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투스는 하나의 아이콘이며, 그럴 만한 사람이다. 모든 일에서 이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보다 더 잘 보여주는 역사적 인물은거의 없다.
그는 한 세기에 걸친 혁명을 종식시켰고 로마공화정을 무너뜨렸으며, 공화정을 자신이 초대 황제가 된 제국으로 대체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수수께끼 같은 사람이기도 하다. 네 살에 아버지를 여읜 그는열아홉 살에 로마 최고의 정치 행위자 중의 한 명이 되었다. 그는 어떻게그런 일을, 그리고 이보다 더 많은 일을 해냈을까?
그는 어떻게 역사상 가장 화려한 매력이 넘치는 한 쌍인 안토니우스와클레오파트라의 반대를 극복했을까?
어떻게 유약한 소년은 성공적인 군벌이 되고, 그 다음 어떻게 역사상 가장 유명한 평화의 증진자 중의 한명으로 변신했을까?
어떻게 그는 완벽한 2인자, 즉 우두머리의 권력을위협하지 않으면서도 그의 장군이자 행정가로서 복무하는 파트너를 찾아냈을까?
어떻게 한 세기동안 이어지는 왕조와 그보다 더 긴 세기 동안에 지속된 제국을 창건했을까?
긴 인생의 말년에 아우구스투스는 이런 몇몇 질문들에 대답했다. 로마에 있는 그의 영묘 앞에 세워진 청동 원기둥에 그는 다음의 문장을 포함하는 상세한 내용의 비문을 새기게 했다.
"국사를 관장할 절대적 권한을 만장일치로 부여받아 내전의 불꽃을 꺼뜨렸을 때, 나는 공화정을 나의 수중에서 원로원과 로마 민중의 뜻에 다시 맡겼다. 이런 봉사 덕분에 나는 원로원의 칙령으로 아우구스투스(존엄자라는 뜻)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것이 공식적인 설명이었다. 진짜 내막은 무엇일까?
옥타비아누스가 자라는 동안 카이사르는 로마에 혁명을 일으키고 있었고, 로마는 자부심이 강한 자치 공화정으로 진화한 상태였다. 로마 민중과엘리트 계층은 민회와 법정, 선출 공직자, 원로원 같은 제도들을 통해서권력을 공유했다. 이론상으로는 그러했다.
그러나 실제로 공화정은 카이사르 같은 정복자 장군과 그를 따르는 수만 명의 충성스러운 병사들 앞에서 버틸 수가 없었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갈리아에서 이탈리아로 진군했을 때, 그는 이미 50년에 걸쳐 간헐적인 내란을 겪어온 나라에 내전을촉발시켰다. 이 내전은 다시금 두 세대를 거슬러올라가는 위기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로마 시와 그 제국을 길들일 수 있는 누군가만이 평화와 질서, 안정을가져올 수 있었다. 카이사르는 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정복자이지 건설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할 수 없다면 과연 누가 해낼 수 있을까?
야망에 불타오르는 옥타비아누스는 타고난 정치인이었다. 영리하고, 매력적이며, 의사소통에 뛰어났으며 잘생겼다. 의지도 굳건했다. 그리고그에게는 아티아가 있었으니, 그녀는 분명히 기회가 날 때마다 카이사르에게 자기 아들에 대한 칭찬을 실컷 늘어놓았을 것이다.
쉽게 속는 어수룩한 자들이나 이런 이야기를믿겠지만, 카이사르는 대중이 쉽게 속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따라서이런 뜬소문에 깊은 인상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옥타비아누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골랐을 때에 카이사르는 위대함의 씨앗을 보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선택이 밖으로 알려지자, 일부 사람들은 열일곱 살짜리가 부정한 술수도 없이 세계 최고의 권력자로 하여금 자신을 후계자로 지목하도록 설득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어했다.
여기서 부정한 술수란 섹스였다. 옥타비아누스의 라이벌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나중에 그 소년이 히스파니아에 있을 당시 카이사르와 관계를맺었다고 손가락질했다. 한편으로 이런 이야기는 로마 정치가들이 자신들의 정적에게 수시로 꺼내는 중상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옥타비아누스는야심만만한 만큼 잘생기기도 했고, 풍문에 따르면 카이사르도 본인이 십대였을 때에 어느 막강한 연장자와 잠자리를 가졌다고 한다." 하지만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둘 다 여자들과 염문을 뿌리는 사람이었으므로 아무래도 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닐 것이다.
열여덟 살에 그는 금욕적 생활이 단단한목소리를 유지해줄 것이라는 생각에 1년간 성생활을 포기했다고 한다. 어쩌면 이런 처방이 정말로 통했을지도 모르는데 훗날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째진 목소리와는 달리 듣기 좋고 특색 있는 목소리를 자랑했기때문이다.
카이사르의 죽음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진정 크나큰 손실이었다. 옥타비아누스의 인생으로 들어와서 아버지 역할을 하고, 그에게 위대해질 잠재성이 있다는 의식을 심어주는 데에 각별히 신경써준 사람이 살해된 것이다.
그러나 슬픔만이 그의 유일한 감정은 아니었다. 그는 공포와 분노그리고 복수에 대한 욕망을 느꼈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죽음은 타격이자기회이기도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독재관의 상속인이자 이제 가문의수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서 싸워야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나중에 자랑스레 배포할 연설을 했다." 그 연설은 결정적15인 순간이었다. 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조각상으로 오른손을 뻗으며양부의 영예들을 획득하겠다고 맹세했다.
그는 막 열아홉 살이 되었지만이미 이전 로마 종신 독재관의 권력과 영광이 모두 자신의 것이라고 천명했다. 역사를 살펴보면, 이보다 덜한 주장으로도 정신병자 취급을 받은사람들이 많다.
로마는 적들로 넘쳐났다. 집정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로마 시를 장악하고 있었고,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은 일시적인 후퇴를 한 뒤에 다시 힘을 규합하고 있었다. 그들은 옥타비아누스가 전혀 달갑지 않았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가 싫기는 마찬가지였다.
힘세고 잘생긴안토니우스는 헤라클레스를 자신의 수호신으로 삼았다. 헤라클레스는 책임감 정의와 더불어 용맹의 상징이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를 얕잡아보았다. 카이사르의 먼 친척이자 오랜 지인으로서 안토니우스는 자신이 피살된 독재자의 마땅한 계승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결연했다. 그는 명예와 영광을 원했고 그것을위해서 어떤 대가를 치르든 개의치 않았다. 그는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카이사르의 죽음에 애통해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그를 위해서복수를 할 작정이었다. 아니, 아예 그가 될 작정이었다.
그는 카이사르가유언장에서 제시한 입양을 최종적으로 정식화하는 절차에 착수했다. 비록우리는 그를 계속해서 옥타비아누스라고 부를 것이지만 이제 그는 자신을카이사르라고 불렀다. 마치 처음부터 그 이름을 가지고 태어난 듯이 그는카이사르를 쉽사리 자기 이름으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그 이름을 권력의부적처럼, 그 이름이 이미 수세기에 걸친 무게감을 가지고 있기라도 한듯이 다루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카이사르라는 호칭을 처음 쓴 사람이지만 그런 사람이 그녀가 마지막은 아닐 운명이었다.
정치인으로서 키케로의 경력은 희비가 엇갈렸다. 그는 집정관으로 재직할 당시 반란을 진압했지만 그 와중에 5명의 로마 시민을 재판 없이 처형하는 바람에 나중에 일시적으로 해외로 도피해야 했다. 내전 시기에는 이리저리 오락가락하다가 카이사르에게 사면과 더불어 자신의 저작에 대한찬사도 받았지만, 권력으로 향하는 문이 닫혔음을 깨달았다. 칩거하던 키케로는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정계에 복귀하여 암살자들을 지지했다. 이제옥타비아누스는 키케로에게 자신이 바로 카이사르가 억누른 자유를 회복할 자라는 것을 설득시켰다.
표면상으로 이것은 물정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키케로는 카이사르같은 또다른 군사 독재자로부터 공화정을 구해내고 싶어했다.
노인네가 많이 물러진 것일까? 아니다. 그는 옥타비아누스라는 패가 위험천만한 도박이라는 것을 알고있었지만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키케로는 옥타비아누스의 연장자인 아토니우스가 더 노련하고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옥타비아누스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키케로와 옥타비아누스는 전략적으로 동맹을 맺었고, 그 다음 진짜 문제는 누가 먼저 누구를 버리고 최후의 승자가될 것인가였다.
옥타비아누스의 젊음은 장점으로 드러났다. 그는 구체제에 딱히 기득권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뒤집는 데에 별 거리낌이 없었다.
원로원은 일시적인 우군일 뿐이었다. 옥타비아누스에게 합법성을 부여하는 데에는 유용했지만 카이사르의 위상을 획득하려는 그의 목표에는 적대적이었다. 안토니우스가 더 좋은 파트너였는데, 그에게는 공화정이라는로마의 헌정체제에 대한 원로원과 같은 애착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로 귀환하고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옥타비아누스는 정치와 전쟁을 통해서 장애물을 교묘히 헤쳐나갔고 경쟁자들을 한 수 앞질렀으며, 로마 제국의 최강자 3인방 중의 한 명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을 스무 살의나이에 달성했다.
스물네 살에 옥타비아누스는 많은 업적을 이루었다. 그의 야심은 끝이없었고 지성은 예리했으며, 판단에는 자신감이 있었고, 무한한 근면성을갖추었다. 그의 설득은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여느 젊은이들처럼 여러 감정을 느꼈지만 무엇보다도 양부의 피실에 대한 분노를 느꼈다-그는 괴로움을 전략으로 전환하는 기술에 통달했다. 그리고 전략의 수립이 옥타비아누스의 특기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는 언제나 한참앞을 내다보았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시련들에 맞서기 위해서는 그래야할 것이었다.
그러나 정치선전에 관한 한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베스타 처녀들로부터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을 압수하면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유언장은안토니우스가 죽을 경우 알렉산드리아에서 클레오파트라와 나란히 묻히기를 바란다는 의사를 담고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로마제국의 권좌를 알렉산드리아로 옮길 심산이라고 주장하며 경쟁자가 반역자라고 규탄했다.
전쟁의 횃불은 꺼졌다. 세계는 더 따분해졌지만 더 평온해졌다. 옥타비아누스의 수호신 아폴론, 즉 이성의 신이 안토니우스의 수호신 헤라클레스 완력의 상징을 무찌른 것이다. 옥타비아누스는 이제 로마 제국의 주인으로 홀로 우뚝 서 있었다. 그리고 제국은 정말로 로마다울 것이었다. 악티움 전투는 제국의 무게 중심을 계속 로마에 유지시켰으며, 이런 상황은다음 3세기 동안에도 계속되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전략의 천재였지만 사랑을 통해서 세상을 움직였다. 그녀는 로마 최고 권력자 두 사람을 연달아 유혹하여 그들의 자식을 낳았다. 로마 제국을 무너뜨릴 뻔했지만 옥타비아누스라는 제대로 된 맞수를만났다.
이제 이집트는 로마의 일개 속주였고, 옥타비아누스는 그곳의 파라오였다. 클레오파트라는 물론 알렉산드로스와 카이사르의 것이었던 도시의 명예는 이제 그의 것이었다. 무력으로 그리고 설득의 힘으로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이 카이사르의 아들임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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