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사용법 - 한 편집자의 독서 분투기
정은숙 지음 / 마음산책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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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이자 열혈 독자로서의 저자의 애정에는 충분히 납득이 가지만, 의외로 구성이 산만하고 허술한 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다. 굳이 저런 식의 목차 구분이 필요했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았다.  49에서 50 page에 수록되어 있는 책의 분류 및 배치에 대한 적절한 정리는 꽤나 인상적이었는데, 다음과 같은 5단계를 따르게 되어있다. 

정보를 철저히 습득하는 데 필요한 책 - 내 경우 출판, 문학, 트렌드, 예술 분야 등을 다른 책 -   은 가까운 곳 -  책상, 머리맡, 소파 옆 - 에 두고 항시 시간이 나는 대로 펴들게 된다.  이런 책은 서가에도 잘 가져가지 않는다. 다 읽기 전에는. (1)

정보 습득이 필요하나 좀 시간이 걸릴 만한 분량, 또 단시간에 정보를 습득하지 않아도 되는 책은  먼저 목차나 내용의 일단을 살펴보아 이 책에 무엇이 있는지를 확인한 후 서가에 잘 띄게 꽂아둔다. (2)

정보 습득이 다 끝난 책은 서가의 깊숙한 곳, 심지어 창고까지 가기도 한다. 이런 곳에 잃어버리지만 않을 정도로 둔다. 곁에 두고 봐야 할 책과 그렇지 않은 책을 구별하여 가급적 많은 분량을 따로 보관하도록 한다. (3)

즐거움으로 가볍게 보는 책은 갖고 다니기도 하고 앞에서 말한 것처럼 가까운 데 두고 보다가 
읽기가 끝나면 주위 사람들에게 주거나 버린다 (이런 책들이 주인이 되어 서가를 차지하고 있지 않도고 항상 유의한다). (4)

구입한 책 가운데 내용 파악이 안 된 책은 책상 위나, 때에 따라 서가 밑(꽂아둔 것은 감별이 끝난 책이므로)에 쌓아둬서 주말이나 휴일에 마음먹고 몰입하여 먼저 내용 파악을 한 다음 1번에서 4번으로 각각 처리한다. (5)  

본인의 책이 가까운 서가에서 안식을 취하게 될지, 창고로 직행하게 될지, 혹은 가까운 친구에게 증여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될지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궁금해 지기도 한다. 

아마도 나는 가볍게 즐긴 뒤에 주위 사람에게 증여해 버리는 수순을 밟지 않을까 싶다. 좋은 편집인이자 능란한 작가가 되는 일이 쉬울리는 없겠다. 

*** 저자는 211쪽에서 김수영 전집을 언급하면서 '지금도 나는 수시로 그 시 전집을 들추며 봄날에는 '봄밤'을, 외로운 날에는 '달나라의 장난'을, 사랑이 필요한 날에는 '사랑의 변증법'을, 투지가 필요한 날에는 '풀'이나 '폭포'를 낭송하며 큰 위안을 받는다고 썼다. 뭔가 이상하다 싶어서 김수영 시 전집을 펴보니, '사랑의 변증법'이란 시는 없고 '사랑의 변주곡'이란 시가 덩그러니 버티고 있었다. 뭔가 착오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역시나 책을 쓴다는 일은 쉬운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의 착각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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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산책 2010-07-12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softcell님, 서평을 잘 읽었습니다. 말씀하신 부분을 확인했습니다.저희가 놓친 것이 맞습니다. 저자분이 직접 인용하신 부분은 편집자가 일일이 대조하였으나, 지문에서 책명이나 작품명을 언급하신 부분은 오자가 아니면 그냥 지나친 것이 문제였네요.(저자분은 기억에 의존해서 쓰셨다고 합니다. 너무나 익숙하게 생각하신 것이 그만...)
말씀하신 김수영 시인의 작품은 <사랑의 변주곡>이 맞구요.
참고로 133쪽 르네 지라르의 <낭만적 진실과 소설적 거짓>도 잘못이군요.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이 맞습니다.
앞으로 팩트가 틀리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softcell 2010-07-13 13:54   좋아요 0 | URL
이렇게 친철하게 설명까지 해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항상 좋은 책들 펴내주셔서 즐거운 마음으로 보고 있습니다.
 
악인 오늘의 일본문학 6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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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인을 읽고 나서 제일 먼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경구 같은 것은 의외로 간단한 것이었는데 ‘알고 보면 나쁜 사람은 없더라.’라는, 우리가 일상에서 고개를 주억거리며 쓰게있는 말이었다. 이야기의 초반에 다소 허무하게 드러나 버리듯 주인공 유이치는 우발적 살인의 가해자이며 곧 살인을 저지른 죄인이다. 프랑스의 철학자인 폴 리쾨르는 악(惡)을 죄(범하는 악)와 고통(감내하는 악)의 공통 뿌리를 구성하는 하나의 개념으로 생각했는데 이러한 보편적인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죄를 범한 유이치는 역시 악을 행한 악인(惡人)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숨겨져 있던 나름의 사정들이 점차 드러나면서 쉽고 단호하게 판단하는 일이 어려워지기 시작한다.

 소설이 절정으로 치닫게 되면서 독자들은 그의 행동에 일정 수준의 개연성을 부여하는, 치밀하게 배치된 수많은 단서들과 그의 범죄를 둘러싼 여러 시선과 악의(惡意)들을 마주하게 된다. 게다가 피해자인 요시노는 왠지 부도덕하고 속물적인 인간으로 그려져 동정심을 가지기 어려워지고 마스오 게이고는, 사실 진정한 악인은 이 사람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경박하고 충동적인 캐릭터로 그려진다. 결국 소설이 진행될수록 악을 행한 사람이 악의 주체가 아닌 객체처럼 생각되고 피해자와 가해자의 입장이 교차하면서 독자들은 가벼운 혼란에 빠지게 되고 등장하는 악인들을 나름의 기준으로 평가하고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나의 경우, 나의 관심을 끈 악인은 유이치였다.




 유이치는 버려진 아이였다. 집을 나간 아버지를 만나러 간다는 거짓말을 한 어머니는 아이를 선착장에 버려둔 채 도망쳐 버리고 남겨진 아이는 행정적인 절차를 걸쳐 외가 쪽에 입양된다. 그는 뭔가 결핍되고 위축된 존재로 성장한다. 주된 취미는 공들여 튜닝한 차에 몸을 싣고 황량한 국도를 따라 이 곳과 저 곳 사이를 오가는 일이다. 단짝 친구에 의하면 그는 스스로에 대해 ‘차 없으면 아무데도 못 가는’ 사람이라고 이야기 한다. 한 곳에 머문다는 안정감이 경박하다는 듯, 혹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사람과 사람들 사이를 매끈하게 무관심하게 스쳐 지나간다.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아이는 누구도 쉽게 믿을 수 없기 마련이다. 근본적인 신뢰 관계가 훼손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패션헬스에서 일하는 미호와의 관계에서는 변화의 조짐이 관찰된다. 이 관계에서 그는 육체적인 욕구 충족보다는, 함께 음식을 먹고 차를 마시며 일상을 공유하는 데서 오는 친밀감이나 익숙함에 대한 갈망을 표출하는데, 둘 사이는 일종의 유사 모자 관계와 같아 보인다. 유이치는 이 관계에서 일정 수준의 충족감을 얻게 되지만 미숙한 유이치의 갈망은 불행히도 집착의 수준으로 변질되고 결국 이에 부담을 느낀 미호는 별 다른 예고 없이 직장을 그만두고 잠적해 버린다. 유이치는 유년기의 정신적 유기를 다시 한번 경험하게 된다. 능동적으로 주도하려던 관계는 실패로 마감되고 이로 인한 상처는 어린 시절 피동적으로 경험했던 어머니와의 단절의 기억을 되살리고 이를 더욱 짙은 불안과 좌절의 색채들로 덧칠하였을 것이다.

 이후의 관계인 유이치와 요시노와의 만남은 주로 인터넷이나 핸드폰의 문자 서비스 등을 통해서 진행되는데, 이는 체온이나 체취가 제거된 매우 방어적인 만남의 형식으로 보여 진다. 유이치는 요시노의 이미지를 휴대폰에 저장하려는 시도를 하는데 이는 아무런 갈등이나 상처가 존재하지 않는, 스스로를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관계를 추구하려는 유이치의 심리 상태를 반영하는 행동으로 비춰진다.

 이후 미쓰세 고개에서 벌어진 우발적인 살인 사건 현장에서 요시노는 의도하건 그렇지 않았건 유이치에게 치명적일 수 있는 발언을 하게 된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납치하고 폭행했다는 거짓된 진술을 경찰에 할 것이라고 소리치고 이에 항의하는 유이치에게 “너 따위가 하는 말을 누가 믿어줄 것 같아”라고 경멸하듯 대꾸해 버린다. 아무도 자신을 믿지 않을 것이라고 두려워하던 유이치에게 이는 치명적인 위협으로 인식되고 결국 우발적인 살인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후 이 소설의 전개가 흥미로운 것은, 살인 사건을 계기로 그가 자신의 죄책감을 해소하고 타인과 소통을 하기위해 태도의 변화를 보인다는 점이다. 미쓰요와의 만남을 통해 그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기본적인 신뢰, 애착, 소통 등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그가 미쓰요라는 구원의 인물과 도피 중에 차를 버리고 등대로 숨어 들어간다는 설정으로 형상화 되는데 이동과 방랑을 의미하는 차를 버리고 등대라는 고립되었지만 안정된 공간에 정착하게 되는 과정이 그것이다. 자신을 버린 어머니에게 필요 없는 돈을 강요하며 필사적으로 가해자의 위치를 점유하는 방식으로 관계를 유지하곤 했던, 미숙하고 순진한 그가 본인이 지은 죄를 인정하고 이를 피하거나 숨기지 않고 대면하였으며 이를 고백하는 과정에서 마쓰요라는 타자와의 연대감을 체험하고 그 만큼의 인간적인 성장을 보여주게 된다. 비록 그것이 늦은 감은 있지만 말이다.




 소설은 미쓰요가 자신이 만난 유이치라는 인물을 악인이라고 믿어야 하는지 묻는 독백으로 마무리된다. 이는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악인을 정말 악인이라고 할 수 있나’라는 작가의 문제의식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사실 악은 모든 관계의 파괴와 해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불안감을 느끼는 대상은 우리가 아무런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아예 무지한 대상이고 타자이다. 불안은 공포의 감정과 연결되고 이러한 공포가 투영된 대상은 우리에게 악인의 이미지로서 다가오게 된다. 독자가 유이치에 대해서 가지게 되는 연민과 동정의 감정은 소설 속에 서술된 그에 대한 정보나 관심의 양과 비례하게 된다. 반대로 마스오에 대한 혐오의 감정 역시 그에 대한 정보나 배경 등이 소설 속에 거의 드러나지 않아 공감을 형성할 수 있는 여지가 차단되어있는 상황에서 기인했을 가능성이 크다. 분리, 냉담, 불일치와 같은 것들을 악의 실제적 모습이라고 본다면 작가가 주목하는 것은 개개인의 취약성보다는 오히려 모든 관계를 해체하고 개개인들을 완전한 침묵과 단절 속에 위치시키는 존재 조건, 사회적 조건이라고 생각된다. 좀처럼 객관적이고 냉정한 기술자의 위치를 지키던 작가도 피해자의 아버지인 요시오의 생각을 통해서 다른 사람의 슬픔을 비웃고 소비해 버리는 젊은이들의 태도나 매스 미디어의 보도 행태에 대해 비판과 근심의 시선을 숨기지 않고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당연하게도, 사회는 사회적인 관계가 부재할 때 위기에 처하게 된다. 관계의 파괴와 분열의 이미지로서 만연하는 악에 대한 대처 역시 그에 대한 신학적, 철학적, 과학적 이해나 분석보다는 애정과 동정에 뿌리를 둔 동행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만일 인간이 혼자가 아니라면, 악의 무게는 덜 무거울지도 모른다. 민감하고, 진정어린 경청과 의사소통 등은 악을 물러나게 할 전략에 대한 검토에서 일차적으로 참조되어야 할 요소들이다. 즉, 관심 있는 자만이 돌을 던질 일이다.

 소설의 내용 중에 ‘한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피라미드 꼭대기의 돌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밑변의 돌 한 개가 없어지는 거로구나.’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는 왠지 한 인간의 부재가 밑변의 돌 한 개가 없어지는 것과 같은 무게감을 가져야 한다는 당위의 언급처럼 다가온다. 유이치의 행동을 이해하게 된 지금도, 미쓰요의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얼마간의 머뭇거림과 안타까움을 포함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는 죄를 지었고 그 점에서 악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촘촘한 관계의 그물로 악의 심연으로부터 건져 올릴 수 있었던, 이제는 내가 알게 된 악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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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제임스 미치너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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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향유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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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3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휴머니스트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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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날의 중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극단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시해왔다. 물론 상승하는 경제성장 수치는 그들의 인민 중 극소수의 혜택으로 환원되고 도시와 농촌의 격차는 천양지차로 벌어지겠지만 말이다. 모택동 시대의 중국은 지금보다 훨씬 낮은 GDP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육과 의료의 혜택을 공유했다. 지금처럼 농촌 인구의 80%가 이러한 혜택으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당하지 않고 말이다. 범죄와 매춘, 노동착취 등의 사회 문제 역시 두드러지지 않았다는 것이 중평이다. 지난 27년 간의 개혁은 중국의 인적자원과 천연자원들을 붕괴시키고 당과 국가의 정치적 신뢰성 마저 소모해버렸다는 평가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다.

위화는 이광두가 폐품 양복을 팔아서 부를 축적한 과정이 중국의 80년대를 상징하는 것이고 미인대회와 인공 처녀막 등의 에피소드는 중국의 90년대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이야기 했다. 사실 송강이 여성형 유방으로 성형을 한 뒤 약장사를 하면서 돌아다니는 에피소드는 1권에서 송범평이 홍위병들에게 매질을 다해 맞아 죽는 장면을 자세하게 묘사한 에피소드와 함께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었다.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이러한 평가에 대해 위화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

" 문화대혁명도 현대 사회도 비판하고 싶다. <형제>라는 소설이 중국 사회의 판도라 상자를 열 었다는 평가를 들었다. 이 소설은 "모든 이는 자신이 속한 사회에 책임이 있고, 그 사회의 온갖 폐해에 대해 일말의 책임이 있다."라는 입센의 말을 생각하며 썼다.... 중국 사회의 거대한 병폐에 대해 나는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고 나는 총체적으로 병든 사회 속에 한 사람의 '병자'라고 느꼈다. 그것이 내가 <형제>를 쓴 이유이다."   (작가노트 51page)

이 부분을 보니 그렇게 모질게 써야 했던 이유나 사명감 같은 것들이 이해가 되는 느낌이다. 사실 이 소설의 놀라운 부분은 이런 모진 자세와 우직함에 기인하는 바가 큰 것 같다. 1권에서 문화대혁명이라는 하나의 체제가 무너지면서 모주석의 말씀을 인용하던 군중들이 얼마나 빠르게 다음 체제로 적응을 해나가는지를 치밀하게 보여주는 부분이 있는데 처음 읽을 당시에는 왜 이리 같은 양식을 반복하나 하는 생각이 들이도 했다. 뽑치는 이렇게 적응하고 철장은 저렇게 변신하고 하는 과정들 말이다. 하지만 이런 지리한 동어반복 뒤에는 작가적 책임감 같은 것들이 존재했던 것 같다. 기록의 사명과 같은 것 말이다.

임홍을 사이에 둔 이광두와 송강의 사랑과 배신의 과정 역시 송강의 지순한 사랑보다는 욕망에 의해 치마끈을 풀어 버리는 임홍의 변신에 더 방점을 찍고 있는 것 같다. 거센 사회적 변화 앞에 한 없이 약하고 초라해져 가는 현 중국의 군중들을 고통스럽게 묘사하고 고발하려는 태도가 역력하다. 2권과 3권의 현기증 나는 타락과 추락, 배신과 변신을 묘사하기 위해 1권의 스토리들을 공드려 쌓아 올린 것 같은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참으로 무겁고 가학적으로 까지 느껴지는 전개라고 할 수 있겠다. 류진 최고의 작가 행세를 하다 후에 이광두의 비서 역할로 변신하는 조 시인 같은 지식인에 대한 풍자는 오히려 약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정말 현기증 나는 추락과 타락의 풍경들이다.

송범평이 역전에서 홍위병들에게 '맞아 죽는' 장면에서 그 '구경 거리'를 무심히 지켜보던 군중들의 묘사는 후에 방치된 송범평의 시체 주변을 떠돌던 파리떼의 묘사와 의도적으로 병치된다. 송범평과 이란의 첫 날밤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군중들의 묘사 역시 그러하다. 

"<형제>에 묘사된 군중의 형태는 전형적인 중국 지방 소도시의 모습이다. 모든 사람이 경찰처럼 남의 일에 관심을 기울인다. 노신이 살았던 시대에는 훨씬 심했다. 군중의 이런 모습은 중국의 국민성임과 동시에 중국의 후진성이기도 하다. 나 또한 이러한 군중의 속성이 공포스럽다..."   (작가노트 52 page)

위화는 대중에 대한 공포는 혐오의 정서를 동반한다. 파리떼에 대한 지겨움 같은 것. 스스로의 의사 표현이나 행동 추구 없이 말초적인 구경 거리에 탐닉하는 사람들에 대한 지겨움 말이다. 하지만 이런 모습이 중국의 국민성을 나타낸다는 주장에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측면이 있다. 자유민주주의가 일정 부분 진행되었다는 대한민국의 네티즌이 보여주는 말초적 쾌락 탐닉과 익명성 추구의 모습들 역시 이에 못지 않기 때문이다. 말초적 욕망에 한 없이 약한 군중의 모습은 중국의 후진성이라기 보다는 일방적 경제 논리에 의해서 파편화되어가는 신자유주의 시대 군중의 일반적인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시 지나간다.

근자에 보기 드믄 완성도의 번역을 보여준 작품으로도 기억될 위화의 <형제>는 정말 아찔한 추락의 순간들을 풍자라는 형식과 자기만의 고유한 서사의 방식을 통해 고집스럽게 보여준다. 그 과정은 이광두가 류진을 좌우할 정도의 거부가 되는 자수성가의 성공담도 아니고 임홍이라는 순애보의 대상이 포주로 변신하는 전락의 드라마도 아니다. 이는 송강이라는 순박한 중국인이 어떻게 '외계인'으로 소외되는 지를 고통스럽게 응시하는 다큐멘터리적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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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츠바랑! 6
아즈마 키요히코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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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츠바랑> 1권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사' 에피소드를 보면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나온다.  비에 폭삭젖은 채로 두 팔을 벌리고 마당에 서 있는 요츠바에게 옆집의 후카가 어서 안으로 들어올 것을 재촉하는 장면에서 말이다. 이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요츠바의 아버지는 이런 말을 한다. "괜찮아 괜찮아. 저 녀석은 뭐든 즐기거든. 무적이야." 라고 말이다. <요츠바랑> 6권은 무엇이든 항상 즐기는 요츠바의 무적의 기록. 그 여섯번 째 모음집이다.                         

여기서 요츠바는 다섯살이 되었다. (물론 본인은 여섯살이라고 엉뚱한 대답을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다섯살 요츠바의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놀라울 정도의 섬세함으로 표현되고 있다.          

첫 번째 '재활용' 에피소드에서는 다양한 도구들을 이용해 상징 놀이(symbol play)를 헤치우더니 자전거와 우유 배달에 관련된 에페소드에서는 스스로의 놀이 공간을 후카의 학교로 까지 확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직은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거나 그들의 행동을 조절할 수 없는 탓에 배달을 다녀오던 여정 끝에 아버지가 화를 내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며 '고약한 녀석'과의 관계 역시 아직은 순탄치가 않은 듯 하다. 언제나 사물에 심리적 의미를 부여하며 대화를 나누기도 하는 버릇은 여전하고 어찌보면 자폐적인 것 같고 어른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금요일' 에피소드에서는 아버지의 간식을 건드린 뒤 미안해하는 모양새를 보이고 온 집안을 단어 표지로 능숙하게 뒤 덮는 언어 사용 능력을 선보여 좀 성숙한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요츠바가 무적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 아이가 언제나 자기 중심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어린 시절에는 자신의 우주의 중심이고 전지전능한 존재라는 인식을 유지하게 되는 시기가 존재한다. 세상의 일부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느끼는 것이 온 세상을 구성하게 되는 전지전능한 유희의 시절 말이다.

<요츠바랑>의 관전 포인트는 바로 여기에 존재한다. 요츠바는 <아기와 나>의 진이와 신이처럼 응석받이이거나 어른스러움을 강요받는 존재가 아니며 동시에 <아기공룡 둘리>의 둘리처럼 처음에는 동심에 호소하는 듯 하지만 결국은 세속화의 과정을 겪게되는 캐릭터도 아니다. 무슨 요술이나 마법에 능통한 것도 아니고 고길동 같은 가혹한 부양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자라나는 아이인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이 너무 즐거운 것은 요츠바 자신이 아닌 요츠바를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아버지와 점보, 옆집의 자매들, 기타 친구의 친구들)의 관찰을 통해서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요츠바의 주변인들은 언제나 요츠바식 놀이에 진심으로 동참한다. 요츠바의 룰을 쉽게 받아들이고 오히려 경쟁심에 불타서 무리를 하기도 한다. 그리고 '충분히' 그리고 '마음껏' 이를 즐긴다. 그리고 잠시 회상에 빠지기도 한다. 본인이 무적의 존재로 군림하던 시절을 말이다.

우리는 대게 무적의 시기를 지나 순종과 적응의 시기에 살게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당신에게는 요츠바와 같았던 시기가 당연히 존재했다. 물론 주변에서 얼마나 당신의 규칙에 호응을 해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항상 최강의 시기로 돌아가고 싶은 모든 사람들의 바램이 투영된 요츠바라는 캐릭터의 생명력은 바로 그 욕구 속에 요란스럽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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