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웰의 장미 - 위기의 시대에 기쁨으로 저항하는 법
리베카 솔닛 지음, 최애리 옮김 / 반비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웰의 장미> 한 줄 평을 하자면 '오웰이 바랐고, 솔닛이 쓴. 아름다운 글쓰기를 보여주는 책'이다.
조지 오웰의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에 대한 솔닛 만의 답이라 할 수 있겠다.

이에 나 역시 책을 곱씹으며 '어떤 글을 써야 하는가?, 내가 글을 쓰는 의미란 무엇인가?'를 자문하고 짧은 생각을 남긴다.

1/ "1936년 봄, 작가가 장미를 심었다."
장미를 심은 작가는 에릭 아서 블레어, 다르게는 '조지 오웰'이라 불린다.
오웰이라는 이름에서 연상되는 1984, 동물농장 등의 키워드는 장미와는 거리가 멀다. 도리어 죽음의 이미지를 가진 흰 국화라면 모를까. 빅브라더의 냉혹함은 장미와는 정반대에 있을 듯하다.
그러나 솔닛은 오웰과 장미를 잇는다. 그녀의 글은 오웰이 심은 장미를 마주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2/ 솔닛이 만들어낸 기묘한 조합은 300여 페이지에 걸쳐 변화하고, 또 변화한다.
<오웰의 장미>에서 장미는 쉴 새 없이 모습을 바꾼다. 솔닛은 오웰의 정원에서 발견한 장미를 일상 속 아름다움의 은유적 표현으로, 여성 운동의 구호로, 독재자의 억지로, 국제적 노동 착취의 표상으로 변주한다. 여성, 노동, 환경까지 수많은 키워드에 관심을 잃지 않는 그녀에겐 장미마저 다양하게 보이는 것일까.

숨 돌릴 틈 없이 계속되는 변화에 혹자는 에세이 단편집이라고 생각할 법하다. 나 역시 책을 읽어가며 낯선 장미의 이미지가 몰아쳐 와 당혹감을 느꼈다. 하지만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후에는 <오웰의 장미>가 하나의 마무리를 향해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3/ <오웰의 장미>는 솔닛의 오묘한 변주가 빚어낸 하나의 교향곡이다. 각 악장이 유사하면서도, 또 다르게 펼쳐지는 연주와 똑 닮아있다.
책은 일곱 장에 걸쳐 진행되는 데, 각 장이 앞뒤의 것과 오묘하게 연결된다. 가령, 2장 속 탄광의 노동자는 3장의 여성 노동 운동으로 이어진다. 노동자가 외친 심미적 아름다움이 우생학에 접목될 때 스탈린이 등장한다. 권력자의 정원을 둘러싼 인클로저 울타리가 더욱 높아져, 우리에게서 장미 공장을 숨겨버리는 흐름은 절묘하다.

여섯 장에 걸친 변주들은 마지막 장 속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닫는다. 그렇기에 <오웰의 장미> 속 솔닛이 가장 마음을 쏟은 장미의 모습 역시 7장에 담겨있다.

4/ 솔닛이 우리에게 가장 이야기하고 싶었던 장미에 담긴 의미는, 단연 '아름다움'이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정치적인 의도' 속에서야 발견된다.
흔히 아름다움이라 하면 심미적인 예술 혹은 유희를 떠올린다. 그러나 오웰이 외친 아름다움은 그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그는 정치적인 글쓰기가 예술이 되기를 바랐고, 또 그렇게 쓰고자 노력한 자다.

솔닛 역시 오웰을 언어의, 진실의 수호자로 바라본다. 그녀는 한나 아렌트와 오웰의 유사성을 찾아낸다. 전체주의는 사실과 허위의 구분이 없어질 때 생존하기에 오웰은 "그 구분을 찾아내어 기록"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결국 솔닛은 오웰의 연대기를 통해 "명징성, 엄밀성, 정확성, 정직성, 진실성"이 아름다움임을 역설하고자 한 것이다.

5/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써야 하는가? 다시 말해, 진실은 어떻게 지켜져야 하는가? 1900년대와 달리 오늘날의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것은 과잉이다.

영국 귀족은 울타리로, 빅브라더는 제도로, 국제 자본은 거리로 이를 지우려한다. 진실은 나와는 다른 일이라는 경계선이 그어지고, 그를 지칭하는 언어가 없어지고, 우리의 시야에서 멀어져 버릴 때 호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실과 우리가 떨어트려져 괴리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진실을 숨기는 방법에는 배제만 있지는 않다.

진실은 지나치게 우리와 가까울 때 지워지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진실을 가장 강력하게 지우는 법이 바로 지나친 가까움, 과잉이라 본다. 타이타닉의 로즈는 목걸이를 바닷 속에 던져버렸다. 하지만 나라면 수많은 보석 모조품을 만들겠다. 그래서 그 속에 푸른 다이아몬드를 던져넣겠다.

바닷 속의 목걸이는 그 자체로 고통스럽다. 누군가가 발견할 수 있다는 미약한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99%의 확신. 1%의 의심은 영원한 고통을 준다.
그러나 모조품 속에서 보석은 안전하다. 사람들이 모조품이 진실이라 믿는 순간, 아무도 목걸이를 찾고자 노력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되려 그 미약한 가능성조차 사라진다. 자신의 모조품에 눈이 팔린 수많은 사람 속에서 다이아몬드는 안전할 것이다.

6/ 그렇기에 우리는 난무하는 글과 이슈 속에 진짜 푸른 다이아몬드가, 진실이 묻히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오웰이 이야기한 '아름다운' 글쓰기가 필요하다. 메리 비어드의 말처럼 '모든 것은 정치적'이기에 펜을 드는 사람이라면 응당 이를 의식해야 하는 것이다.

솔닛과 오웰은 스스로의 펜 속에 깃든 정치성을 의식하는 자는 모름지기 '정치적인 의도 속에서 정확한' 글을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진실을 위해서는 이곳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매력적인 글쓰기가 필요하다.

주목해야 할 의미가 있는 진실에 눈을 맞추고, 그를 적확하게 기록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이 땅에 뿌리 내린 장미가 전해주는 교훈이자, 우리가 지향해야 할 쓰기다. 낱말의 숫자가 줄어드는 <1984> 속 신어와는 다르게, 오늘날의 사전은 계속해서 두꺼워지고 있다.

결국 수많은 글과 말 속에서 의미있는 진실이 유효하기 위해서는 매력적으로 쓰여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누구도 진실에 눈길을 주지 않을 것이다. 물론 정치적 글쓰기는 그 자체로 아름답다. 하지만 감별사의 눈에만 아름다운 보석은 큰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다이아몬드의 반짝임은 만인의 눈을 사로잡았기에 가장 귀한 보석이다. 장미 역시 그렇다. 우리가 수많은 꽃 중 장미와 아름다움을 연관 짓는 이유는 독보적으로 눈에 띄는 장미의 심미적 아름다움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또 한번의 전환이 필요하다. 솔닛이 빵에서 장미로, 다시금 빵으로 돌아오는 회귀하는 글쓰기를 했다면, 우리는 그 곳에서 한 발작 더 나아가 또 다시 장미로 향하는 것이다.


+)
오웰이 심어야 했던 꽃은 흰 국화가 아니었을까.
흔히 장례식장을 연상시키는 하얀 국화의 꽃말은 성실과 감사, 그리고 진실이다.
냉철하다 못해, 냉혹한 글을 썼던 오웰의 통상적인 이미지도, 그가 숭상했던 가치도 잘 보여주는 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