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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 ㅣ 오늘의 일본문학 6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1월
평점 :
악인을 읽고 나서 제일 먼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경구 같은 것은 의외로 간단한 것이었는데 ‘알고 보면 나쁜 사람은 없더라.’라는, 우리가 일상에서 고개를 주억거리며 쓰게있는 말이었다. 이야기의 초반에 다소 허무하게 드러나 버리듯 주인공 유이치는 우발적 살인의 가해자이며 곧 살인을 저지른 죄인이다. 프랑스의 철학자인 폴 리쾨르는 악(惡)을 죄(범하는 악)와 고통(감내하는 악)의 공통 뿌리를 구성하는 하나의 개념으로 생각했는데 이러한 보편적인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죄를 범한 유이치는 역시 악을 행한 악인(惡人)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숨겨져 있던 나름의 사정들이 점차 드러나면서 쉽고 단호하게 판단하는 일이 어려워지기 시작한다.
소설이 절정으로 치닫게 되면서 독자들은 그의 행동에 일정 수준의 개연성을 부여하는, 치밀하게 배치된 수많은 단서들과 그의 범죄를 둘러싼 여러 시선과 악의(惡意)들을 마주하게 된다. 게다가 피해자인 요시노는 왠지 부도덕하고 속물적인 인간으로 그려져 동정심을 가지기 어려워지고 마스오 게이고는, 사실 진정한 악인은 이 사람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경박하고 충동적인 캐릭터로 그려진다. 결국 소설이 진행될수록 악을 행한 사람이 악의 주체가 아닌 객체처럼 생각되고 피해자와 가해자의 입장이 교차하면서 독자들은 가벼운 혼란에 빠지게 되고 등장하는 악인들을 나름의 기준으로 평가하고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나의 경우, 나의 관심을 끈 악인은 유이치였다.
유이치는 버려진 아이였다. 집을 나간 아버지를 만나러 간다는 거짓말을 한 어머니는 아이를 선착장에 버려둔 채 도망쳐 버리고 남겨진 아이는 행정적인 절차를 걸쳐 외가 쪽에 입양된다. 그는 뭔가 결핍되고 위축된 존재로 성장한다. 주된 취미는 공들여 튜닝한 차에 몸을 싣고 황량한 국도를 따라 이 곳과 저 곳 사이를 오가는 일이다. 단짝 친구에 의하면 그는 스스로에 대해 ‘차 없으면 아무데도 못 가는’ 사람이라고 이야기 한다. 한 곳에 머문다는 안정감이 경박하다는 듯, 혹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사람과 사람들 사이를 매끈하게 무관심하게 스쳐 지나간다.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아이는 누구도 쉽게 믿을 수 없기 마련이다. 근본적인 신뢰 관계가 훼손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패션헬스에서 일하는 미호와의 관계에서는 변화의 조짐이 관찰된다. 이 관계에서 그는 육체적인 욕구 충족보다는, 함께 음식을 먹고 차를 마시며 일상을 공유하는 데서 오는 친밀감이나 익숙함에 대한 갈망을 표출하는데, 둘 사이는 일종의 유사 모자 관계와 같아 보인다. 유이치는 이 관계에서 일정 수준의 충족감을 얻게 되지만 미숙한 유이치의 갈망은 불행히도 집착의 수준으로 변질되고 결국 이에 부담을 느낀 미호는 별 다른 예고 없이 직장을 그만두고 잠적해 버린다. 유이치는 유년기의 정신적 유기를 다시 한번 경험하게 된다. 능동적으로 주도하려던 관계는 실패로 마감되고 이로 인한 상처는 어린 시절 피동적으로 경험했던 어머니와의 단절의 기억을 되살리고 이를 더욱 짙은 불안과 좌절의 색채들로 덧칠하였을 것이다.
이후의 관계인 유이치와 요시노와의 만남은 주로 인터넷이나 핸드폰의 문자 서비스 등을 통해서 진행되는데, 이는 체온이나 체취가 제거된 매우 방어적인 만남의 형식으로 보여 진다. 유이치는 요시노의 이미지를 휴대폰에 저장하려는 시도를 하는데 이는 아무런 갈등이나 상처가 존재하지 않는, 스스로를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관계를 추구하려는 유이치의 심리 상태를 반영하는 행동으로 비춰진다.
이후 미쓰세 고개에서 벌어진 우발적인 살인 사건 현장에서 요시노는 의도하건 그렇지 않았건 유이치에게 치명적일 수 있는 발언을 하게 된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납치하고 폭행했다는 거짓된 진술을 경찰에 할 것이라고 소리치고 이에 항의하는 유이치에게 “너 따위가 하는 말을 누가 믿어줄 것 같아”라고 경멸하듯 대꾸해 버린다. 아무도 자신을 믿지 않을 것이라고 두려워하던 유이치에게 이는 치명적인 위협으로 인식되고 결국 우발적인 살인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후 이 소설의 전개가 흥미로운 것은, 살인 사건을 계기로 그가 자신의 죄책감을 해소하고 타인과 소통을 하기위해 태도의 변화를 보인다는 점이다. 미쓰요와의 만남을 통해 그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기본적인 신뢰, 애착, 소통 등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그가 미쓰요라는 구원의 인물과 도피 중에 차를 버리고 등대로 숨어 들어간다는 설정으로 형상화 되는데 이동과 방랑을 의미하는 차를 버리고 등대라는 고립되었지만 안정된 공간에 정착하게 되는 과정이 그것이다. 자신을 버린 어머니에게 필요 없는 돈을 강요하며 필사적으로 가해자의 위치를 점유하는 방식으로 관계를 유지하곤 했던, 미숙하고 순진한 그가 본인이 지은 죄를 인정하고 이를 피하거나 숨기지 않고 대면하였으며 이를 고백하는 과정에서 마쓰요라는 타자와의 연대감을 체험하고 그 만큼의 인간적인 성장을 보여주게 된다. 비록 그것이 늦은 감은 있지만 말이다.
소설은 미쓰요가 자신이 만난 유이치라는 인물을 악인이라고 믿어야 하는지 묻는 독백으로 마무리된다. 이는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악인을 정말 악인이라고 할 수 있나’라는 작가의 문제의식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사실 악은 모든 관계의 파괴와 해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불안감을 느끼는 대상은 우리가 아무런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아예 무지한 대상이고 타자이다. 불안은 공포의 감정과 연결되고 이러한 공포가 투영된 대상은 우리에게 악인의 이미지로서 다가오게 된다. 독자가 유이치에 대해서 가지게 되는 연민과 동정의 감정은 소설 속에 서술된 그에 대한 정보나 관심의 양과 비례하게 된다. 반대로 마스오에 대한 혐오의 감정 역시 그에 대한 정보나 배경 등이 소설 속에 거의 드러나지 않아 공감을 형성할 수 있는 여지가 차단되어있는 상황에서 기인했을 가능성이 크다. 분리, 냉담, 불일치와 같은 것들을 악의 실제적 모습이라고 본다면 작가가 주목하는 것은 개개인의 취약성보다는 오히려 모든 관계를 해체하고 개개인들을 완전한 침묵과 단절 속에 위치시키는 존재 조건, 사회적 조건이라고 생각된다. 좀처럼 객관적이고 냉정한 기술자의 위치를 지키던 작가도 피해자의 아버지인 요시오의 생각을 통해서 다른 사람의 슬픔을 비웃고 소비해 버리는 젊은이들의 태도나 매스 미디어의 보도 행태에 대해 비판과 근심의 시선을 숨기지 않고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당연하게도, 사회는 사회적인 관계가 부재할 때 위기에 처하게 된다. 관계의 파괴와 분열의 이미지로서 만연하는 악에 대한 대처 역시 그에 대한 신학적, 철학적, 과학적 이해나 분석보다는 애정과 동정에 뿌리를 둔 동행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만일 인간이 혼자가 아니라면, 악의 무게는 덜 무거울지도 모른다. 민감하고, 진정어린 경청과 의사소통 등은 악을 물러나게 할 전략에 대한 검토에서 일차적으로 참조되어야 할 요소들이다. 즉, 관심 있는 자만이 돌을 던질 일이다.
소설의 내용 중에 ‘한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피라미드 꼭대기의 돌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밑변의 돌 한 개가 없어지는 거로구나.’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는 왠지 한 인간의 부재가 밑변의 돌 한 개가 없어지는 것과 같은 무게감을 가져야 한다는 당위의 언급처럼 다가온다. 유이치의 행동을 이해하게 된 지금도, 미쓰요의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얼마간의 머뭇거림과 안타까움을 포함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는 죄를 지었고 그 점에서 악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촘촘한 관계의 그물로 악의 심연으로부터 건져 올릴 수 있었던, 이제는 내가 알게 된 악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