골목의 공기로 보여줍니다.


그 영광을 가게의 벽에 ‘수호신처럼’ 걸어둔 사람이 호달의 할머니 김야무 여사입니다. 88올림픽 개막식 날 활활 타오르는 성화를 보며 ‘불처럼 일어나리라’는 예감을 품고 ‘88국수집’ 간판을 올린 사람. 유남규, 현정화, 김수녕, 그리피스 조이너, 그리고 벤 존슨. 금메달리스트들의 기사를 액자에 담아 일렬로 걸어두고 삼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손님을 맞아온 사람이에요. 알코올중독 남편을 잃고, 며느리 얼굴도 모른 채 갓난 손자를 들쳐 업고, 음주 운전 사고로 외아들마저 보낸 그녀가 ‘없는 밤, 밤이 없다’는 자기 이름처럼 살아낸 시간. 작가는 이 시련의 목록을 감정 과잉 없이 담담하게 펼쳐놓아요. 그 담담함이 오히려 묵직하게 다가왔습니다. 영광의 한복판에서 품었던 예감이 시간이 흘러 정반대의 의미로 회수되는 자리에서, 책을 한참 덮어두었어요.


그리고 신림동 고시촌의 호달이 있습니다. 월세를 내지 못해 고시원에서 쫓겨난 청년, 지하철 불법 촬영 누명을 쓴 청년, 피시방 매니저에게 임금을 떼이며 머리를 얻어맞는 청년. 자신을 벤 존슨이라 믿는 정체불명의 중년 남자와 호달이 마주 앉은 잔치국수 한 그릇 앞에서, 호달은 누구에게도 털어놓은 적 없던 시간을 처음으로 풀어놓아요. 사람들로 붐비는 국숫집 한가운데 두 사람의 테이블만 ‘섬처럼 고요했다’는 문장에서 잠시 멈췄습니다. 그 고요는 곧 배신으로 뒤집혀요. 남자는 국숫값 대신 호달의 지갑을 슬쩍 맡겨두고 유유히 빠져나갑니다. 호달은 등 뒤로 소금 세례까지 맞으며 쫓겨나고요. 그런데 곧장 ‘받을 돈이 얼마야?’ 하며 호달을 끌고 피시방으로 향하는 그 능청스러운 발걸음이, 이 책이 그리는 ‘다정한 참견’의 가장 솔직한 모양이지 싶었어요. 깔끔하지 않고, 자존심 상하고, 시끄럽고 성가시지만, 그래도 옆에 누가 있다는 사실.


이 책에서 가장 마음이 머무른 자리는 ‘패배의 법칙’이라는 챕터예요. 피시방 매니저에게 멱살이 잡혀 시멘트 담벼락에 등이 후벼파이면서도, 남자는 호달이 골목을 빠져나갈 시간을 벌기 위해 매니저의 팔에 매달립니다. 저항하면 할수록 인생은 더 많은 매질과 좌절을 안겨주었고, 오래 견딘다는 건 짧게 끝낼 수 있는 고통을 길게 연장하는 일임을 사는 동안 몸으로 체득한 사람. 그래서 ‘자신이 패배자로 운명지어졌다는 걸 깨닫는 순간 생의 열차는 속력을 얻고 종착지는 더욱 분명해진다. 혼자 힘으로는 누구도 그 경로에서 감히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패배의 법칙이었다’고 말하는 사람이요. 그런 사람이, 자기 인생을 그렇게 정의해온 사람이, 처음으로 그 법칙에 작은 예외를 만들려고 누군가의 팔에 매달립니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 그가 떠올린 건 ‘약물의 도움 없이도 이미 최고였던’ 벤 존슨이었어요. 가난한 배달부에서 정상의 자리까지 ‘자기 앞의 벽을 훌쩍 뛰어넘어 버린 기적의 사나이’. 그가 스스로 함정을 팠을 리 없다고, 그렇게 믿어야만 했던 한 중년 남자의 오랜 마음이 그 골목의 시멘트 담벼락 앞에서 가장 진하게 드러납니다.


“패배하기로 결심하지 않는 한, 패배의 법칙 같은 건 없어야 했다. 저 아이를 위해서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이 문장 하나를 오래 들여다봤어요. 패배의 법칙을 가장 깊이 믿어온 사람이 그 법칙을 부수려고 마음을 내는 순간, 그 결심의 첫 번째 이유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저 아이’라는 점에서요. 그리고 그다음에야 비로소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가 따라붙는다는 순서가 마음에 박혔습니다.


읽는 내내 사무실의 어떤 풍경이 자꾸 떠올랐어요. 요즘의 일터는 참 매끄럽고 쿨해요. 누구도 함부로 묻지 않고, 누구도 함부로 끼어들지 않습니다. 회식이 줄고, 사적인 안부가 줄고, 메신저 한 줄로 끝나는 대화가 늘었어요. 그게 편한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옆자리의 후배가 어떤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되더라고요. 예전에 어떤 선배가 제 점심 도시락을 한참 들여다보다 “자네, 요즘 끼니 잘 못 챙기지?” 한마디를 던지고 가셨던 적이 있어요. 그땐 그 참견이 좀 부담스러웠는데, 돌이켜 보면 그게 ‘옆에 있어준다’는 말의 가장 정확한 모양이었습니다. 무례함을 다 벗겨내고 나면 남는 그 낡고 두꺼운 애정. <나의 벤 존슨>이 소환하는 ‘질척이는 관심’이 바로 그런 결이에요.


이 책의 다정함은 깔끔하게 포장돼서 오지 않아요. 시끄럽고 성가신 옷을 입고 먼저 들이닥칩니다. 지갑을 슬쩍 가져가고, 묻지도 않은 잔소리를 늘어놓고, 자기 일도 아닌 일에 자꾸 끼어들고요. 그 무례함의 안쪽에 어떤 낡은 애정이 들어 있다는 걸 알아차리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려요. 작가는 그 시간을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따라갑니다. 그래서 “옆에 있어주잖아요. 나 가족 생긴 거 처음이에요.”라는 호달의 고백이 도착할 즈음에는, 그 말이 멜로드라마의 대사가 아니라 한 사람이 평생 처음 느껴본 온도라는 게 자연스럽게 믿어졌어요.


읽고 나서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88올림픽의 영광과 추락을 어렴풋이 기억하는 세대에게 이 소설은 ‘그때 그 시간’이 지금 이 골목의 누군가에게 어떻게 가닿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거울 같아요. 사무실에서 서로의 영역에 발 들이지 않는 일을 미덕처럼 익혀온 사람에게는, 한때 자기를 살게 했던 ‘귀찮은 어른들’의 자리를 다시 떠올리게 하는 책이고요. 결승선의 기록보다 옆에서 같이 숨을 고르며 달려준 사람이 더 오래 남는다는 작가의 말이, 다 읽고 나니 빈말이 아니더라고요.


오월의 끝자락, 햇살이 길어진 요즘 가방 안에 이 책 한 권을 넣고 다녔어요. 점심 먹고 들른 공원 벤치, 퇴근길 지하철 손잡이 옆, 잠들기 전 스탠드 불빛 아래에서 조금씩 읽었습니다. 표지에 비껴들던 그 하얀 빛이, 책을 덮은 뒤에도 일상의 모서리에 잠시 머물러 있더라고요.

한 줄로 남겨두자면, 무례함의 옷을 입고 도착한 다정함이 한 사람의 ‘패배의 법칙’을 어떻게 다시 쓰는지에 관한 이야기였어요.


서평을 덮으며 떠오른 얼굴이 있었습니다. 1988년의 그 경기를 어른들 어깨너머로 기억하는 분들. 9초 79라는 숫자와 함께 자랐고, 지금은 사무실에서 매끄러운 거리감을 미덕처럼 익혀온 분들에게 이 책이 한 번쯤 옛 골목의 공기를 데려다줄 거예요. 그리고 요즘 어쩐지 옆자리가 멀게 느껴지는 분들, 누구의 일에도 함부로 끼어들지 않는 것이 어른의 예의라고 생각해온 분들에게도 가만히 건네고 싶습니다. 무례함을 다 벗겨내고 나면 남는 그 낡은 애정의 자리를, 이 책이 조용히 다시 열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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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작 이렇게 책을 읽었더라면
장경철 지음 / 생각지도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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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북유럽 카페 서평단으로 이 책이 도착한 날, 표지부터 한참을 들여다봤어요. 아이보리빛 양장본에 검은 책갈피 띠가 단정하게 늘어져 있고, 노란 형광펜으로 그어둔 듯한 부제 ‘읽고, 배우고, 자기 것으로 남기는 온전한 독서법’이 눈에 들어왔어요. 표지 자체가 잘 정돈된 공부 노트 같다는 인상이었습니다. 사실 이 책을 신청한 이유도 그 부제 한 줄 때문이었어요. 어릴 때 속독법까지 배워가며 페이지를 빠르게 넘기는 데 골몰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렇게 통과시킨 글자들이 지금 제 안에 얼마나 남아 있을까 자문하면 자신이 없거든요. <진작 이렇게 책을 읽었더라면>이라는 제목은 그래서 더 묘하게 찔리는 데가 있었어요.


장경철 교수가 쓰신 이 책은 ‘왜 공부해야 하는가’에서 출발해 ‘무엇을 읽을 것인가’, ‘어떻게 읽을 것인가’, ‘공부한 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로 이어집니다. 키워드는 네 동사예요. 생각하라, 반복하라, 축적하라, 발효시켜라. 단순한 독서법 안내가 아니라, 좋은 내용을 어떻게 자기 삶에 ‘거주’시킬 것인가에 대한 깊은 권유에 가깝습니다.


가장 먼저 마음에 닿은 챕터는 ‘가장 좋은 것은 지금 오는 중이다’였어요. 저자는 인간을 ‘개방된 존재’로 봅니다. 우리가 지금 품고 있는 생각이나 가치관은 영원불변이 아니라 만남과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것이고, 그래서 한 번 들어온 생각을 새로운 기회에 능동적으로 다시 검토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해요. 그러면서 “인간 삶에 있어서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희망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지금 오고 있는 중입니다”라는 문장을 건넵니다. 40대 후반에 이르고 보니, ‘좋은 시절은 이미 지나갔다’는 생각이 들 때가 가끔 있어요. 이 문장은 그 감각을 조용히 뒤집어 주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이 ‘지금도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다’는 표현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어요.


같은 챕터에서 저자는 ‘불만’을 다르게 봅니다. 가능성이 있는데 아직 현실화되지 못할 때 나타나는 신호가 바로 불만이라는 거예요. 아무 내용물이 없는 냉장고에서는 악취가 나지 않는다는 비유가 따라옵니다. 안에 무언가가 있는데 제때 쓰이지 않을 때 부패하고 냄새가 나듯, 사람이 품는 불만도 잠재성이 잠자고 있다는 증거라는 시선이에요. 추운 겨울 마차를 놓쳐 두세 시간을 떨었던 스티븐슨이 결국 증기기관차를 만들었고, 새를 보며 “왜 새들만 날아야 하지?” 묻던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만들었다는 일화를 거치며 저자는 ‘건설적 불만’이라는 표현을 꺼냅니다. 직장 생활에서 가끔 솟구치는 답답함을, 저는 그동안 그저 다스려야 할 감정으로만 여겼던 것 같아요. 그 안에 아직 실현되지 못한 무엇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 책을 덮은 뒤로 종종 떠올랐습니다.


‘반복하고 활용하라’ 챕터는 제가 가장 줄을 많이 그은 자리예요. 저자는 이은성의 <동의보감>을 빌려 허준과 유도지 이야기를 꺼냅니다. 유도지는 명의 유의태의 아들로 매일 일대일 과외를 받았는데도 끝내 허준의 계승자가 되지 못했어요. 저자는 ‘허준이 천부적이었다’는 답도, ‘몇백 배 더 노력했다’는 답도 거부합니다. 그가 찾은 차이는 듣는 ‘태도’였어요. 유도지는 적지 않고 부주의하게 들었고, 허준은 공부방 처마 밑에서 도둑고양이처럼 ‘이번이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마음으로, 오감을 다 동원해 적으며 들었다는 거예요. 같은 가르침 앞에서도 흡입력의 차이가 결과를 가른다는 통찰이 오래 남았습니다. “얼마나 강한 흡입력으로 빨아들이며, 얼마나 자주 활용하는가가 더욱 중요합니다”라는 문장은, 평생 ‘얼마나 많이 읽었는가’로 자신을 매겨온 저에게, 그 잣대를 바꿔보라는 말처럼 들렸어요.


이 챕터에는 사탕과 호주머니 비유도 있어요. 그냥 메모만 해두면 자루에 사탕을 쏟아 둔 것과 같아서, 정작 필요할 때 어느 자리에 무엇이 있는지 찾는 데 시간이 다 가버린다는 거예요. 겨우 꺼냈을 땐 이미 토론 주제가 바뀌어 있고요. 그런데 노트를 만들며 분류해 두면 박하사탕은 오른쪽 주머니, 초콜릿 사탕은 왼쪽 주머니에 넣어 두는 식이라, 적을 때는 시간이 들지만 꺼낼 때는 훨씬 빠르다고 말합니다. 회의실에서 분명 어제 자료를 읽었는데 막상 말이 안 풀리던 순간, 좋은 강연을 듣고도 며칠 지나면 흐려지던 경험을 떠올리면 무릎을 칠 만한 비유였어요. 저자는 노트 만들기의 시작을 거창하게 잡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책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적는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고, 그렇게 옮긴 노트에 시간과 횟수를 더해가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해요.


뒷부분으로 갈수록 책은 점점 ‘삶의 태도’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시간과 횟수를 더하며 발효시키기’에서 저자가 들려주는 자기 고백이 인상적이었어요. 학생들 앞에 책 내용을 그대로 옮겼더니 반응이 좋지 않았고, 더 당혹스러웠던 건 자신이 그 내용을 잘 모르겠다는 느낌이었다는 거예요. 분명 어젯밤 연구실에서는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사람들 앞에 서니 흔들렸다는 솔직함이 좋았습니다. 그가 찾은 해법은 ‘대상을 바꿔가며 옮기는 반복’이었어요. 좋은 내용을 만나면 아내에게 먼저 들려주고, 반응이 좋으면 조교들에게, 그다음 전공 수업 학생들에게, 마지막으로 외부 강연으로 옮긴다는 거예요. 일곱 문장을 옮겼다고 치면, 청중이 반응한 대목은 더 깊이 풀어내고 반응 없는 대목은 다음 자리에서 덜어낸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책 내용을 그대로 옮겼던 강의가,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자기 것으로 바뀌어가는 ‘발효’가 그렇게 일어났다는 거예요.


‘생략으로 단순하게 하기’는 글쓰기 조언처럼 시작해서 결국 삶의 조언으로 닿습니다. 저자는 보고서를 쓰자마자 곧장 제출하는 사람들의 함정을 짚어요. 막 쓴 글을 다시 읽으면 모든 문장이 명문으로 보이는데, 그건 사실 환각 상태라는 거예요. 그래서 제출 전에 반드시 ‘쉼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쉼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라 제정신을 회복하는 시간이라는 정의가 좋았어요. 제정신이 돌아왔다면 작성자의 입장이 아니라 읽게 될 독자 한 사람의 입장에서 다시 읽고, 빨간 펜으로 지워도 뜻에 손상이 없는 단어들을 지워나가야 한다고 권합니다. “명문은 명단어로 구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불필요한 단어들이 사라지면서 남겨진 평범한 단어들이 멋진 문장을 구성하게 됩니다”라는 문장은, 일터에서 메일과 보고서를 매일 만지는 사람으로서 가슴에 박혔습니다.


그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면 같은 원리가 인생으로 확장돼요. 탁월한 삶을 위해 자꾸 덧붙이려 하지만, 오히려 안 해도 되는 순간들을 제할 때 삶의 탁월성이 회복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저자는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여요. 삶에서도 정말 중요한 것은 한 번은 버림을 받아보아야 한다고요. 버림을 받은 후에 그 빈자리가 느껴지는 단어나 순간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로 중요한 부품이고 순간이라는 거예요. 회사 일에서, 관계에서, 익숙해진 습관에서 이 문장을 적용해보면 마음이 가만히 멈춥니다.


책의 끝자락에 저자는 오랫동안 품어온 솔직한 물음을 꺼냅니다. 좋은 책을 읽고 좋은 강의를 들었는데 왜 자기 삶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을까. 그가 찾은 답은 ‘방문’과 ‘거주’의 구분이었어요. 좋은 내용이 잠시 우리 삶을 방문하는 것과, 그 내용이 우리 안에 거주하게 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라는 겁니다. 거주가 되려면 배운 것을 누군가에게 옮기는 ‘유통’이 일어나야 한다고 말해요. 좋은 언어는 옮기고 또 옮기는 사이에 지성에 스며들고 물든다는 표현, 그래서 우리가 언젠가는 좋은 언어를 산출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말이 오래 마음에 남았어요.


사실 이 책을 받기 전까지 저는 서평 쓰는 일을 ‘읽은 책을 정리해 두는 작업’ 정도로 여겼던 것 같아요. 그런데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생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누군가 읽어줄 한 사람을 떠올리며 책의 내용을 제 언어로 옮기는 일, 그러는 동안 글의 결을 다시 곱씹고 분류하고 덜어내는 작업이, 저자가 말한 ‘유통’과 ‘발효’의 한 형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서평단으로 활동하며 만난 도서들 중에서 이 책은 특히 그런 의미로 큰 도움이 되었어요. 어떤 자세로 책을 마주하고, 어떻게 옮겨 적고, 어떻게 다시 펼쳐보아야 하는지를 차분히 일러준 안내서였습니다. 진작 이렇게 책을 읽었더라면, 하는 후회가 잠깐 스치다가도, 지금부터 시작해도 늦지 않다는 저자의 말이 떠올라 마음이 가라앉았어요.


봄과 여름 사이, 햇살이 점점 길어지는 오후에 이 책을 천천히 읽었습니다. 빠르게 넘기지 않고, 줄을 긋고, 한 번 덮었다가 다시 펴는 식으로요. 그렇게 읽고 나니 책장에 꽂아둔 표지들이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다시 펴볼 것과 그렇지 않을 것이 갈리고, 그동안 ‘다 읽었다’고 믿었던 것들 중 사실은 방문만 허용했을 뿐 거주는 시키지 못한 경우가 많다는 것도 알겠어요. 이번 여름엔 새로 한 권을 사는 대신, 줄을 그어둔 표지를 다시 꺼내 펴 볼 생각입니다.


책장에 꽂혀 있던 한 권이 비로소 내 삶에 거주하게 되는 길을 일러주는 안내서.

읽긴 많이 읽는데 돌아서면 남는 게 없어 답답하셨던 분께, 그리고 ‘왜 공부해야 하는지’ 묻는 자녀에게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망설이고 계신 부모님께도 조용히 건네고 싶은 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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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빠지는 몸의 비밀 - 다이어트 호르몬 GLP-1을 깨우는 방법
아네테 삼스 지음, 강수헌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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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요즘 들어 거울 앞에 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허리춤이에요. 마흔 후반에 접어드니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이 농담이 아니더라고요. 회식 자리는 줄지 않고, 야근 끝에 들어와 무심코 손이 가는 야식, 주말이면 한 잔이 두 잔이 되는 술자리까지. 살을 빼는 일이 이렇게까지 어려운 일이었나 싶은 요즘이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북유럽 카페를 통해 한 권의 책을 받았어요. 아네테 삼스의 <살 빠지는 몸의 비밀>. 표지를 처음 마주했을 때는 솔직히 조금 의아했습니다. 큼직한 사보이 양배추 잎이 켜켜이 놓여 있어서, ‘채식을 권하는 책인가, 아니면 어떤 특정 식단을 이야기하려는 걸까’ 싶었거든요. 그런데 읽다 보니 표지의 양배추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어요. 그 의미는 뒤에서 다시 말씀드릴게요.


저자는 위고비와 오젬픽을 개발한 덴마크 제약사 노보 노디스크에서 15년간 일했던 약사이자 박사예요. 비만 약을 만들던 사람이 쓴 책인데, 흥미롭게도 약을 무조건 권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약을 반대하지도 않아요. 그저 한 가지 사실을 차분히 짚어줍니다. 위고비의 활성 성분인 세마글루타이드는 우리 장에서 자연스럽게 분비되는 호르몬 GLP-1을 정교하게 모방한 물질이라는 것. 다시 말해 ‘기적의 신약’처럼 보이는 것이 실은 우리 몸이 이미 만들 줄 아는 물질이라는 이야기예요.


책 초반에 나오는 ‘우편 배달부’ 비유가 오래 마음에 남았어요. 호르몬은 우리 몸에서 신호를 전달하는 생물학적 전달자, 일종의 우편 배달부처럼 작동한다는 설명이거든요.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이 묘하게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우리는 일을 마치면 집으로 돌아가 다음 날을 준비하지만, 호르몬은 그렇지 않다. 역할을 마치면 더는 돌아오지 않는다.” 직장 생활을 오래 한 사람으로서 묘하게 마음이 흔들렸어요. 우리는 퇴근이라는 회복의 시간을 가지지만, 몸속 작은 전달자들은 임무가 끝나면 분해되어 사라진다는 사실이요. 그렇게 묵묵히 일하는 시스템을 두고 너무 오랫동안 칼로리 숫자에만 매달려 왔는지도 모르겠어요.


직장인의 일상과 가장 맞닿은 챕터는 11장 ‘몸의 스위치가 켜지지 않을 때’였습니다. 도입부 풍경이 어쩌면 그렇게 제 모습 같던지요. 바쁜 일상 속에서 빠르게 먹을 수 있는 가공식품에 손이 가는 장면. 가공된 탄수화물 위주의 음식은 입안에서 침과 섞이는 순간 거의 소화가 끝난 상태와 같아서, 영양분이 짧은 시간 안에 십이지장에 도달해 곧바로 흡수된다고 해요. 음식이 너무 빠르게 몸을 통과하니 L세포가 충분히 자극받지 못하고, 인슐린은 GLP-1의 도움 없이 혼자 일해야 한다는 거예요. 점심시간에 후다닥 김밥을 욱여넣고, 저녁엔 배달앱으로 매운 야식을 시켜 먹는 제 모습을 떠올리니, 몸속 작은 전달자가 일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겠구나 싶었습니다.


저자가 들려주는 강연 일화도 인상적이었어요. 한때 초가공식품의 자극에 빠져 있던 사람들이 지금은 ‘양배추를 비롯한 식이섬유가 풍부한 채소에 중독되었다’고 말한다는 거예요. 영양을 풍부히 공급받은 장내 미생물과 활성화된 L세포가 함께 작동할 때, 콜라나 페퍼로니 따위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깊은 만족감을 선사하기 때문이라고요. 그제야 표지의 양배추 잎이 왜 그렇게 자리 잡고 있는지 이해가 됐어요. 단순한 채식 권유가 아니라, 몸속 호르몬의 스위치를 켜는 ‘진짜 음식’의 상징이었던 거죠.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문장은 11장 후반부에 있었어요. “우리의 의지와 몸의 능력에 대해 다시금 기억하자. 당신의 의지와 능력은 어느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 우리 몸은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우리는 생각보다 더 현명하다.” 살이 안 빠진다고 자책하고, 의지가 약하다고 스스로를 탓해온 시간들이 떠올랐습니다. 자본과 광고, 전문가의 목소리에 떠밀려 정작 제 몸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물론 표지에 적힌 “우리 몸은 스스로 지방을 뺀다”라는 한 줄이 정말 그렇게 간단히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기는 합니다. 살이 알아서 빠진다면 다이어트로 고민하는 사람도 없겠지요. 다만 저자가 마지막 장에서 분명히 짚어주는 대로, 그 잠재력을 켜는 스위치는 결국 ‘아는 것’과 ‘선택하는 것’ 사이 어디쯤에 있는 듯해요. 책의 끝자락에 적힌 짧은 문장이 책을 덮고도 한참 머물렀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건 어렵지만 내 자신의 선택을 바꾸는 건 지금 당장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읽고 나니 거창한 다이어트 계획을 세우기보다, 오늘 저녁 메뉴를 한 번 더 들여다보게 되는 책이었어요. 회식 자리에서 채소부터 집어 드는 작은 습관, 야식 대신 한 시간 더 자는 선택,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오르는 일. 이런 사소한 행동들이 사실은 몸속 작은 전달자에게 ‘이제 일을 시작해도 된다’고 신호를 보내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된 것만으로도, 책값 이상의 가치를 했다고 느낍니다.


저처럼 마흔을 넘기며 예전 같지 않은 몸과 마주하고 계신 직장인분들께 먼저 권하고 싶어요. 다이어트가 의지의 문제라고만 들어오신 분들에게 다른 관점을 열어드릴 거예요. 비만 약에 대한 뉴스 사이에서 무엇이 진실인지 헷갈리셨던 분들께도 권합니다. 약을 권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 차분한 목소리가 판단의 기준을 잡아드릴 것 같거든요.


내일은 전국에 비가 온다고 합니다. 모처럼 창밖 빗소리를 들으며 책장을 다시 펼쳐보기에 좋은 날이지 싶어요. 빗방울이 창을 두드리는 사이, 책에서 읽은 대로 식사 사이에 공복의 시간을 두고 저녁 식탁에 채소를 한 접시 더 올려볼 생각입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려는 다이어트가 아니라, 몸속에서 묵묵히 일하는 작은 전달자들에게 미안하지 않은 하루를 만들어보고 싶어요.


약이 아니라 ‘내 몸을 믿는 일’부터 시작하고 싶어지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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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맛있게, 덮밥 착한 레시피북 2
맛있는 테이블 지음, 박원민 사진, 육정민 / 참돌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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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주말이면 으레 짜파게티 한 봉지를 뜯었습니다. 물 올리고, 면 삶고, 분말 털어 비비면 끝이니까요. 그렇게 한 그릇 비우고 나면 배는 부른데 속이 어쩐지 허전했어요. 면보다 밥이 좋은 사람인데, 평일 내내 회사 구내식당과 배달앱을 오가다 보니 정작 주말에는 가장 손쉬운 한 봉지로 도망치게 되더라고요.

<오늘도 맛있게, 덮밥>은 그런 주말 점심의 풍경을 바꿔 보고 싶게 만드는 책이었어요. 북유럽 카페를 통해 받았는데, 처음 손에 쥐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아, 이거 들고 다니기 좋겠다’였습니다. 예전에 즐겨 읽던 <좋은 생각>과 판형이 거의 비슷해서, 작은 가방이나 핸드백에도 쏙 들어가요. 두께도 적당해서 출근길 지하철에서 슬쩍 꺼내 보거나, 점심시간에 카페에서 펼쳐 두기에 부담이 없습니다. 요리책이라고 하면 큼지막한 양장본부터 떠올리던 저에게는 꽤 신선한 만남이었어요.


펼쳐 보면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한 메뉴에 한 페이지, 사진 한 컷, 재료 목록, 네 줄짜리 조리법이 깔끔하게 자리 잡고 있어요. 사진은 식욕을 자극하는 컬러로 또렷하고, 글은 ‘이만큼 넣고, 이렇게 볶고, 밥 위에 올리면 끝’ 식으로 요점만 짚어 줍니다. 요리책을 펼칠 때 가장 부담스러웠던, 길게 늘어진 설명을 읽다가 의욕이 식어 버리는 일이 여기서는 잘 일어나지 않아요. 처음 보는 메뉴인데도 ‘이 정도면 저도 할 수 있겠다’ 싶은 자신감이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책의 도입에서 계량 도구와 조리 도구를 따로 다뤄 둔 점도 좋았어요. 큰술 한 술이 약 15ml, 작은술 한 술이 약 5ml라는 기준을 박스로 또렷이 박아 두고, ‘약간’은 손가락으로 집을 수 있는 한 꼬집 정도라고 친절하게 풀어 줍니다. 감각이나 손맛이라는 말 뒤에 숨기 쉬운 부분을 숫자로 잡아 주니, 요리에 자신이 없는 사람도 ‘일단 시키는 대로’ 해 볼 수 있어요. 칼, 가위, 채칼, 집게, 붓 같은 도구들이 어떤 자리에서 쓰이는지 한 줄씩 짚어 두는 부분도 반가웠습니다. 부엌 서랍에서 잠자던 도구들이 ‘아, 너 여기 쓰는 거였구나’ 하고 살아나는 기분이랄까요.

책은 봄·여름·가을·겨울 네 장으로 나뉘어 있어요. 봄에는 마늘종과 미나리, 주꾸미와 키조개 같은 재료가 등장하고, 여름에는 토마토와 아보카도, 가지와 애호박이 주인공이 됩니다. 가을은 고등어와 연어, 뿌리채소가 그릇을 채우고, 겨울에는 해물과 만두, 소고기가 든든하게 올라가요. 계절 따라 식탁이 바뀌어 가는 모습을 그대로 따라가다 보면, 그동안 제가 얼마나 같은 메뉴만 빙빙 돌고 있었는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그중에서도 눈이 오래 머문 메뉴는 주꾸미 덮밥이었어요. 알이 꽉 찬 봄의 주꾸미를 살짝 데쳐, 파기름을 낸 팬에 양파와 김치를 함께 볶고, 고추장과 고춧가루, 다진 마늘로 잡은 양념을 둘러 마무리하는 흐름인데, 마지막에 깻잎과 김가루를 흩뿌려 내는 그림이 그릇 안에서 봄이 펄펄 살아 있는 것 같았어요. 칼칼한 양념과 고소한 파기름, 갓 지은 밥의 김이 어우러지는 상상만으로 입맛이 돌더라고요.

강된장 덮밥도 꼭 한 번 해 보고 싶은 메뉴로 표시해 두었어요. 구수한 된장에 다진 고기와 채소를 자작하게 조려 밥 위에 얹고, 알배추나 상추에 싸 먹어도 좋다고 안내해 두었는데, 책의 표현대로 ‘정겨운 고향의 풍미’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한 그릇입니다. 어릴 적 시골집 마루에서 먹던 그 맛이 떠올라, 어쩐지 가슴 한쪽이 먼저 따뜻해졌어요.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풍경이 있습니다. 퇴근하고 돌아온 평일 저녁, 가스불 앞에서 십오 분쯤 손을 놀려 한 끼를 차려 내는 모습. 주말 아침 늦게 일어나 가족과 마주 앉아 숟가락을 드는 식탁. 그리고 요즘처럼 햇살이 좋은 오월과 유월 어느 주말, 도시락 통에 덮밥을 옮겨 담아 가까운 공원으로 소풍을 떠나는 그림까지요. 김밥이 아니어도, 샌드위치가 아니어도, 정성껏 만든 덮밥 한 그릇이면 충분히 근사한 도시락이 되겠다 싶었습니다.

읽는 내내 들었던 생각은, 이 책이 ‘요리를 잘하게 만드는 책’이라기보다 ‘요리를 시작하게 만드는 책’에 가깝다는 거였어요. 거창한 한 상을 차리라고 다그치지 않고, 오늘 냉장고에 있는 재료로 그릇 하나만 따뜻하게 채워 보자고 말을 건네는 느낌이거든요. 짜파게티 한 봉지로 때우던 주말이 자꾸 떠오른 것도 그래서였습니다. 그동안 ‘귀찮아서’라고 미뤄 둔 일들이, 사실은 ‘몰라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누구에게나 어울리는 책이지만 굳이 두 그룹을 꼽아 보자면, 먼저 혼자 사는 자취생과 1인 가구 직장인이 떠오릅니다. 2인분 기준이라 한 끼는 그날 먹고 남은 한 끼는 다음 날 도시락으로 옮겨 담기에도 좋고, 네 단계 조리법이라 퇴근 후의 짧은 시간에도 부담이 적어요. 다른 한 갈래는 주말마다 가족 한 끼를 고민하는 분들이에요. 매번 같은 국과 반찬 사이에서 메뉴를 정하지 못해 헤매던 식탁에, 계절 재료로 한 그릇 잘 채우는 새로운 선택지를 더해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창밖으로 햇살이 길게 들어오는 오월 끝자락, 다음 주말에는 짜파게티 봉지 대신 주꾸미 한 봉지를 사들고 와야겠다고 마음먹어 봅니다. 정성껏 차린 한 끼가, 헛헛하던 주말 오후를 조금은 든든하게 채워 줄 것 같아요.

덮밥 한 그릇이면 충분한 주말이 기다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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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브 코더를 위한 최소한의 AI/IT 지식 - '이게 왜 되지?' 개발 안 해본 개발자의 난생처음 바이브 코딩 입문서
클리커 지음, 이희영 옮김 / 한빛미디어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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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요즘 들어 유튜브와 블로그에서 ‘바이브 코딩’이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되었어요. AI에게 말로 시켜서 코드를 받아 내고, 그걸 그대로 붙여 넣어 무언가를 만들어 보는 흐름인데, 보고 있으면 마음이 슬며시 동합니다. 저도 직장 일과는 별개로 제 손으로 작은 홈페이지 하나, 가벼운 앱 하나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거든요. 그러던 차에 <바이브 코더를 위한 최소한의 AI/IT 지식>을 우연히 집어 들게 되었습니다.

처음 들었을 때 든 생각은 ‘얇다, 가볍다’였어요. 핸드북 사이즈에 두께도 부담이 없어서, 출퇴근 가방에 쏙 넣어 다니기에 딱 좋았습니다. 점심 먹고 잠깐, 퇴근길 지하철에서 잠깐, 그렇게 토막 시간을 쪼개 읽기에 이만한 책이 드물어요. 표지의 주황과 청록 손글씨, 스케이트보드를 탄 동글한 캐릭터가 “API, 토큰, JWT, DB…”라고 말풍선을 띄우고 있는 모습도 좋았습니다. 어렵게 가르치려 들지 않겠다는 신호처럼 읽혔어요.

책의 입장은 분명합니다. 표지에 적힌 한 줄처럼 ‘개발 안 해본 개발자의 난생처음 바이브 코딩 입문서’예요. 코드를 처음부터 짜는 법을 알려 주는 책이 아니라, AI가 만들어 준 코드를 보고도 ‘이게 왜 되지?’ 또는 ‘이게 왜 안 되지?’ 싶을 때 그 사이를 메워 주는 책이라는 뜻입니다. 저자는 이를 두고 셰프가 아니라 가정에서 쓰는 사람들을 위한 ‘칼 사용법’이라고 표현해 두었는데, 이 비유가 책 전체의 결을 잘 보여 줘요.

1장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챕터는 ‘AI가 자신 있게 틀리는 이유’였습니다. 저자는 AI의 환각을 두고 “모든 AI가 고질적으로 앓고 있는 지병”이라고 적어 두었어요. 어딘가 답을 검색해 오는 게 아니라, 학습한 패턴을 바탕으로 다음에 올 확률이 가장 높은 단어를 이어 붙이는 구조라는 설명이 따라옵니다. 스마트폰 자동 완성으로 추천 단어를 계속 눌러 보면 문장은 그럴듯한데 내용은 엉뚱해지는 경험에 비유한 설명이 직관적이었어요. 평소 업무에서 챗봇이 당당하게 엉뚱한 답을 내놓을 때마다 당황했던 이유가, 이 한 단락으로 풀리는 기분이었습니다.


“문제는 AI에는 ‘모르겠습니다’ 버튼이 없다는 점입니다.”라는 문장은 한참을 멈춰 서서 읽었어요. 반드시 무언가를 생성해야 하는 구조라서, 데이터에 답이 없어도 그럴듯한 답을 조합해 내놓는다는 풀이가 따라붙습니다. 회사에서 보고서를 쓰다가 ‘이거 한번 정리해 줘’ 하고 AI에 던졌을 때, 너무 매끄러워서 오히려 의심해야 했던 순간들이 떠올랐어요. 매끈한 문장이 곧 정답을 뜻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저는 이 책 덕분에 처음으로 제 입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어지는 단락에서는 바이브 코더 입장에서 환각을 “언제, 어느 강도로 터질지 예측할 수 없는 시한 폭탄”에 비유하는데, 존재하지 않는 라이브러리를 진짜처럼 설치하려 들거나 멀쩡한 라이브러리 안에 없는 함수를 자연스럽게 호출해 버리는 패턴이 그렇다고 짚어요. 설치 단계에선 멀쩡해 보이다 실행하는 순간 무너진다는 대목에서, 평소 일하다 만나는 ‘되는 줄 알았는데 안 되는 일들’이 자연스럽게 겹쳐 보였습니다.

2장에서는 ‘내 컴퓨터에선 되는데 왜 다른 컴퓨터에선 안 될까?’ 챕터가 좋았어요. localhost:3000이라는 익숙하면서도 정체 모를 주소를 두고, localhost는 ‘지금 이 컴퓨터’를 가리키는 특수 주소이고 :3000은 그 안의 방 번호 같은 포트라고 풀어 줍니다. 로컬을 ‘나 혼자 있는 내 방’에 비유한 대목에서 고개가 끄덕여졌어요. 이어지는 페이지에서는 서버를 ‘24시간 꺼지지 않는, 인터넷에 연결된 남의 슈퍼 컴퓨터’로 정의하고,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서버 터졌다’는 표현이 사실 요청이 한꺼번에 몰려 처리를 못 하고 멈춘 상태라는 풀이가 명쾌해요. 클라우드 설명에서는 AWS나 Azure를 두고 ‘구름처럼 보이지만 실은 서버 컴퓨터들이 빼곡한 거대한 건물’이라고 짚어 주는데, 막연했던 단어가 비로소 형체를 얻는 듯했습니다.


‘API가 뭔지는 모르지만 100번은 썼다’ 챕터는 책 제목과 가장 닮은 페이지였어요. ‘카카오톡으로 3초만에 가입’ 버튼을 눌렀을 때, 그 동의 한 번이 어떻게 내 정보를 새로운 서비스로 흘려보내는지 따라가다 보면, 그동안 무심코 눌러 온 버튼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API를 ‘식당의 메뉴판이자 주문 규칙’에 빗댄 설명이 친절했어요. 손님이 주방에 직접 들어가 요리하지 않듯, 우리 서비스가 카카오 내부 시스템에 직접 접속하는 게 아니라 약속된 형식만 지키면 된다는 흐름이 그림처럼 그려집니다.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API를 수백 번 쓴 셈이죠.”라는 한 줄은, 책 제목을 다시 한번 곱씹게 만들었어요.

4장으로 넘어가면 SQL과 NoSQL을 견주는 대목이 기억에 남습니다. SQL을 ‘뭘 넣을지 정해진 서랍장’으로, NoSQL을 ‘가방처럼 아무거나 넣을 수 있는 구조’로 표현한 풀이가 직관적이에요. 회의 자리에서 개발자분들이 MySQL이니 MongoDB니 말할 때마다 어색하게 끄덕이기만 했는데, 이제는 두 단어 사이의 거리감이 어느 정도 가늠이 됩니다.

5장에서 가장 좋았던 페이지는 비밀번호 저장 원리를 풀어 주는 대목이었어요. 비밀번호를 평문 그대로 저장하는 행위를 ‘현관 비밀번호가 적힌 포스트잇을 현관 앞에 붙여 두는 것’에 비유한 대목에서 한참을 멈췄습니다. 그래서 서비스들은 비밀번호를 알 수 없는 문자로 뭉개서 저장하는데, 이 과정을 ‘해시’라고 부르고, 항상 같은 모양으로 갈아 버리는 특수한 파쇄기에 비유해요. 데이터베이스에는 파쇄된 결과만 남고 원본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풀이가 따라옵니다. 요즘 서비스가 비밀번호 찾기를 누르면 기존 비밀번호를 알려 주지 않고 새로 설정하라고 안내하는 이유가 그제서야 납득됐어요. 사용자 입장에서 매번 번거롭다 여겼던 절차가, 사실 저를 지켜 주기 위한 장치였다는 걸 새삼 알게 된 챕터였습니다.


6장의 트래픽 이야기도 마음에 남았어요. 어제까지 하루 10명이던 서비스에 갑자기 시간당 1000명이 몰리는 장면을 그리며, “우리는 기분 좋은 비명을 지르지만 서비스는 살려달라는 비명을 지릅니다”라고 적혀 있어요. 트래픽 스파이크와 서버 과부하라는 단어가, 평소 뉴스에서 ‘티켓팅 사이트 마비’ 같은 헤드라인으로만 접했던 현상의 뒷면을 보여 줍니다. 이어지는 모니터링 챕터에서는 운영자의 불안을 “내가 잠자고 쉬고 여행 가는 동안 갑자기 서비스에 문제가 생기면 어쩌지” 하는 마음으로 짚어 주는데, 직장 다니며 사이드 프로젝트를 꿈꾸는 입장에서 가장 현실적인 대목이었어요. 잠들자마자 울리는 알림이 반갑지 않더라도, 대응이 늦어 사용자를 잃는 것보다 낫다는 한 줄이 오래 남았습니다.

책을 덮고 나니 한 가지 마음가짐이 또렷해졌어요. AI에게 일을 시킬 때, 손발만 빌려주고 머리는 비워 두는 방식으로는 오래 못 간다는 생각입니다. 책 곳곳에서 강조하듯, 이제는 AI의 손발이 아니라 ‘머리’가 되어야 할 시점이에요. 그 머리 노릇을 도와줄 최소한의 지도가 이 한 권에 담겨 있다는 점이, 제게는 가장 큰 효용이었습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제 이름을 단 홈페이지 하나, 앱 하나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바람을, 저는 한동안 ‘언젠가’의 영역으로 미뤄 두고 있었어요. 그런데 책을 덮고 나니, 그 ‘언젠가’가 조금 앞당겨질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AI가 모든 걸 해주지는 않지만, 제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 알게 해 주는 것만으로도 출발선은 충분히 달라지더라고요.


먼저, AI에게 코드를 받아 본 적은 있지만 ‘왜 되는지, 왜 안 되는지’ 설명할 수 없어 답답했던 비전공 직장인. 그리고 개발자와 일하면서 API, 서버, 배포 같은 단어 앞에서 매번 말문이 막혔던 기획자나 자영업자. 두 그룹 모두에게 이 책은 무리하지 않는 첫걸음이 되어 줄 거예요.

요즘처럼 늦봄에서 초여름으로 넘어가는 길목, 해가 길어진 저녁에 카페 창가에 앉아 이 얇은 책을 한 챕터씩 펼쳐 보는 시간이 꽤 좋았습니다. 손에 쥐는 무게가 가벼우니 마음의 부담도 함께 가벼워지더라고요. 오뉴월의 어느 주말, 작은 사이드 프로젝트 하나를 시작해 보고 싶은 분들께 조용히 건네고 싶은 책입니다.


‘이게 왜 되지?’ 앞에서 멈칫했던 직장인에게, AI의 손발이 아니라 머리가 되는 법을 알려 주는 가장 가벼운 입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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