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과 신학 그리고 과학은 생동하는 구체적인 현실을 추상적이고 핏기 없는 이념으로 환원시킴으로써 항상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살아 있는 세계에 대한 인간들의 불안을 제거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그러나 이러한 환원 작업을 통해서 인간은 현실성이 결여된 추상적인 이념의 세계에 살게 된다. 인간은 죽은 세계 속에서 살게 되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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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무책임하고 경솔해보일지 모르지만, 주변성이라는 조건은 남의일을 망치고 동료들을 불안하게 만들 것을 염려와 언제나 조심스럽게처신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물론 그 누구도애착과 같은 여러 감정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또한나는 여기에서 자신의 능력을 누군가에게 빌려주고 판매하는 이른바부유 지식인을 염두에 두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다음과같습니다. 지식인이 실제의 망명 상태와 같이 주변화된 자, 길들여지지않는 자가 되는 것은 권력자보다는 여행자에 가깝고, 관습적인 것보다는임시적이고 위험한 것에 가까우며, 현 상황에 주어진 권위보다는 혁신과실험에 가깝게 반응한다는 의미입니다. 망명자적인 지식인의 역할은관습의 논리에 따르지 않고 대담무쌍한 행위에 변화를 표상하는 일에멈추지 않고 전진해가는 일에 부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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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이성과 계시,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신앙 간의 분열은 갖추어질 수 없었다. 아리스토텔레교스 플라톤도 아니었고 성 바울로도 아니었다. 그는 자연적인 우주로 분리되어 있다는 관념 세계에 관한 이론을 거부했으며, 또한의 사고에는 경통독교인들에게 도움이 되게끔 (또는 최소한 해가예문 "정신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조차 어렵거나 또는 불가눈으로 판명될 만한 측면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만약 자연에서 원영과 결과의 규칙적인 관계가 자연의 불변하는 법칙이라면 신이 자유리를 만들어 낼 여지가 있겠는가? 만약 개별적인 영혼이 육체존 한다면 그 영혼이 육체의 죽음 이후에 어떻게 생존할 수 있겠특한 그리고 만약 물질적 존재에서 생명이 떠날 때 신체적 소멸이참가피하다면 동일한 육체가 어떻게 부활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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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을 통해서 인간과 동물이 구별된다고 한 사람은 마르크스가 아니라, 하이에크도 보수주의자로 인정하고 있는 흄이었다. 또한 낮고 비천한지위에 있던 노동을 인간활동의 최상위에 올려놓은 사람은 노동을 부의원천으로 간주한 로크였다. 즉 노동가치설은 바로 보수주의 이론의 기본 태도인 것이다. 사실상 로크나 마르크스의 이론들은 모두 노동 가치설에 근본 바탕을 두고 있다. 두 사람이 갈라지는 것은, 로크가 노동을 생산성의 원천으로만 보았고, 따라서 그것으로부터 최대한의 경제적 가치를 이끌어 내는 것을 합리적인 것으로 보았던 반면, 마르크스는 노동이생산성의 원천이자 인간성의 표현이라고까지 간주한 지점에서이다. 이들 두 입장 가운데 어디에 서야 더 과학적인지는 말할 수 없다. 이는 그야말로 입장의 차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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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을 깨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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