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 그렇다면 무엇을 배우고 싶은 마음은 순수한 제 욕망인가요?

산 - 그럴 리가 없지. 개인적 욕망은 없다고 했잖아. 너만 알고 싶은 게 아니야.
남들과 차이를 만들어 내는 무엇인가를 욕망하는 것이지.
차이를 향한 이 욕망이 인간의 감정을 움직이는 힘이야. 차이를 향한 저돌적감정 에너지가 욕망인 거지. 때문에 욕망은 사회 질서를 깨트리는나쁜 감정으로 이해될 때가 많아.
금욕이 도덕의 근본이고, 욕망을 줄이는 수련활동이 인간적인 것으로 이해되곤하잖아. 모범적인 인간은 욕망을 조절하고 인내할 수 있는 인간을 뜻하니까.
그런데 이렇게 욕망의 부정성만을 바라보는 관점은 감정을 오해한 거야.
감정이 양가적이듯 욕망 또한 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품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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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이야기와 대항하기 위해 더 큰 이야기가 발명되는 시대는 끝났다.
큰 이야기를 보충하고, 그 곳에 대안을 구성하려는 숭고한 희생이 사회를변화시키려는 유일한 실천도 더는 아니다. 어떤 시도도 세상을 바꿀 수없을 때, 절망이 마치 체질처럼 확고부동할 때, 하나의 이념이 모든생각을 대신할 수 없는 시대일 때가, 진정으로 우리 자신을 톺아보고새로운 삶의 양식을 실험하며, 이 세계를 촘촘히 살펴볼 비판적 삶이출현할 순간이다.
리오타르는 "신의 침묵에, 절망의 시대에, 사물들이 이루는 다수의통일성이 사라진 시대"에 철학이 시작된다 했는데, 이 철학의 시원이작금에 필요한 대안을 넘은 비판적 삶의 장이라고 나는 감히 말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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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오늘날에는 취향을 바꾸는 짜릿함도, 미래를 희망으로 보는자신감도 찾아보기 어렵다. 나빠지는 오늘이, 더 나빠질 내일 때문에삐걱거린다. 실업자가 넘쳐나고, 미래는 불안하다. 오늘이 오늘만으로 꽉들러붙었다. 살아 내지만,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는 작은 것들(미생)의사회다.
오늘이 오늘만으로 접착된 사람들에게 내일은 대체로 곤혹스럽다.
내일이 오늘보다 나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사람들은 할당된 피로를감당한다. 청춘은 대략 내일이 오늘보다 진전된 삶이라는 굳건한믿음으로, 오늘을 열정적으로 누리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오늘이내일에게 가하는 폭거는 만만한 무게가 아니기에 젊음은 좌절하며,
마땅히 누려야 하는 해방의 권리를 빼앗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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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는 우리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으나 이제 와서 시간을 되돌릴 수는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다른 사람이 한 짓을 잊지는 않았으나 상황이 달랐더라면 하는 부질없는 바람을 미래 지향적인 희망으로 바꿔더는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다. 용서는 뒤돌아보는 것이 아니라앞을 보는 것이다. 자동차의 앞 유리가 백미러보다 훨씬 더 큰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용서는 누군가에게 평생 원한을 품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는 문제다. 남은 생애 동안 누군가를 미워해야 한다면 정말로 다시는행복해지지 못한다. 그래서 용서가 그토록 중요하다. 우리는 용서할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상대를 내게 피해를 준 사람으로 바라보는 대신 내가 마음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으로 여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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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을 잃었다가 나중에 회복되었다. 이때도 관련되는 체다카가 존중되어야 한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을 고맙게여기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잃을 필요는 없다. 사실 체다카의진실한 본질은 우리가 잘살고 건강할 때 더욱 정확하게 체다카를 통하여 그 책임을 지는 것이다. 여러 상황에서 우리 자신을 시험하기 위하여 계속적으로 체다카를 수행하는 것을 학습과정의 한 부분으로 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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