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디우의 일자는 라이프니츠의 단자monad를 방불케 한다. 이는파르메니데스 이후 존재론의 대 수술이라 할 수 있다. 바디우의 복합물은 라이프니츠의 단자 개념에 많이 접근하고 있는 것을 두 말 할필요가 없다. 철학은 결국 플라톤의 『파르메니데스』에 설치되어 있는 문의 돌쩌귀와 같이 아무리 그 주위를 맴돌아도 결말은 나지 않는다. 바디우의 존재론 역시 파르메니데스 성전 대문의 돌쩌귀를 맴돌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아직도 존재론은 일자의 문제와 씨름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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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문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분절이 존재한다. 분절력이문법을 이해하게 만들어 준다. 내가 편집공학에서 중시하고 있는 것이 이것이다. (따라서 나는 촘스키의 생성 문법론과 어딘가에서 헤어지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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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는 무기와 도구가 순수한가능성과 변이를 도주선으로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며 오늘날 지하 · 하늘. 해저의 기술자들이 형성되고 있다는점에 주목한다. 이들은 모두 정도 차가 있지만, 세계 질서에 속해 있으며 잠재적 지식과 행동을 비자발적으로 발명하고 축적해 가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것들이 정밀한 것들이지만 누구나 쉽게 획득할 수 있는 것으로서 누구든지 새로운 배치의창조를 위해 쉽게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들뢰즈는 이들 첨단기술과 무술을 새로운 유형의 직공이나 전사집단을 요컨대 새로운 전쟁기계-주체성을 결합시킬 가능성으로서 이용하자고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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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서의 고독 또는 잠잠함이 없으면, 침묵의 힘을 기를 수가없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어떤 혜택들을 구하는 요청으로 가득한 기도를 드리고, 만물의 하나님이자 그 혜택들의 배후에 계신 은인은 보지 못한다. 오직 한 명의 사마리아인만 문둥병이 낫는 것보다 더 큰것을 원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즉 그는 구세주를 알기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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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하면서 한번 현관 앞으로 가보자. 우리의 감각들이 매순간마다 만나게 되는 인상들은 거의 끝이 없을 정도의 충만함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우리는 무한한 감각의 인상들이 주는 풍부함으로 인해 익사할 지경이므로 다음과 같이 묻게 된다. 인식에이것 말고도 그 이상의 것이 도대체 존재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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