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서 증여는 증여받는 사람이 요청하는 않는 개인적·집단적으로 이루어지는 자발적 행동이다. 서구에서는 자발적 증여에 더 큰가치를 부여한다. 그러나 그것이 보편적 현상은 아니다. 많은 사회에서 그리고 과거 서구 사회의 일부 집단에서 남성 구혼자는 소녀의가족에게 어떤 경우에는 소녀의 씨족 대표자에게 소녀의 손을 허락해 accorde la main‘ 달라고 공식적으로 청혼해야 한다.

증여하는 행위는 여자와 수증자 사이에 이중적인 관계를 만들어낸다. 연대 관계와 우위 관계가 그것인데, 전자는 증여자가 자신이 가진 것 혹은 자신의 지위를 수증자와 나누기 때문에 맺어지며,
후자는 증여받은 사람이 증여한 사람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인정했을 때 적어도 받은 것을 ‘답례하기 전까지는 증여자에게 빚을 진 것이 되어 일정 부분 그에게 종속되기 때문에 맺어진다.

증여는 직접적 폭력이나 물리적·물질적·사회적 종속을 피할수 있게 해주지만, 그것들의 또다른 이름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빛을갚지 못한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나 아이들을 노예로 팔 수밖에 없게되어 결국 증여한 사람의 점유물‘, 소유물이 되는 사회가 무수히 많다. 이로부터 증여를 통해 결합되고 그 속에 담기게 되는 두 가지 구성요소(나눔과 빚짐). 이 두 가지 움직임 중에서 부, 권력, 지식, 의례에 접근하려는 다양한 형식의 경쟁을 중심으로 증여가 조직될 때, 사회 생활에 보다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두번째(거리를 만들어내기)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제 자선은 세속적인 일이 되었다. 미디어에서 자선은 일종의게임이나 쇼로 보이기도 한다. 장시간의 텔레비전 모금 방송은 포틀래치와 몇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그것은 포틀래치와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보다, 다른 회사보다, 다른 도시보다 더 많이기부하라고 촉구하고 전체 액수가 전년도를 능가할 것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또한 가장 자비로운 개인, 회사, 도시의 이름을 알리는 관행도 포틀래치와 공통적이다.
개시

레비스트로스가 자신이 모스의 충실한 계승자라고 주장한 것이진심인지, 혹은 자신의 이론이 뒤르켐과 모스의 이론과 단절된다는사실을 감추고자 한 것인지 의문을 제기하고 싶지는 않다. 중요한 점은 분명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은 레비스트로스의 저작들이 새로운
‘구조주의‘가 선언되던 바로 그 시점에 쓰였다는 사실이다. 구조주의의 강점과 한계, 성공과 실패는 오늘날 더 잘 평가할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로 인해 사회생활은 언어, 부, 여성이 개인 및 집단 사이를 유통하는 끊임없는 교환 운동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 운동의 기원을 의식적인 사고 및 명시적으로 공언된 이성 너머에 존재하는 인간정신의 무의식적 부분에서 찾도록 이끌었다.

요컨대 폴리네시아인들의 관념이 설명력을 지닌다고 믿은 모스와 언어 출현의 대폭발 이론과 인간 사회의 상징적 기원을 믿은 레비스트로스 중에서 누가 더 미혹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러한통찰과 믿음이 나타나게 된 주관적이고 역사적인 맥락을 재구성해보는 것도 확실히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레비스트로스와 마찬가지로 자크 라캉Jacques Lacan과 이 시기 다른 사상가들에게서, 사회적 사실을 분석하는 데 있어 전반적인 시각변화, 즉 실재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에서 상징적인 것으로의 관점 변화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상상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양자는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지만) 중에서 상징적인 것이 지배적이며, 따라서 그것이 모든 분석의 출발점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원칙이 점차 확신을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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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처음부터 신경일 뿐이며, 육체가 아니다. 따라서 신은 어떤면에서는 인간의 영혼과 유사하다. 그러나 인간 육체 내의 신경이 제한된수로만 존재하는 것과는 달리 신의 신경은 무한하거나 영원하다. 신의신경은 인간의 신경과 같은 속성들을 지니고 있지만 그 잠재성에서는인간의 개념을 초월한다. 예를 들어 신의 신경은 창조된 세계의 어떤사물로든 모습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정말 불행해졌다. 또한 나 자신도 끔찍한 시간을보냈고, 쓰디쓴 고통을 체험했다고 말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육 년전부터 신의 신경이 끊임없이 내 몸에 쏟아져 들어옴으로써 그때까지모었던 모든 축복이 상실되었고, 그것들을 새로 쌓는 일도 잠정적으로는불가능해졌다. 축복이 말하자면 보류되어버려서, 그 이후로죽었거나 죽게 될 모든 사람들은 당분간 축복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내 몸에 들어오는 그것이 신의 의지에 반하고 그에게 불쾌한 감정을일으킨다는 것은, 전체 신경 덩어리에서 떨어져 나온 신경 부분들이계속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가 매일같이 하늘에서 들려오는 것을 보면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상실은 영원이 존재하는 한 다시 상쇄될 수있을 것이다. 물론 이전 상태를 완전히 회복하려면 수천 년이 걸릴 수도있겠지만,

이때부터 초감각적인 힘들과의 교류가 구체적으로 말해 플레히지히교수가 내 앞에 현존하지 않고서도 내 신경에 말을 거는 방식으로 나와대화를 나누는 신경 첨부의 첫번째 징후들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부터나는 플레히지히 교수가 내게 좋지 않은 일을 비밀리에 추진하고있다는 인상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인상은 내겐 다음과 같은 일화를통해 확증된 듯 보였다. 내가 한번 개인적으로 그를 방문해 정말 내가치유될 가능성이 있다고 믿느냐 진지하게 물었을 때, 그는 물론 희망적인약속을 하긴 했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보였는데 내 눈을 똑바로쳐다보지는 못했던 것이다.

인간의 신경에 이러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원래신의 광선만이 가진 능력이다. 신이 자고 있는 사람에게 꿈을 불어넣을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능력에서 기인한다. 그런데 내가 감지한 바에따르면, 처음에 그 영향력은 플레히지히 교수에게서 나왔다. 나는 이것이플레히지히 교수가 어떤 방식으로든 신의 광선을 임의로 사용하는법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고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나중에는플레히지히 교수의 신경 말고도 신의 광선들이 직접 내 신경과 교류관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런데 해가 지날수록 이것이 점점 세계질서에어긋나는 방식으로, 자기 신경을 스스로 사용할 수 있는 인간의 자연적권리를 침해하는 방식으로 일어났고, 점점 더 기괴하다고 말할 수밖에없는 형태를 띠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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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정점에 이른 경험에 집중하는 경향이 크기 때문에그 전에 천천히 진행되는 다른 경험에 신경을 쓰지 못할 때가 많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매일 별일 없이 지나가는 일상의 잔잔한 감정을일일이 기억하지 않는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보면, 격렬한 순간만을 기억하려고 하는 평소의 습관을 완전히 초월한 자아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물을 만나볼 수 있다. 이소설에서 잃어버린 시간은 중의적인 의미를 띤다. 우리가 잊고 있었던 과거의 시간을 의미함과 동시에 우리가 별 볼일 없다고 단정지은 것들. 하지만 알고 보면 삶의 본질적인 것들을 잃어버리고 만 상실의 시간을 뜻하는 것이다.

인간은 안심이 되는 환경이든 절망적인 환경이든 적응하는 놀라운 유연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시대와 장소에 상관없이 어느 인간집단이든 행복과 불행 지수의 비율이 비슷한 양상을 띤다.

행복을 느끼는 사람의 비율이 시대마다 비슷하지만 그 비용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가 있기 마련이다. 대표적인 예가 행복과 행복을 느끼는 연령대다. 둘 사이의 상관관계를 알면 당신은 깜짝 놀랄 수도 있다. 세상에 태어나 죽을 때까지 행복을 느끼는 정도는 U자 곡선을 그린다. 먼저, 유년층과 노년층이 중간층보다 행복을 데많이 느낀다.

결혼하기 전에 알아야 할 정보를 습득하는 데 드는 비용과 이혼절차에 필요한 비용을 내는 것은 진정한 만남, 짝을 찾기 위해 어쩔수 없이 지출해야 하는 비용이다. 남녀가 만나 관계를 맺고 결혼에이르기까지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 여러 번 발생한다. 이때 개인은 최상의 짝을 만나기 위해 경쟁한다. 행복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행복을 가로막는 이혼이 제로섬에 해당되는 게임과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배우자에게 버림을 받은 사람은 행복을얻기 위한 전쟁에서 진 패배자이기 때문이다. 즉 결혼과 행복은 승리자와 패배자가 확실하게 갈리는 게임이다. 이렇게 경쟁 사회에서살아남기 위해 경쟁을 참고 인내해야 하는 입장이 되면, 더 이상경쟁이 지니는 미덕이 미덕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호모 이코노미쿠스는 권력의 지렛대를 가지고 있는 왕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그는 자유롭게 선과 악을 선택하며 일에 전력을다하는 시간, 늦잠을 자는 시간을 스스로 결정한다. 과연 그럴까?
호모 이코노미쿠스도 엄연히 인간인지라 정해진 공증 문서처럼 감정이 불변한 상태로 고정된 것이 아니다. 그 또한 여러 유형의 인격을 가진 존재이며 서로 다른 특징들이 조화를 이룬다. 여러분이 사업상 매우 중요한 약속 때문에 길을 가다가 물에 빠져 익사하기 직전인 사람을 구하기 위해 물에 뛰어든다고 가정해보자. 이런 일이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상황이 눈앞에 펼쳐지면 어쩔 수 없이 감정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내가 만약 다이어트를 결심한다면 제과점 앞을 지나가지 않으려고 애쓸 것이다. 노년을 준비하기 위해 저축을 결심한다면 지출을줄이고자 현금화시킬 수 없는 금고에 상당한 돈을 넣었을 것이다.
현재 상태로 계속 가면 미래의 내 모습이 어떨지 그려진다. 그런 모습이 되지 않기 위해 지금 싸워야 한다. 내 안에 살고 있는 호모 이코노미쿠스가 열심히 노력 중이다. 호모 이코노미쿠스는 실효성을최대한 높이려고 애쓰지만 정작 누구를 위한 실효성인지는 잘 모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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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치료에서 중요한 요인들이 무엇인지는 프로이트의 저술《분석, 종결 가능한 그리고 종결 가능하지 않은》(Analysis, Termin-able and Interminable(1937c)]에서 가장 잘 다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프로이트가 썼던 저술들 중 가장 뛰어난 것 중의하나이며, 비록 이전에도 프로이트가 용기를 보이지 않았던 적은없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용기를 보인 논문들 중의 하나로 볼수 있다. 이 논문은 그가 사망하기 얼마 전에 쓰여진 것으로 분석치료의 효과에 관해 프로이트 자신이 마지막으로 정리한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먼저 이 논문의 주요 내용을 간단히요약해 보고 강연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이를 비평해 볼 것이며가능한 한 이와 관련하여 몇 가지 제안을 해 보고자 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치료의 예후는 본능의 힘과 갈등을 방어하기 위해 자아가 어떻게 변화하는가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자아가 제대로 변화되지 않고 본능을 구성하는 힘의 강도가 크면예후가 좋지 않다. 프로이트가 본능의 힘을 구성하는 요소를 치료의 예후를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보았다는 것은익히 잘 알려져 있다. 프로이트는 초기의 저술에서 마지막 저술에 이르기까지 모든 저작들을 통해 본능을 구성하는 요소들의중요성에 대해강조하였다. 

그러면 프로이트가 생각한 치료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조건은무엇인가?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인데, 프로이트의 저술에 따르면 정신적인 외상이 강하면 강할수록 치료할 기회는 더 많아진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에 관해 더 이상 충분히 언급하지 않았고, 나 역시 이것이 왜 그런지, 프로이트가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의문이다.

내가 프로이트의 이론에 대해 수정하고자 하는 부분이 바로이 점이다 ; 중요한 문제는 욕구 대 자아의 투쟁이 아니라 한 유형의욕구와 또 다른 유형의 욕구 사이의 투쟁이다.

현대인의 문제는 이러한 병리적인 정상성‘에 어떻게 적응하느냐 하는 것이다. 치료는 이런 경우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현대인은 실로 ‘핵심적‘인 갈등으로 고통받고 있다. 말하자면 성격의 핵심적인 부분에서의 심한 혼란으로 고통받는다 ; 극단적인 형태의 자기도취를 보이고 인생에 대한 사랑이 결핍되어 있다. 이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 사람의 전 인격을 변화시켜야만 한다. 게다가 전제로서의 사회는 현대인의 신경증을옹호하는 면이 있기 때문에 전체 사회를 대상으로 대항해야 할필요도 있다. 여기에서 이론적으로 현대인은 어떤 의미에서는아픈 사람인데 또 다른 의미에서는 아프지 않은 사람이라는 역설을 보게 된다. 정신분석이 이러한 경우에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결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나는 실로 이것이 힘들고 까다로운 문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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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현대의 기술과학을 이해해 보겠다는 마음으로 다니다 나는 다른 문제에 부딪쳐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놀라운 기술과학이 던져 주는 약속을 어떻게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떤 기술은 정말 놀라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아무 의미가 없어 보였다. 어떤 통신은 너무 일방적이고 중요한 것을너무 많이 빠뜨렸다. 그래서 나는 우리의 어느 ‘비동시대적 세계‘에 주저앉아현대의 우리 통신매체가 묵살하는 소식을 구식 수단을 이용해 띄우기로 했다.
나의 구식 통신에 귀기울여 달라. 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하고 있다. 그들은 너무 오래 ‘위험한 처지에 놓여 있다.

일반 시민보다 산업 현장을 조금 더 다녀 본 입장을 살려 말하면, 크든 작든공장은 모두 우리가 필요로 하는 제품을 생산한다는 것, 그리고 최신식 설비를갖추었든 재래식 기술에 매달리든, 공장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이래 몇백 년이흘러갔지만 여전히 인간과 톱니바퀴에 의존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모두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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