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교회는 성령이 성부로부터 성자를통해 나온다고 믿었다. 그러나 서방교회에서는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온다는 믿음이 자라나고 있었다(이러한 작은표현상의 차이는 사실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두 교회의 입장 차이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서방교회에서는 "그리고 아들" (라틴어 filioque)이라는말을 관례적으로 신조에 삽입하게 되었다. 로마 교회는 언제나 신중하고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했으나 11세기에 들어와결국 그리고 아들을 삽입했다. 그럼으로써 1054년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불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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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들이 현실에서 겪는 좌절은 지식과 정보의 부족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비유하자면 그것은조명의 문제이지 사물의 문제가 아니다. 지식과 정보량을 늘린다고 삶의 자세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지식의 축적이 곧바로 좋은 삶으로 연결되지 않음은 인문학자 자신의 삶이 보여준다. 게다가 장애인들과 함께 공부하다 보면 장애인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제도와 관행이 무엇보다 우리 시대의 인문 지식과 맞물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인문학자 자신이 그런 지식의 생산자라는 것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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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철학적 사유는 이런 인식론의 난제와 실재론자와 관념론자, 현상론자와 절대론자 간의 논쟁에 선점당해왔기 때문에, 많은 학생들은 본체계와 현상계를 구분하는 형이상학적 과제, 그리고 분리된 주관이 독립적인 대상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말하는 인식론적인 과제가 모두 제거될경우 철학에 무엇이 남게 될 것인지 몰라서 쩔쩔매게 된다. 그렇지만 이런전통적인 문제를 제거함으로써 칠학은 더 결실이 풍부하고 필요한 과제에몰두할 수 있게 되지는 않을까? 그것은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커다란 사회적, 도덕적 결함과 문제에 직면하도록, 그런 악의 원인과 정확한 본성을제거하는 데 그리고 더 나은 사회적 가능성에 대한 명확한 생각을 발전시키는 데 집중하도록 철학을 고무하지 않을까? 간단히 말해서 그것은 또다른 세계나 어떤 멀리 떨어진 실현 불가능한 목표에 대한 개념을 표현하는 대신 특정한 사회적 질병을 이해하고 교정할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을만한 관념이나 이상을 기획해내는 데 집중하도록 철학을 고무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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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의 한 장면입니다. 너무 작품에 몰입하다보니….
그럼 그 사진이 진짜입니까?
저는 메소드 연기 배웁니다.
***(비아냥) 메소드연기를 하기 위해키스를 했다는 말씀인가요?
연극 속에서 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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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사회는 도래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우라고 예기』 「예운 편에서 시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유가의 이리의 대답은 단연코 부정적이다. 그러한 사회는 현실적으로 실재한 것skutopia도 가까운 미래에 다가올 수도 없는 그야말로 그 어디에도 없는 유토= no where)이다. 진보와 해방의 꿈을 실현하고자 했던 계몽의 이념이 야누스적 두 얼굴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판명된 포스트모던시대에 사는 이 시대 우리들에게 그런 인간적인 사회는 인간의 현실사회를 규제하는 이념적 지표는 될 수 있을지언정 현실 인간 사회로다가오지 않는다. 아니 그런 사회가 있었다는 주의 주장과 그런 사회가도래할 것이라는 권고-설득은 논리 실증주의자들의 표현에 따라 현실의 우리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이른바 범주착오라고말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이는 실로 "구세주가 재림할 것이다"라는 말과 그 의미상 조금도 차이가 없을 것이다. "구세주가 재림할 것이다"라는 명은 만일 아버지가 살아 계셔서, 오늘 아침에 회사에 출근하셨다면, "오늘 저녁에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실 것이다"라는 명본질적으로 그 유를 달리하는 언명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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