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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 프라베티 지음, 김민숙 옮김, 박혜림 그림 / 문학동네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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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정원 - 김용석의 고전으로 철학하기
김용석 지음 / 한겨레출판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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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문학이나 영화를 재료로 사용하고 '철학'을 주 요리법으로 선택하여

먹기 편하게 요리된 책 두 권을 읽었다.

하나는 '철학 정원'(이하 '정원)이고,

또 한 권은 '철학 카페에서 문학 읽기'(이하 '카페')이다.

둘다 무척 흡족했고,
저자가 다른 책을 낸다면 그 책도 사 볼 것 같다.








책 이야기로 들어가자면,

'정원'을 읽으면서는 기분이 굉장히 좋아졌다.

문학이나 영화의 원전에 대한 해석이나 평을 다룬 이런 류의 책을

내 딴에는 '독후감책'이라고 부르는데,

그리고 '독후감책'을 별로 즐기지도 않는데,

'정원'은 참 즐거웠다.

저자의 신선하면서도 명확한 해석 때문이리라.

아마 나는

어떤 책을 읽으면서도 뭔가 가슴에 맴맴 도는 생각들은 있지만

그것을 언어화시키지 못해 답답했었는데,

이 책에서는 선명하게 언어화되어 있어서 속이 시원했던 모양이다.

예를 들면, 리처드 도킨슨의 '이기적 유전자'에 대해

(1)도킨슨의 이론은 세상이 호들갑 떨 정도로 굉장히 새롭고 도발적인 이론이라기보다는 다윈 이론을 개체 입장에서가 아니라 유전자 입장에서 본 견해일 뿐이라는 것.

(2)환원주의가 가진 편리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통해 얻어진 결론을 유일한 결론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점.

이라고 강조했다. 나로서는 하고 싶던 말이라 속이 시원하기도 했고, 저자가 상식적이고^^ 균형잡힌 시각을 갖고 사는 사람이라는 편견(?)을 갖게도 만들었던 대목이다.^^




또  이 책은

문학 뿐만 아니라, 철학 고전이나 과학 고전, 영화 뿐만 아니라 잘 알려진 동화까지도

요리 재료로 다루었는데, 썩 먹을만했다.

평범해 보이는 재료로 썩 먹을만하게 만들어진 요리가 주는 감동^^

'어린 왕자'의 '길들임'을 예로 들어보자면,

어린 왕자에게 '길들인다는 것'을 가르치는 여우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 아닌가.




저자의 말을 잠깐 인용




 

"참을성이 있어야 해. 처음에는 내게서 좀 떨어져 이렇게 풀밭에 앉아 있어. 난 너를 흘끔흘끔 곁눈질해 볼 거야.....날마다 넌 조금씩 더 가까이 다가앉을 수 있게 될 거야." 그러다가 아무 간격 없이 붙어 앉게 되면 길들이기는 완성된다. 이 완성의 단계가 뜻하는 건, 서로 소통하고자 하는 두 존재 사이에 어떤 매체(media)도 끼어들거나 매개하지 않는 즉각적이고 비매개적인 관계이다. 여우는 육성언어의 미디어조차 거부한다. "아무 말도 하지 마! 말은 오해의 근원이야." 곧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체의 미디어를 거부하는 것이다. (66쪽)

 




이 '매개'와 '비매개적 관계'는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에 대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었다 . media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자유로운가? 하는 의문들을 오랫동안 스스로에게 던져 보았다.




'정원'을 읽다가

내가 읽지 않는 책이나, 보지 않았던 영화를 다룬 부분 몇 개는

다음을 기약한 채, 읽지 않고 건너뛰었다.

저자의 목소리가 너무 강렬한지라, 인상 깊어서

나의 독서 전에 선입견으로 남을 것 같은 두려움이 생겨서였다.


내가 먼저 읽지 않으면,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





이에 반해, '카페'는 조금 더 편하게 읽힌다.

이미 원전을 읽은 사람은 좀 지루하게도 느껴질 수도 있을 만큼 원전 내용에 대해서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반대로 생각하면, 원전을 읽지 않은 사람도 편하게 접할 수 있을 만큼 친절하다는 것이다. 나는 아직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지 못했는데,

두려움없이 김용규의 해석을 먼저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은 나에게 이런 의문을 한번 더 던진다.




요즘 신영복 선생님의 책을 읽고 나서 부쩍 드는 생각이 있다.

왜 어떤 저자들은 '우와~ 똑똑하다'라는 느낌만 주는데 비해,

어떤 저자들은 '똑똑할 뿐만 아니라, 따뜻하기도 하다니...'라는 인상을 풍기냐는 것이다.

도대체 그 차이는 어디서 생기는 것일까.

대다수의 저자들이 전자이고, 후자의 저자들은 드물다.

'카페'의 저자 김용규 씨는 드문 인상을 가졌다. 최소한 내게는 그렇다.

박식함과 따뜻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요리 방법이 무척 훌륭하다고 인정을 하면서도

저자의 박식함 때문에 독자가 주눅들지 않는다.

단골 커피집의 바리스타처럼 존경스러우면서도 편하다.

문체는 곧 사람됨이라 하지만,

도대체 구체적으로 글의 어떤 점이 그런 차이점을 생겨나게 하는 것일까.

문득 그것이 궁금하다.  단지 문체 때문일까??

차차 탐구해보기로 한다.







두 책 모두 아주 좋은 인상으로 남았는데,

굳이 비교를 하자면 이렇다.

'정원'은 읽고 나서 주눅이 좀 들었다면

(거기에서 다룬 책들을 읽고, 내가 저자보다

더 멋진(?) 해석을 할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카페'는 읽고 나서 용기를 좀 얻었다. ^^

(나도 결국은 생각해 봐야 할 문제구나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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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객 2009-06-14 0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서평 잘 읽었습니다.
저두 카페는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 뒤로 이런 철학책을 보면 좋겠구나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요즘 그리고 신영복 선생님의 책을 보고 있는데 위의 예를 드신 말이 참 가슴에 와닿네요. ^^;
저두 주눅든 책들만 보고 와서인지..... 일단 보관하기에 담아 둡니다. ^^;

알수없어요 2009-06-16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따뜻한 작가들이 많아지도록 주눅들지 말고 책 읽어갈까요?^^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 <파우스트>에서 <당신들의 천국>까지, 철학, 세기의 문학을 읽다
김용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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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문학이나 영화를 재료로 사용하고 '철학'을 주 요리법으로 선택하여

먹기 편하게 요리된 책 두 권을 읽었다.

하나는 '철학 정원'(이하 '정원)이고,

또 한 권은 '철학 카페에서 문학 읽기'(이하 '카페')이다.

둘다 무척 흡족했고,
저자가 다른 책을 낸다면 그 책도 사 볼 것 같다.








책 이야기로 들어가자면,

'정원'을 읽으면서는 기분이 굉장히 좋아졌다.

문학이나 영화의 원전에 대한 해석이나 평을 다룬 이런 류의 책을

내 딴에는 '독후감책'이라고 부르는데,

그리고 '독후감책'을 별로 즐기지도 않는데,

'정원'은 참 즐거웠다.

저자의 신선하면서도 명확한 해석 때문이리라.

아마 나는

어떤 책을 읽으면서도 뭔가 가슴에 맴맴 도는 생각들은 있지만

그것을 언어화시키지 못해 답답했었는데,

이 책에서는 선명하게 언어화되어 있어서 속이 시원했던 모양이다.

예를 들면, 리처드 도킨슨의 '이기적 유전자'에 대해

(1)도킨슨의 이론은 세상이 호들갑 떨 정도로 굉장히 새롭고 도발적인 이론이라기보다는 다윈 이론을 개체 입장에서가 아니라 유전자 입장에서 본 견해일 뿐이라는 것.

(2)환원주의가 가진 편리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통해 얻어진 결론을 유일한 결론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점.

이라고 강조했다. 나로서는 하고 싶던 말이라 속이 시원하기도 했고, 저자가 상식적이고^^ 균형잡힌 시각을 갖고 사는 사람이라는 편견(?)을 갖게도 만들었던 대목이다.^^




또  이 책은

문학 뿐만 아니라, 철학 고전이나 과학 고전, 영화 뿐만 아니라 잘 알려진 동화까지도

요리 재료로 다루었는데, 썩 먹을만했다.

평범해 보이는 재료로 썩 먹을만하게 만들어진 요리가 주는 감동^^

'어린 왕자'의 '길들임'을 예로 들어보자면,

어린 왕자에게 '길들인다는 것'을 가르치는 여우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 아닌가.




저자의 말을 잠깐 인용




 

"참을성이 있어야 해. 처음에는 내게서 좀 떨어져 이렇게 풀밭에 앉아 있어. 난 너를 흘끔흘끔 곁눈질해 볼 거야.....날마다 넌 조금씩 더 가까이 다가앉을 수 있게 될 거야." 그러다가 아무 간격 없이 붙어 앉게 되면 길들이기는 완성된다. 이 완성의 단계가 뜻하는 건, 서로 소통하고자 하는 두 존재 사이에 어떤 매체(media)도 끼어들거나 매개하지 않는 즉각적이고 비매개적인 관계이다. 여우는 육성언어의 미디어조차 거부한다. "아무 말도 하지 마! 말은 오해의 근원이야." 곧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체의 미디어를 거부하는 것이다. (66쪽)

 




이 '매개'와 '비매개적 관계'는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에 대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었다 . media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자유로운가? 하는 의문들을 오랫동안 스스로에게 던져 보았다.




'정원'을 읽다가

내가 읽지 않는 책이나, 보지 않았던 영화를 다룬 부분 몇 개는

다음을 기약한 채, 읽지 않고 건너뛰었다.

저자의 목소리가 너무 강렬한지라, 인상 깊어서

나의 독서 전에 선입견으로 남을 것 같은 두려움이 생겨서였다.


내가 먼저 읽지 않으면,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





이에 반해, '카페'는 조금 더 편하게 읽힌다.

이미 원전을 읽은 사람은 좀 지루하게도 느껴질 수도 있을 만큼 원전 내용에 대해서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반대로 생각하면, 원전을 읽지 않은 사람도 편하게 접할 수 있을 만큼 친절하다는 것이다. 나는 아직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지 못했는데,

두려움없이 김용규의 해석을 먼저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은 나에게 이런 의문을 한번 더 던진다.




요즘 신영복 선생님의 책을 읽고 나서 부쩍 드는 생각이 있다.

왜 어떤 저자들은 '우와~ 똑똑하다'라는 느낌만 주는데 비해,

어떤 저자들은 '똑똑할 뿐만 아니라, 따뜻하기도 하다니...'라는 인상을 풍기냐는 것이다.

도대체 그 차이는 어디서 생기는 것일까.

대다수의 저자들이 전자이고, 후자의 저자들은 드물다.

'카페'의 저자 김용규 씨는 드문 인상을 가졌다. 최소한 내게는 그렇다.

박식함과 따뜻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요리 방법이 무척 훌륭하다고 인정을 하면서도

저자의 박식함 때문에 독자가 주눅들지 않는다.

단골 커피집의 바리스타처럼 존경스러우면서도 편하다.

문체는 곧 사람됨이라 하지만,

도대체 구체적으로 글의 어떤 점이 그런 차이점을 생겨나게 하는 것일까.

문득 그것이 궁금하다.  단지 문체 때문일까??

차차 탐구해보기로 한다.







두 책 모두 아주 좋은 인상으로 남았는데,

굳이 비교를 하자면 이렇다.

'정원'은 읽고 나서 주눅이 좀 들었다면

(거기에서 다룬 책들을 읽고, 내가 저자보다

더 멋진(?) 해석을 할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카페'는 읽고 나서 용기를 좀 얻었다. ^^

(나도 결국은 생각해 봐야 할 문제구나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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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록 : 조선의 영웅들, 천하에 당할 자 없으니 국어시간에 고전읽기 (나라말) 16
장경남 지음, 한동훈 그림 / 나라말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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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고, 영화이고
전쟁을 소재로 다룬 것은 기피하는 것이
내 성향이다.
10번은 읽어야 한다는 삼국지를 읽고 나서도
"탐욕스러운 넘들... 땅도 넓구만 사이좋게 같이 살지, 왜들 싸우고 난리야"
하고 씩씩거리면서 다시는 읽지 않았었다.
암튼 이 방면으로는 나는 형편없는 독서자이다.
전쟁 이야기만 나오면, 아무리 멋진 이야기라도
우선 화부터 나니 말이다. 

그런데, 아는 어른께서 난데없이 선물로 이 책을 보내셨다.
책을 읽고, 평을 말해야 한다는 숙제 의식 때문에
꾸역꾸역 들추기 시작했다. 

임진록을 읽어본 것은, 아주 어릴 때 어린이용 임진록이 처음이었다. 
사명당이 일본에서 벌인 신기한 활약상이 인상에 깊게 남았다. 

그리고 7년 전쯤엔가도 필요에 의해 한 번 읽었었는데,
화만 잔뜩 났었던 것 같다. 오합지졸 구성에 오합지졸 조선~^^

나라말 출판사에서 고전읽기 시리즈를 계속 출판하고 있는데
운영전으로부터 시작해서 이것이 16번째 책이다.
운영전을 풀어 쓴 '손가락에 잘못 떨어진 먹물 한 방울' 도 참 잘 풀어썼다고 생각했는데
16번째 시도까지도 초심을 잃지 않았다는 좋은 인상을 준다^^
 청소년들이 거부감없이 읽어낼 수 있는 문체로 잘 풀어쓴데다
전공자의 깊이 있는 분석과 균형감 있는 시각까지 돋보인다.

내가 그동안 왜 전쟁 이야기를 기피했었을까 
생각해 본다.
전쟁을 생각하면 구토부터 난다.
역사가 기록되기 시작한 이후로
인류 역사에 전쟁이 없었던 날이 40여일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 말을
어디에서 들은 것 같다....
인간이란 게 왜 전쟁을 하며 살 수 밖에 없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T.T

어쨌든 전쟁은 그 사회에 있어서, 커다란 위기이다.
사람이건 사회이건 위기 앞에서는 정체가 드러나는 법인가 보다.
평화시에는 잘 드러나지 않던 면들이, 선명하게 잘 드러난다.

건국 이후로 200년이나 평화를 구가하던 조선은
임진년의 왜의 침입으로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 위기 앞에서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자신의 자신됨을 드러낸다.

선조의 나약함,
유성룡의 어른스러움과 현실적 사고,
이순신의 예지과 꿋꿋함,
그리고 수많은 배반자들의 기회주의.

수많은 기회주의자들 중에서 국경인이라는 사람이 압권이다.


임해군과 순화군 두 왕자가 대신들을 거느리고 강화도를 거쳐 북도에 들어가 회령에 머물고 있었는데, 이 고을 아전 국경인이라는 놈이 흉계를 세우고 동료 십여 명고 모여 몰래 의논하였다.
"지금 조선은 거의 다 왜적의 손아귀에 들어 예전처럼 회복되기는 어려운 형편이 되었소. 어찌 서산에 지는 해만 바라고 있겠는가? 이제 동녘에 떠오르는 새 달을 따르는 것이 옳지 않겠소? 우리가 두 왕자와 대신들과 한극함을 사로잡아 가등청정에게 바치고 항복하면 반드시 큰 상을 받을 것이오" ............ 국경인이 길을 인도하는 체하며 일부러 왕자를 연못에 빠지게 하자, 숨어 있던 동료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끈으로 묶었다. 사로잡은 왕자 일행을 말에 태우고 왜적에게 데려가 바치자, 예상대로 가등청정은 크게 기뻐하며 국경인에게 북도의 수령 벼슬을 주고......(53쪽)


내가 이 위기 앞에 있었다면, 나의 어떤 면이
역사 앞에서 남을 것인가....
느닷없이 이런 질문을 던져 놓고는 살 떨린다.^^

나처럼 무대공포증이 심한 사람이 임진록에 나오는 수많은 영웅들처럼 눈에 띄는 행동을 했을리는 만무하다. 하지만, 사람이 어떤 원칙을 지켰다는 보람이 있게는 살아야 할 것 아닌가. 논개처럼 말이다. 병마절도사 최경회의 후처였던 논개는 최경회가 전사하자 비장한 마음으로 자신을 기생이라고 속이고 연회에 참석하여 왜장과 함께 죽었다고 한다. 죽음 당시 스무살이었던 그녀가 가졌던 마음가짐을 생각해보면, 페미니스트들이 뭐라고 하건간에 우선은 숙연해진다. 

암튼, 전쟁이야기를 읽을 때,
화를 내고, 구토만 느낄 일이 아니라
위기 앞에서 선명하게 드러나는 각종 인간됨 앞에
나 자신을 비추어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
이번  독서의 소득이라면 소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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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 하 -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9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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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제는 눈이 많이 내렸다.
눈 때문인지 가볍게 러시아 작가의 책을 집어 들었들긴 했는데,
새벽까지 이 책을 읽고,
소설 안의 여러 상황을 그려보고 생각이 많아서 늦게까지 뒤척였다.


2. 먼저, 로쟈가 왜 살인을 하게 되었는가이다.
보통 사람의 눈으로는 쉽게 공감이 가지 않는다.
로쟈는 가난했고, 돈이 필요했다.
그러나 정작 훔친 돈은 쓰지도 않고, 얼마인지 세어보지도 않았다.
영민한 대학생 로쟈는 사람의 종류에 관한 특이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역사의 진행을 위해, 범죄적 행동마저도 용서되는 비범한 인물이 있고,
(나폴레옹처럼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도 역사의 영웅으로 남는 류의 사례 말이다)
도덕의 선을 넘을 수 없는 평범한 인물이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비범한 인물군에 속하는지 증명해 보고 싶었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이건 도대체 무슨 심리인가.

사람이란게 자기 증명 욕구가 이렇게 강하단 말인가?
이런 생각을 하는 때가 가끔 있기는 하다.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는 일이 사람을 한없이 안정감 있게도 들뜨게도 하는 일들을 볼 때,
자기는 그를 사랑하지도 못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받는 사랑을 거절하지 못하는 이들을 볼 때,  
자기 증명 욕구라는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의 사랑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주는 수단이 될 것이므로. )
인간이란 자기 증명을 통해서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자존감 같은 것을 구비해야
살아갈 수 있는 존재란 말인가.  
사람이 
다른 누구에게보다 자기 스스로에게 
내가 누구인지를 증명해야 하는
그 짐을 덜어버리기만 해도
얼마나 더 가볍고 자유롭게 살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기도 한다.
 



3. 로쟈는 살인 후에, 예상치 못한 고뇌에 시달린다. 
자신은 비범한 사람이므로
범죄가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없으리라고 예상했지만,
끊임없이 신경증에 시달린다.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정신을 놓았다고 증언할 정도로.....
심지어 읽는 나까지도 일종의 스트레스적 징후를 느끼면서
그의 심리 묘사를 읽어야 했다.
로쟈 자신은 자신에게 끊임없이 이 범죄가 범죄일 수 없음을 말하지만,
내면의 또 다른 자아는 두려워하고 슬퍼하고 떨고 자기혐오에 시달린다.   
로자의 비참함은 자기 스스로가 자기 기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그 지점이리라.

사람이 자기가 자기 행동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
샤르트르가 말한 '기투'같은 개념들은
인간의 무한한 자유를 말해 주는 듯 해서,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이 한껏 올라가고 기분이 퍽 고양되지만
인간이 그렇게 자유로운 존재는 아닌 것을 어찌할 것인가
내가 나 자신만 봐도, 내 욕망과 내가 받은 상처, 교육, 환경
이런 것들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은 것을....
그런 사람이 자기를 기준으로 삼는 것의 처참함을 작가는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소설 에필로그 부분에서 로쟈가 꾸는 꿈은 그런 점에서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병을 앓는 동안, 그는 이런 꿈을 꾸었다. 온 세상이 아시아의 깊숙한 곳에서부터 유럽을 향해 번져 가는 어느 무서운, 그리고 일찍이 들어 보지도 못한 질병의 희생이 되어야 할 운명에 놓여 있었다. 아주 적은 수의 몇몇 선택된 이만을 빼고는 누구나 멸망해야 했다. 일종의 새로운 미생물 섬모충이 나타나 그것이 인간의 몸에 기생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이 생물은 지력과 의지를 부여받은 정령이었다. 여기에 홀린 사람들은 삽시간에 정신이 착란되어 발광하는 것이었다. 그것에 감염된 사람일수록, 인간이 지금처럼 자기를 총명하여 불변의 진리를 파악했다고 생각한 적은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 인간이 일찍이 이토록이나 자기의 판단, 자기의 학문에 있어서의 결론, 자기의 도덕적인 신념 이나 신앙을 움직일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한 적은 없었다. 마을 전체가, 거리 전체가, 국민 전체가 거기에 감염되어 발광해 가고 있었다. 모두가 불안에 쫓기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누구나 자기 혼자만이 진리를 지킨다고 생각하였고 남을 보고는 괴로워하고, 자기 가슴을 치거나 울거나 손을 마주 비비거나 하고 있었다. 누구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몰랐으며, 무엇을 악으로 생각하고 무엇을 선으로 생각하느냐에 대해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누구를 죄있는 자로 규정짓고 누구를 죄없는 사람으로 할지조차도 알지 못했다. 사람들은 전혀 뜻도 없는 증오에 쫓기어 서로를 죽였다. 서로가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해 대군이 되어 모였으나, 이 군대는 행군 도중에 별안간 서로를 죽이기 시작하여 대열은 엉망이 되고 병사들은 서로 덤벼들어 찌르고 베고 물어뜯으며 실랑이를 벌였다. 온 거리에서는 하루 종일 경종이 울리어 모두 불려졌으나 누가 무엇 때문에 불렸는지는 아무도 몰랐으며, 그저 모두들 불안에 쫓기고 있었다. 모두 저마다의 생각이 며 선후책을 들춰냈으나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 매우 평범한 일상적인 일도 포기되었다. 농사도 짓지 않게 되었다. 사람들은 여기저기 몰려서서 무엇인가를 협의하며 다시는 분열하지 말자고 맹세하는 것이었으나, 곧 방금 자기들이 결정한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을 시작하여 서로 를 비난하고 아귀다툼이나 칼싸움이 벌어지는 것이었다. 화재가 일어나고 기근이 시작되었다. 사람이나 물건이 모두 멸망해 갔다. 질병은 점점 더해가고 퍼져 나갔다. 온 세상에서 이 재난을 모면할 수 있는 것은 새로운 종족과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여 대지를 일신하고 정화시킬 사명을 띤 몇몇의 선택된 결백한 이들뿐이었으나, 누구 하나 어디서도 이 사람들을 본 자는 없었으며, 그들의 말이나 목소리를 들은 자도 없었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이 무시무시한 환각의 기억이 언제까지나 슬프고 가슴아픈 여운을 남기며, 이 열병에서 온 악몽의 인상이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아 괴로웠다.



 

4. 「죄와 벌」은 소설의 중요한 사건 전개가 상당부분 우연에 의해 이루어진다.
로쟈의 살인도 사전에 철저한 계획에 의해 저질러지는 것 같지만,
살인의 부당성을 이성적으로 깨닫고 있던 로쟈가
 몇몇 사건이나 상황에 의해 아주 충동적으로 살인을 저지른다.
또, 살인 후에 로쟈는 가끔 자신의 죄를 참회하는 듯한 감정 변화를 보이는데,
이것도 충동적이고 우연적으로 느껴질 만큼 급작스럽다.
특히, 소설의 마지막 대목에서 소냐에 대한 사랑을 깨닫고
사람이 갑자기 변하는 것처럼 보이는 대목은
그 급작스러움 때문에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읽을 때는 너무 심오한 주제를 작가가 처리하기 힘들어서
이런 식으로 갈 수밖에 없었나보다 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이 또한 사람을 면밀하게 살핀 작가의 역량인 듯 싶다.
이 주제에 대해서도 밤새 한참을 생각해 본다.
인간이란 것이 그렇게 이성적이고 계획적이란 말인가.
아~~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내 스스로에게 솔직한 일이다.
사소하고 충동적인 일들이 사람들을 얼마나 움직여가는지 자주 절감하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로쟈가 출소 후에 어떤 삶을 살아갈지?
이 소설에서는 열린 결말 처리를 하고 있고 소냐로 인한 변화를 암시하고 있어서
긍정적인 결말을 예상할 수도 있지만,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로쟈는 출소 후에 그 냉소주의를 버릴 수 있을 것인가?
도스토예프스키는 행복한 결말을 예상하기나 했을까?
난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도스토예프스키 자신도 몇 번이나 도박을 끊으려고 다짐했지만,
그럴 수 없는 자신을 평생 겪지 않았던가.
사람이 영민하다는 것이 뭘까.
자신의 도박 중독 하나도 처리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란 말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내 앞에서 울면서 다시는 도박판에 가지 않겠노라고 다짐할 때는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 순간은 진심인 것이 맞다.
자타가 공인하는 세기의 천재 도스토예프스키의 영민함이
그 진심을 몇 달도 유지하지 못하는 상황을 평생 겪고도,
정녕 도스토예프스키는 로쟈의 변화를 믿었을까.

아~~~ 사람이 진정으로 변한다는 것은 뭘까. 변할 수는 있는 것일까....




5. 사족 - 로쟈 뿐만 아니라,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이 아주 풍부하게 그려지는 것이 이 소설의 큰 매력 중의 하나이다. 이 소설을 읽느라 겨울밤을 새고 오늘은 몹시 피곤하지만, 이런 류의 긁힘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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