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 3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휴머니스트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오늘 날의 중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극단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시해왔다. 물론 상승하는 경제성장 수치는 그들의 인민 중 극소수의 혜택으로 환원되고 도시와 농촌의 격차는 천양지차로 벌어지겠지만 말이다. 모택동 시대의 중국은 지금보다 훨씬 낮은 GDP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육과 의료의 혜택을 공유했다. 지금처럼 농촌 인구의 80%가 이러한 혜택으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당하지 않고 말이다. 범죄와 매춘, 노동착취 등의 사회 문제 역시 두드러지지 않았다는 것이 중평이다. 지난 27년 간의 개혁은 중국의 인적자원과 천연자원들을 붕괴시키고 당과 국가의 정치적 신뢰성 마저 소모해버렸다는 평가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다.

위화는 이광두가 폐품 양복을 팔아서 부를 축적한 과정이 중국의 80년대를 상징하는 것이고 미인대회와 인공 처녀막 등의 에피소드는 중국의 90년대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이야기 했다. 사실 송강이 여성형 유방으로 성형을 한 뒤 약장사를 하면서 돌아다니는 에피소드는 1권에서 송범평이 홍위병들에게 매질을 다해 맞아 죽는 장면을 자세하게 묘사한 에피소드와 함께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었다.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이러한 평가에 대해 위화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

" 문화대혁명도 현대 사회도 비판하고 싶다. <형제>라는 소설이 중국 사회의 판도라 상자를 열 었다는 평가를 들었다. 이 소설은 "모든 이는 자신이 속한 사회에 책임이 있고, 그 사회의 온갖 폐해에 대해 일말의 책임이 있다."라는 입센의 말을 생각하며 썼다.... 중국 사회의 거대한 병폐에 대해 나는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고 나는 총체적으로 병든 사회 속에 한 사람의 '병자'라고 느꼈다. 그것이 내가 <형제>를 쓴 이유이다."   (작가노트 51page)

이 부분을 보니 그렇게 모질게 써야 했던 이유나 사명감 같은 것들이 이해가 되는 느낌이다. 사실 이 소설의 놀라운 부분은 이런 모진 자세와 우직함에 기인하는 바가 큰 것 같다. 1권에서 문화대혁명이라는 하나의 체제가 무너지면서 모주석의 말씀을 인용하던 군중들이 얼마나 빠르게 다음 체제로 적응을 해나가는지를 치밀하게 보여주는 부분이 있는데 처음 읽을 당시에는 왜 이리 같은 양식을 반복하나 하는 생각이 들이도 했다. 뽑치는 이렇게 적응하고 철장은 저렇게 변신하고 하는 과정들 말이다. 하지만 이런 지리한 동어반복 뒤에는 작가적 책임감 같은 것들이 존재했던 것 같다. 기록의 사명과 같은 것 말이다.

임홍을 사이에 둔 이광두와 송강의 사랑과 배신의 과정 역시 송강의 지순한 사랑보다는 욕망에 의해 치마끈을 풀어 버리는 임홍의 변신에 더 방점을 찍고 있는 것 같다. 거센 사회적 변화 앞에 한 없이 약하고 초라해져 가는 현 중국의 군중들을 고통스럽게 묘사하고 고발하려는 태도가 역력하다. 2권과 3권의 현기증 나는 타락과 추락, 배신과 변신을 묘사하기 위해 1권의 스토리들을 공드려 쌓아 올린 것 같은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참으로 무겁고 가학적으로 까지 느껴지는 전개라고 할 수 있겠다. 류진 최고의 작가 행세를 하다 후에 이광두의 비서 역할로 변신하는 조 시인 같은 지식인에 대한 풍자는 오히려 약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정말 현기증 나는 추락과 타락의 풍경들이다.

송범평이 역전에서 홍위병들에게 '맞아 죽는' 장면에서 그 '구경 거리'를 무심히 지켜보던 군중들의 묘사는 후에 방치된 송범평의 시체 주변을 떠돌던 파리떼의 묘사와 의도적으로 병치된다. 송범평과 이란의 첫 날밤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군중들의 묘사 역시 그러하다. 

"<형제>에 묘사된 군중의 형태는 전형적인 중국 지방 소도시의 모습이다. 모든 사람이 경찰처럼 남의 일에 관심을 기울인다. 노신이 살았던 시대에는 훨씬 심했다. 군중의 이런 모습은 중국의 국민성임과 동시에 중국의 후진성이기도 하다. 나 또한 이러한 군중의 속성이 공포스럽다..."   (작가노트 52 page)

위화는 대중에 대한 공포는 혐오의 정서를 동반한다. 파리떼에 대한 지겨움 같은 것. 스스로의 의사 표현이나 행동 추구 없이 말초적인 구경 거리에 탐닉하는 사람들에 대한 지겨움 말이다. 하지만 이런 모습이 중국의 국민성을 나타낸다는 주장에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측면이 있다. 자유민주주의가 일정 부분 진행되었다는 대한민국의 네티즌이 보여주는 말초적 쾌락 탐닉과 익명성 추구의 모습들 역시 이에 못지 않기 때문이다. 말초적 욕망에 한 없이 약한 군중의 모습은 중국의 후진성이라기 보다는 일방적 경제 논리에 의해서 파편화되어가는 신자유주의 시대 군중의 일반적인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시 지나간다.

근자에 보기 드믄 완성도의 번역을 보여준 작품으로도 기억될 위화의 <형제>는 정말 아찔한 추락의 순간들을 풍자라는 형식과 자기만의 고유한 서사의 방식을 통해 고집스럽게 보여준다. 그 과정은 이광두가 류진을 좌우할 정도의 거부가 되는 자수성가의 성공담도 아니고 임홍이라는 순애보의 대상이 포주로 변신하는 전락의 드라마도 아니다. 이는 송강이라는 순박한 중국인이 어떻게 '외계인'으로 소외되는 지를 고통스럽게 응시하는 다큐멘터리적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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