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넘어오면서 여권은 더욱 신장되어 황제라 할지라도 축이 불가능한 정도가 되었다. 여성 또한 결혼과 이혼을 결정할수 있었고 자유로운 연애는 물론 불륜 또한 드문 일이 아니었으며 심지어 황제와 결혼하기 위해 로비를 했던 경우도 있었다. 로마를 포함해 고대의 어느곳이든 남성 우위의 사회구조였음을 부정할 순 없으나 로마의 여권은 현대 이전 어느 시대, 어떤 지역과도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라 할 수 있다

현재 연구로 티베리우스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우수했다는 쪽이다. 티베리우스는 재정을 안정시키고 금융 위기를 극복했으며 게르마니아 공략을 접고 국경을 안정시켰다. 다만 당대에 평가가 안 좋았던 주된 요인은 사치와 향락을 억제하기 위해 검투 경기와 같이 인기에 영합하는 정책을 포기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게다가 치세 말년에 카프리섬의 빌라 요비스villa20년에 은거하면서 세운 대리인이 크게 실정을 하였는데 이것이 그의인기를 크게 갉아먹었던 것이다.

아우구스투스가 처음부터 티베리우스가 자신의 뒤를 잇기를 바란 것은아니었다. 티베리우스를 보면 생각나는 말이 있다. ‘되는 사람은 된다.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 지명 과정은 가히 일일 드라마를 보는 듯한데 처음그가 염두에 두었던 사람은 마르켈루스Marcellus라는 청년이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조카이며 딸 율리아의 첫 남편이다. 사실 마르켈루스가 누구든 간에 아우구스투스가 사위로 삼았으니 그가 황제의 양자가 되어 차기 황제가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하지만 그는 요절한다. 

하지만 그는 요절한다. 탄탄대로가 눈앞에 깔린 상황에서 세상을 등졌을 때 그의 나이는 약관된 율리아는 이팔청춘靑春이었다. 다시 생각나는 말, 안 되는 사람은 안 된다

그때까지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피가 섞이지 않은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를 과하게 돕던 하늘이 이 문제에 대해서만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후계를 염두에 두고 통치 수업을 받던 두 외손자 가이우스 카이사르Gaius Caesar와 루키우스 카이사르 Lucius Caesar가 차례로 요절한 것이다. 참 망연하지 않았을까 생각되는데, 아우구스투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주시한 인물이 바로아그리파 포스트무스Agrippa Postumus와 티베리우스, 마지막 남은 후보군이었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누나인 율리아의 손자이다. 피가 한 방울 정도는 섞인 인물이었다. 그야말로 티베리우스는 징검다리로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이것마저도 아우구스투스의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그 게르마니쿠스마저요절하였으니 말이다. 이쯤 되면 아우구스투스가 찍으면 죽는다고 해야 할지경이다. 황제의 데스노트. 그래서 포스트무스가 그렇게 행동한 것이었을까

모든 드라마가 끝나고 아우구스투스에 이어 최종적으로 황제가 된 사람은 티베리우스, 아우구스투스가 그토록 원했던 혈통 내 계승은 이루어지지않았고, 가장 후순위 후보가 등극한 것이다. 역시 제왕은 하늘이 점지하는것일까. 티베리우스에게 제위는 넘어갔고 아우구스투스는 사망했다. AD14년이었다. 왕망에 의해 전한이 무너지고 6년 후있다. 마지막 희망이었던게르마니쿠스마저 아우구스투스가 죽고 5년 후인 AD 19년에 세상을 떠난다. 먼저 죽으라던 티베리우스는 멀쩡하게 살아 있을 때였다. 게르마니쿠스의 나이는 34세 아우구스투스가 관두껑을 열고 일어날 일이었다.

아우구스투스의 로마는 안정을 찾은 사회였다. 내전을 종식시킨 후 추진한 정치 개혁으로 중앙과 지방의 행정체제가 효율적으로 변화하였다. 법령이 개정되고, 관료제가 자리를 잡았으며 원로원, 민회 등 공화정 시대의 제도 개선도 이루어졌다. 군사제도를 개혁하여 병력을 감축하였고 직업군인제도를 정착시켰으며 해군을 창설하여 지중해의 치안을 바로 잡았다. 각종빈민구제 정책을 펼쳤으며 종교 개혁도 뒤따랐다. 

당시의 종교란 로마 전통의 다신교를 말하는 것으로 신전과 각종 종교의식 등을 말한다. 여기에오랜 내전으로 파탄 난 재정을 재건하였고 각종 경제부양 정책을 시행했다. 제국으로 막 태어난 로마는 초대 황제의 노력으로 강대국의 기틀을 만들어갔다.

아우구스투스는 참으로 부지런하게 일을 하였다. 이집트를 사유재산의로 갖고 있었건만 그는 검소한 생활과 격의 없는 태도로 로마 시민의 깊은사랑을 받았다. 그가 시행한 모든 정책이 성공하였던 것은 아니었으나 로마의 내실을 다지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물론 제정이 공화정을 대신하게된 것이 궁극적으로 로마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명확하게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거대해진 로마를 다스리기에 공화정은 분명한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가정이 있을 수 없는 역사에서 로마의 제정화는 많은 가정을 던져주는 화두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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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전해져 오는 역사서에는 당시 사회를 이끌었던 인물들이 주로등장한다. 역사는 결국 굵직한 사건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과 그 주위에 있는 이들의 행적이다. 따라서 시대별로 소수의 주요한 인물에 대한 지식이있다면 역사는 매우 쉽게 다가온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말할 때 항상 함께 거론되는 인물이 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는 전혀 다른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다. 그의 직업은 왕으로바로 정복왕 알렉산드로스(BC 356년)이다.(영어로는 알렉산더Alexander.) 알렉산드로스는 나라를 다스리는 일보다 나라의 크기를 넓히는 데에 관심이 많은 왕이었다. 

세계사의 큰 줄기에서 인도를 알기는 쉽지 않은데 그런 인도를 알기 위해서 반드시 알아야 할 인물이 바로 아소카 왕(BC 268년)이다.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전성기를 이끈 인도 전역을 통일한 최초의 왕이다. 아소카 왕은잔인한 전쟁광이었다가 불교에 귀의하면서 정 많은 남자로 바뀌었다. 친절한 남자로 바뀐 아소카 왕 덕분에 불교는 인도 전역으로 전파되어 부흥하였다. 그러나 그는 40세도 못 넘기고 죽는다. 사람이 갑자기 바뀌면 죽는다는 속설을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증명하여 준 인물이 아닌가 한다.

카르타고의 천재 전략가이면서 천재 정치가로서 포에니 전쟁에서 종횡무진 활약했던 카르타고의 영웅이다. 혼자서 천하의 로마를 거의 잡을 뻔했던 그는 2차 포에니 전쟁을 자신의 이름을 딴 한니발 전쟁으로 불리게할 정도로 전쟁 내내 원맨쇼를 했다. 하지만 그의 조국 카르타고는 자신을받쳐줄 만한 역량이 되지 못했다. 전후 정치인으로서도 발군의 능력을 발휘하여 카르타고를 단기간에 부강하게 만들었으나 그를 두려워하는 로마의 공작으로 여러 나라를 전전하며 망명생활을 하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현재 장기판의 빨간 궁은 한의 유방을 상징한다. 이는 운이 좋으면 황제도 될 수 있음을 시사하며 출세에 있어 한계가 없음을 보여주는 서민들의희망이라고 하겠다.

 시오노나나미 작가는 자신이 쓴 《로마인 이야기》에서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남자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바 있다. 제왕절개 수술로 태어났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이야기이다.

카이사르는 정적들을 물리치고 천신만고 끝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손에쥔 어느 날, 양아들이 주동한 패거리들의 칼에 여러 차례 찔려 죽는다. 

희lAD 1C의 역사가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의하면카이사르는 브루투스를 보고 말없이 얼굴을 감쌌다고 하였고, 비슷한 시기수에토니우스는 ‘아이야 너마저‘라고 했다는 어떤 이의 말을 전하고 있다.
근거 부족이다. 확실한 것은 이 말이 대중에게 널리 퍼진 것이 셰익스피어의 공이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바빌로니아는 두 개가 존재하는데 앞선 바빌로니아로부터1000년 정도 뒤에 나타나는 바빌로니아는 신바빌로니아라는 이름으로구분한다. 바빌로니아는 최초의 문명도, 최초의 통일국가도 아니었지만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바빌로니아로 인해 대단히 묵직한 존재감의 국가를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바빌로니아는 존재 기간이 아카드와 마찬가지로 그리 길지 않다. 그럼에도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있어서 중요한 이유는 바로 함무라비Hammurabi라는 걸출한 왕이 있었기 때문이다. 법전이 너무 유명해진 탓에, 게다가 그법전에 자신의 이름이 붙어버린 탓에 다른 업적이 모조리 묻혀버린왕이바로 함무라비이다.

함무라비에게 있어 법은 여러 성과 중의 하나일 뿐이다. 사실 치열한 정복사업을 하면서도 법체계를 정비했다는 것은 체제확립의 큰 구상을 완성할 역량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통일한 함무라비는 운하를 건설하고 역법과 종교질서를 정비했다. 그리고 관료제와 법체계를 확립하여 내치를 다졌다. 

인류 역사에 있어서 제대로 된 군주가 해야 할 국가통치의 본을 함무라비가 처음으로 보여준 것이다. 여담이지만 20C 중반에 있었던 발굴로 인해 최초의 성문법이라는 자리는 함무라비 법전이 아닌우르 왕조 남무Nammu 왕의 법전Code of Ur-Nammu으로 바뀔지도 모른다.

역사는 항상 새로운 발견이 나타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수시로 ‘사실‘
이라고 하는 것이 바뀐다. 수시로 바뀌는 것을 ‘사실‘이라고 하기는 뭣하지만 사실 그러하다.

모범생 바빌로니아의 뒤를 이은 것은 철기로 유명한 히타이트이다. 히타이트는 그야말로 군사강국이었는데 그들은 철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줄아는 역사상 최초의 민족이었다. 철기유물은 히타이트가 역사에 등장하는시기인 BC 20C경부터 발굴되고 있다. 그런 히타이트는 부침을 거듭하다BC 15C경 제국 규모로 성장하면서 전성기를 맞게 된다. 히타이트의 철기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도 이와 맞물리는데 통상적으로 세계사에서는 이때를 철기시대의 시작으로 본다

현대에서도 대제국 히타이트의 멸망 원인은 아직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다만 여러 가지 학설이 있는 가운데 정체가 불분명한 해양세력에 의해 타격을 입은 것으로 보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이 해양세력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체로 당시 문명이 막 일어나기 시작한 그리스인들로 보는견해가 강하다.

그리스가 세계 역사의 전면에 나타나기 전이었던 시기에 그리스인들은이렇게 자신의 등장을 은근히 예고하고 있었다. 그 후 그리스인은 세계사에 등장하고 나서도 계속 바다를 활동무대로 삼았다. 그런 바탕 위에 그리스 문명이 꽃피기 시작하면서 아테네를 비롯한 많은 폴리스들은 해양강국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세월이 많이 흐른 다음의 이야기이다.

간단하게 말했지만 학문을 현실에 적용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규모가 일정 수준을 넘어설 때는 더욱 어려워지는데 과학의발달을 공학의 발달로 연결시켜 현실화하는 것을 이집트인들은 해낸 것이다. 광활한 나일강 유역에 대한 측량과 거대한 피라미드의 축조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문명의 발전에 있어서 문자는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지구 문명의 선두주했던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도 이른 시기에 문자가 사용되었다. 이집트의 상형문자로 알려진 히에로글리프Hierogrlyph는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Cuneiform, 文와 더불어 세계 최초의 문자로 알려져 있다.

카데시 전투는 시기가 BC 1308 년에서부터 BC 1274년까지 그 설이 다양하다. 참고로 브리태니커 Encyclopaedia Britannica에는 BC 1299년으로 되어 있다. 이는 이 전투를 위한 준비와 이동, 전투가 끝날 때까지의 모든 과정을 볼 수 있는 이집트의 기록에서 실제 전투로 추정되는 시점을 역사가들이 달리 본 데서 비롯된 것이다. 어찌되었건 카데시 전투는 기록상으로알 수 있는 문명 간에 발생한 최초의 전쟁으로 이집트의 파라오 람세스 2세와 히타이트의 왕 무탈리스 2세가 카데시라는 지역을 놓고 싸운 전투이다.

람세스 2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체면은 제대로 구겨졌지만 어찌되었건 살아서 돌아왔으니 SNS도 없는 세상에서 얻어터진 것을 이실직고해 백성의 사기를 떨어뜨릴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더불어 파라오의 체면도 있었을 테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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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평범한 연습이 아니다. 미묘하지만 분명히 다르다. 정확히목적에 맞는 노력을 기울이면서 실수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과정이다.
뭔가 발전하면서 쌓이고 있다. 곡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클라리사 안에 숨어 있던 새로운 자질도 드러난다.

이 책은 단순한 아이디어에서 출발한다. 클라리사의 연습실과 재능의 용광로에서는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들은 정확히 목적에 맞는 특정 패턴의 연습을 반복할수록 실력이 향상되는, 신경계의 독특한메커니즘을 활용한다. 그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성장 속도가 급격히 빨라지는 구간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것을 병에 담을 도리는 없지만 요령을 터득하면 그 구간에 접근할 수는 있다. 말하자면, 탤런트코드를 해독할 수 있다.

미엘린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중요하다. 일단 그것은 보편적이다.
즉, 모든 사람이 미엘린층을 두껍게 만들 수 있다. 대개 성장기에 가장빨리 두꺼워지지만 이 과정이 평생 지속될 수 있다. 그리고 미엘린은무차별적이다. 미엘린층이 두꺼워지면 정신적이든 신체적이든 모든활동과 관련하여 스킬이 향상된다.

모든 스킬이 똑같은 세포 메커니즘에 의해 향상된다는 생각은 놀라울 뿐 아니라 좀 이상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스킬의 종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구상의 모든 다양성은 공통된적응 메커니즘을 바탕으로 한다. 다른 방식으로 진화가 진행되었을 거라고 보기는 어렵다.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각각 심층 연습, 점화, 마스터코칭을 다루고 있다. 이는 탤런트 코드의 기본적인 세 가지 구성 요소에 해당한다. 탤런트 코드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이 세 가지 요소가합쳐진 것이다. 하나라도 모자라면 발전 과정은 느려진다. 세 가지가모두 결합되면, 고작 6 분 동안이라 해도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스위트스팟을 찾아라

사람은 실수를 통해 지혜로워진다.

효과적으로 연습하는 사람을 보면 대개 의지력이나 집중력 같은 단어를 동원해 원인을 규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런 단어들은 얼음 위를오르는 데 해당하는 연습의 특수한 측면을 포착하지 못하기 때문에 별로 적절하지 않다. 재능의 용광로에 있는 사람들은 표면적으로 이상하고 놀라워 보이는 활동을 하고 있었다. 

심층 연습은 역설을 바탕으로 한다.

바보 같아 보일 만큼 수없이 실수를 허용할수록, 즉 정확히 목적에 맞는 노력을 기울이면서 끈질기게물고 늘어질수록 더 많이 향상된다. 

심층 연습을 할 때는 이 세상의 일반적인 규칙들이 잠시 통하지 않는다. 훨씬 효율적으로 시간이 사용된다. 작은 노력이 모여 오래 지속되는 커다란 결과를 만들어낸다. 

우리는 실수를 포착해서 그것을 실력으로 바꿀 수 있는 지렛대 위에 서 있는 셈이다. 현재 능력보다 살짝 위에 있는 목표를 선택하고, 정확히 목적에 맞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요령이다. 무턱대고 하는 헛수고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심층 연습은 두 가지 이유에서 이상한 개념이다. 첫 번째는 재능에대한 직관적인 생각과 대립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직관적으로 연습과 재능의 관계는 숫돌과 칼의 관계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즉,
연습이 매우 중요하긴 하지만, 이른바 선천적 능력이라는 튼튼한 날이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심층 연습은 매력적인 가능성을 제기한다. 어쩌면 연습이 선천적 능력보다 훨씬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심층 연습이 이상한 개념인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보통 피하려고하는 사건인 실수를 포착해서 그것을 실력으로 바꾸기 때문이다. 

심층연습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이해하려면 먼저 학습 과정에서 실수가얼마나 중요한지부터 알아야 한다. 생뚱맞게 들릴지 모르지만, 실수는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아인슈타인처럼 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는말이 아니다(그의 뇌를 부검한 결과, 비정상적일 정도로 많은 미엘린이 발견되었다. 중요한 것은, 재능이 운명인 듯 보일지라도, 사실 어떤 스킬을 습득하고 향상시킬지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은 상당 부분 우리에게 있다는점이다. 우리 각자의 잠재력은 생각보다 크다. 미엘린 박사가 즐겨현하듯이, 우리는 모두 자기만의 인터넷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기회를갖고 태어났다.

결과적으로 누구나 필요할 때 원하는 스킬을 습득할 수 있는 선천적인 잠재력을 갖고 태어나므로, 이런 시스템은 유연성과 반응성이 뛰어나며 경제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그 기회를 어떻게 써먹느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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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결코 완성되거나 끝난 순환이 아닌 순환적 리듬 안에서 진행된다. 새로운 운동이 시작하여 그것 자체가 소멸하면, 다시 새로운 상태의 무엇인가가 나타난다. 

그 순환은 그것 자체로 완성되었다. 서구인들은 그들이 60년 전에말했던 것처럼 자본주의는 소기의 성과를 얻었고, 막시즘은 그렇지 못한 것이 증명되었다고 다시 한번 말한다. 맑시즘에 대한 믿음의 쇠퇴와 함께, 서구에 살면서 맑시스트로 살지 않는 소수 지적인 그룹과는별도로 반대 진영에 의해 근원적 맑시즘의 비젼은 가끔 부가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우리가 자주 듣게 되는, 맑스가 비난한 경쟁적 경제로 되돌아가는 것은 인류를 위한 새로운 생활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것은아마 맑스 자신이 스스로 약속한 궁극적 지점일 수도 있다. 즉 착취와계급갈등이 끝나는 곳이다. 희망은 영원히 샘솟는다. 불행하게도 그것은 항상 성숙되기도 전에 샘솟는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지난 반세기에 단지 자유방임 정책의 무정부주의적 양상을 더욱 단념하고 사회주의자들 속에서 개혁을 확산하고 복지국가를 지향함으로써 살아 남았다. 국유화와 개인화의 사이를 오가는것, 미국의 루즈벨트 개혁의 영원한 영향, 그리고 서유럽에서의 병행된혁명 때문에 유행에 뒤진 상투적인 표현 속에 어떤 확신을 갖게 하는것은 불가능하다.

자유만은 상당히 추상적인 목적이다. 하이네가 말했듯이 ‘자유는 감옥의 노래‘이다. 즉 자유를 빼앗긴 자들이 자유를 소중하게 여긴다. 역사가 그것을 말해준다. 천국에서의 아담의 6시간 이후, 사람들은 자유를 던져버리는 것 외에는 자유를 가지고 무엇을 해야할지 전혀 몰랐다.

이러한 점에도 불구하고 자유에 대한 충동의 개념 속에는 참된 진실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더욱 넓고, 실질적인 상황 속에 놓여져야 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관심을 가지는 존재이다. 그것은 내가 생각하기로 2가지 종류의 관심이 있다. 일차적 관심과 이차적 관심이다. 일차적 관심는 음식, 성, 재산, 이동의 자유 등이다. 이는 육체적 차원에서 동물들과 공유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차적 관심은 우리의 정치적, 종교적 그리고다른 이념적인 것들에 대한 충성을 포함한다. 

우리는 사랑하며 살기를원하지만, 전쟁을 한다. 자유를 원하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들, 자연 환경, 우리 자신까지를 착취하며 산다. 20세기에는 오염으로 공기와 물의공급이 위협당하고 있다. 이는 분명히 이념적 관심에 대한 존엄성을더 이상 제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먹고, 사랑하고, 소유하고 자유롭게이동하는 일들이 먼저 요구되고, 평화, 선의, 보살핌, 자연에 대한 책임등이 충족되어야 한다. 이념적인 갈등의 지속, 무모한 환경의 착취, 모택동과 같이 힘은 많은 총으로부터 나온다는 고집스런 믿음 등은 인류가 열망하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의 직접적인 관심은 아직 육체적인 것이다. 즉 경찰에게 통행증이나 허가증을 요구 받거나 신분증에 대한 검증없이 마음대로 이동할수 있는 것과 성이나 인종 차별로 직업이나 공적 자리에서 제외되지않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자산이란 의복과 주택과 같은 개인의 생활에 적당한 외형적 형식을 의미한다. 이는 역시 우리가 말하는영토적 공간을 포함한다. 숲 속에서 명상하는 힌두교 은둔자는 의복이나 주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소유도 필요없다. 

예수가 마귀에 의해 돌을 빵으로 바꿈으로써 불모한 경제를 개선하라는 사탄의 시험을 받았을 때, 예언자들이 한 것처럼 사람은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예언으로 산다는 신명기를 인용함으로써 응수했다.
이는 의식적 인간에게는 영적일 뿐만 아니라, 육체적 영역도 일차적관심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나는 그 차이를 두 형태의 사회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원시적 사회고 다른 하나는 성숙된 사회이다. 원시적 혹은 미발달된 사회에서 개인은 우선적으로 사회적 집단의 기능으로 생각되어진다. 이러한 모든 사회들은 계층적 권위구조가 개인을 선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해야한다. 성숙된 사회는 이 반대로 그 구성원들 속에서 순수한 개인성이 개발될 수 있게 하는데 우선적인 목적이 있다. 완전히성숙된 사회의 권위구조는 성 · 계급 · 인종·생활 ·사랑·사고 그리고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공간의식에서 나오는 것들에 대한 구별 없이 그것 자체 안에서 개인적 기능을 하게 한다. 

 역사를 통해서 볼 때, 실질적으로 모든 사회는 현재적 의미에서 한 때 원시적 사회였다. 좀더 성숙하고 개인을 위한 진정한 관심이 가끔 엿보이나 정상적으로는 사회가 붕괴되면서 원시 사회 형태로 다시 되돌아간다.

이 이유는 우리가 무엇이기 전에 어떠한 것에 소속되었기 때문이며,
원시적 사회 구조가 인간타성의 모든 광대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수동적인 사회적 조건이 거기에 작동하기 때문이다. 

일차적 관심의 영적 형태는 육체적 필요를 채운다. 그러나 그것은개인화된 사회의 문맥 속에서 통합된다. 이념이나 이차적 관심은 이론적으로 동일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의 사회의 필요에 대한 개인의 종속화는 지속적으로 좌절되고, 연기되며 그리고 일차적 관심의 실행을우회한다. 그러한 구분을 의식하지 않는 곳에 가끔 논쟁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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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는 하나의 아이콘이며, 그럴 만한 사람이다. 모든 일에서 이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보다 더 잘 보여주는 역사적 인물은거의 없다. 

그는 한 세기에 걸친 혁명을 종식시켰고 로마공화정을 무너뜨렸으며, 공화정을 자신이 초대 황제가 된 제국으로 대체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수수께끼 같은 사람이기도 하다. 네 살에 아버지를 여읜 그는열아홉 살에 로마 최고의 정치 행위자 중의 한 명이 되었다. 그는 어떻게그런 일을, 그리고 이보다 더 많은 일을 해냈을까?

그는 어떻게 역사상 가장 화려한 매력이 넘치는 한 쌍인 안토니우스와클레오파트라의 반대를 극복했을까? 

 어떻게 유약한 소년은 성공적인 군벌이 되고, 그 다음 어떻게 역사상 가장 유명한 평화의 증진자 중의 한명으로 변신했을까? 

어떻게 그는 완벽한 2인자, 즉 우두머리의 권력을위협하지 않으면서도 그의 장군이자 행정가로서 복무하는 파트너를 찾아냈을까? 

어떻게 한 세기동안 이어지는 왕조와 그보다 더 긴 세기 동안에 지속된 제국을 창건했을까?

긴 인생의 말년에 아우구스투스는 이런 몇몇 질문들에 대답했다. 로마에 있는 그의 영묘 앞에 세워진 청동 원기둥에 그는 다음의 문장을 포함하는 상세한 내용의 비문을 새기게 했다. 

"국사를 관장할 절대적 권한을 만장일치로 부여받아 내전의 불꽃을 꺼뜨렸을 때, 나는 공화정을 나의 수중에서 원로원과 로마 민중의 뜻에 다시 맡겼다. 이런 봉사 덕분에 나는 원로원의 칙령으로 아우구스투스(존엄자라는 뜻)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것이 공식적인 설명이었다. 진짜 내막은 무엇일까?

옥타비아누스가 자라는 동안 카이사르는 로마에 혁명을 일으키고 있었고, 로마는 자부심이 강한 자치 공화정으로 진화한 상태였다. 로마 민중과엘리트 계층은 민회와 법정, 선출 공직자, 원로원 같은 제도들을 통해서권력을 공유했다. 이론상으로는 그러했다. 

 그러나 실제로 공화정은 카이사르 같은 정복자 장군과 그를 따르는 수만 명의 충성스러운 병사들 앞에서 버틸 수가 없었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갈리아에서 이탈리아로 진군했을 때, 그는 이미 50년에 걸쳐 간헐적인 내란을 겪어온 나라에 내전을촉발시켰다. 이 내전은 다시금 두 세대를 거슬러올라가는 위기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로마 시와 그 제국을 길들일 수 있는 누군가만이 평화와 질서, 안정을가져올 수 있었다. 카이사르는 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정복자이지 건설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할 수 없다면 과연 누가 해낼 수 있을까?

야망에 불타오르는 옥타비아누스는 타고난 정치인이었다. 영리하고,
매력적이며, 의사소통에 뛰어났으며 잘생겼다. 의지도 굳건했다. 그리고그에게는 아티아가 있었으니, 그녀는 분명히 기회가 날 때마다 카이사르에게 자기 아들에 대한 칭찬을 실컷 늘어놓았을 것이다. 

쉽게 속는 어수룩한 자들이나 이런 이야기를믿겠지만, 카이사르는 대중이 쉽게 속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따라서이런 뜬소문에 깊은 인상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옥타비아누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골랐을 때에 카이사르는 위대함의 씨앗을 보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선택이 밖으로 알려지자,
일부 사람들은 열일곱 살짜리가 부정한 술수도 없이 세계 최고의 권력자로 하여금 자신을 후계자로 지목하도록 설득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어했다.

 여기서 부정한 술수란 섹스였다. 옥타비아누스의 라이벌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나중에 그 소년이 히스파니아에 있을 당시 카이사르와 관계를맺었다고 손가락질했다. 한편으로 이런 이야기는 로마 정치가들이 자신들의 정적에게 수시로 꺼내는 중상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옥타비아누스는야심만만한 만큼 잘생기기도 했고, 풍문에 따르면 카이사르도 본인이 십대였을 때에 어느 막강한 연장자와 잠자리를 가졌다고 한다." 하지만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둘 다 여자들과 염문을 뿌리는 사람이었으므로 아무래도 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닐 것이다.

열여덟 살에 그는 금욕적 생활이 단단한목소리를 유지해줄 것이라는 생각에 1년간 성생활을 포기했다고 한다. 어쩌면 이런 처방이 정말로 통했을지도 모르는데 훗날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째진 목소리와는 달리 듣기 좋고 특색 있는 목소리를 자랑했기때문이다.

카이사르의 죽음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진정 크나큰 손실이었다. 옥타비아누스의 인생으로 들어와서 아버지 역할을 하고, 그에게 위대해질 잠재성이 있다는 의식을 심어주는 데에 각별히 신경써준 사람이 살해된 것이다.

그러나 슬픔만이 그의 유일한 감정은 아니었다. 그는 공포와 분노그리고 복수에 대한 욕망을 느꼈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죽음은 타격이자기회이기도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독재관의 상속인이자 이제 가문의수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서 싸워야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나중에 자랑스레 배포할 연설을 했다." 그 연설은 결정적15인 순간이었다. 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조각상으로 오른손을 뻗으며양부의 영예들을 획득하겠다고 맹세했다. 

그는 막 열아홉 살이 되었지만이미 이전 로마 종신 독재관의 권력과 영광이 모두 자신의 것이라고 천명했다. 역사를 살펴보면, 이보다 덜한 주장으로도 정신병자 취급을 받은사람들이 많다.

로마는 적들로 넘쳐났다. 집정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로마 시를 장악하고 있었고,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은 일시적인 후퇴를 한 뒤에 다시 힘을 규합하고 있었다. 그들은 옥타비아누스가 전혀 달갑지 않았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가 싫기는 마찬가지였다. 

힘세고 잘생긴안토니우스는 헤라클레스를 자신의 수호신으로 삼았다. 헤라클레스는 책임감 정의와 더불어 용맹의 상징이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를 얕잡아보았다. 카이사르의 먼 친척이자 오랜 지인으로서 안토니우스는 자신이 피살된 독재자의 마땅한 계승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결연했다. 그는 명예와 영광을 원했고 그것을위해서 어떤 대가를 치르든 개의치 않았다. 그는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카이사르의 죽음에 애통해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그를 위해서복수를 할 작정이었다. 아니, 아예 그가 될 작정이었다. 

그는 카이사르가유언장에서 제시한 입양을 최종적으로 정식화하는 절차에 착수했다. 비록우리는 그를 계속해서 옥타비아누스라고 부를 것이지만 이제 그는 자신을카이사르라고 불렀다. 마치 처음부터 그 이름을 가지고 태어난 듯이 그는카이사르를 쉽사리 자기 이름으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그 이름을 권력의부적처럼, 그 이름이 이미 수세기에 걸친 무게감을 가지고 있기라도 한듯이 다루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카이사르라는 호칭을 처음 쓴 사람이지만 그런 사람이 그녀가 마지막은 아닐 운명이었다.

정치인으로서 키케로의 경력은 희비가 엇갈렸다. 그는 집정관으로 재직할 당시 반란을 진압했지만 그 와중에 5명의 로마 시민을 재판 없이 처형하는 바람에 나중에 일시적으로 해외로 도피해야 했다. 내전 시기에는 이리저리 오락가락하다가 카이사르에게 사면과 더불어 자신의 저작에 대한찬사도 받았지만, 권력으로 향하는 문이 닫혔음을 깨달았다. 칩거하던 키케로는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정계에 복귀하여 암살자들을 지지했다. 이제옥타비아누스는 키케로에게 자신이 바로 카이사르가 억누른 자유를 회복할 자라는 것을 설득시켰다.

표면상으로 이것은 물정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키케로는 카이사르같은 또다른 군사 독재자로부터 공화정을 구해내고 싶어했다. 

노인네가 많이 물러진 것일까?
아니다. 그는 옥타비아누스라는 패가 위험천만한 도박이라는 것을 알고있었지만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키케로는 옥타비아누스의 연장자인 아토니우스가 더 노련하고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옥타비아누스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키케로와 옥타비아누스는 전략적으로 동맹을 맺었고, 그 다음 진짜 문제는 누가 먼저 누구를 버리고 최후의 승자가될 것인가였다.

옥타비아누스의 젊음은 장점으로 드러났다. 그는 구체제에 딱히 기득권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뒤집는 데에 별 거리낌이 없었다.

원로원은 일시적인 우군일 뿐이었다. 옥타비아누스에게 합법성을 부여하는 데에는 유용했지만 카이사르의 위상을 획득하려는 그의 목표에는 적대적이었다. 안토니우스가 더 좋은 파트너였는데, 그에게는 공화정이라는로마의 헌정체제에 대한 원로원과 같은 애착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로 귀환하고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옥타비아누스는 정치와 전쟁을 통해서 장애물을 교묘히 헤쳐나갔고 경쟁자들을 한 수 앞질렀으며,
로마 제국의 최강자 3인방 중의 한 명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을 스무 살의나이에 달성했다.

스물네 살에 옥타비아누스는 많은 업적을 이루었다. 그의 야심은 끝이없었고 지성은 예리했으며, 판단에는 자신감이 있었고, 무한한 근면성을갖추었다. 그의 설득은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여느 젊은이들처럼 여러 감정을 느꼈지만 무엇보다도 양부의 피실에 대한 분노를 느꼈다-그는 괴로움을 전략으로 전환하는 기술에 통달했다. 그리고 전략의 수립이 옥타비아누스의 특기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는 언제나 한참앞을 내다보았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시련들에 맞서기 위해서는 그래야할 것이었다.

그러나 정치선전에 관한 한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베스타 처녀들로부터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을 압수하면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유언장은안토니우스가 죽을 경우 알렉산드리아에서 클레오파트라와 나란히 묻히기를 바란다는 의사를 담고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로마제국의 권좌를 알렉산드리아로 옮길 심산이라고 주장하며 경쟁자가 반역자라고 규탄했다.

전쟁의 횃불은 꺼졌다. 세계는 더 따분해졌지만 더 평온해졌다. 옥타비아누스의 수호신 아폴론, 즉 이성의 신이 안토니우스의 수호신 헤라클레스 완력의 상징을 무찌른 것이다. 옥타비아누스는 이제 로마 제국의 주인으로 홀로 우뚝 서 있었다. 그리고 제국은 정말로 로마다울 것이었다. 악티움 전투는 제국의 무게 중심을 계속 로마에 유지시켰으며, 이런 상황은다음 3세기 동안에도 계속되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전략의 천재였지만 사랑을 통해서 세상을 움직였다.
그녀는 로마 최고 권력자 두 사람을 연달아 유혹하여 그들의 자식을 낳았다. 로마 제국을 무너뜨릴 뻔했지만 옥타비아누스라는 제대로 된 맞수를만났다.

이제 이집트는 로마의 일개 속주였고, 옥타비아누스는 그곳의 파라오였다. 클레오파트라는 물론 알렉산드로스와 카이사르의 것이었던 도시의 명예는 이제 그의 것이었다. 무력으로 그리고 설득의 힘으로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이 카이사르의 아들임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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